141화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 (5)
경기를 앞두고.
콘라드 자작은 수하를 독려했다.
“가브리엘. 컨디션은 어때?”
“아주 좋습니다.”
“그래, 당연히 좋아야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데,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빠서는 안 되지.”
가브리엘.
40대 초반의 검사.
어렸을 때부터 콘라드 가문을 위해 살았던 그는, 그야말로 콘라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비장의 무기였다.
크리스처럼 대단한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기대치만큼의 착실한 성장세를 보였고, 콘라드 가문은 가브리엘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지원이든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한 달 전에 3성의 벽을 넘었다.
정말 대단한 경사였지만, 콘라드 자작은 일부러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번 대회는 오라의 제한이 걸려 있어. 언뜻 보면 높은 경지의 검사들에게 불리한 규칙인 것 같지만, 사실 성의 차이가 높을수록 1성의 오라도 파괴력의 차이가 대단히 크지. 이건 오히려 낮은 경지의 검사들에게 명백히 불리한 싸움이야. 그들은 본인들의 전력을 발휘할 수 없을 테고, 가브리엘과 같은 3성 검사들은 오라에서부터 압도적인 차이를 점할 수 있어.’
세간에 알려진 소문으로는 가브리엘은 2성 검사다.
3성은 동북쪽 일대에서 흔하지 않기에, 굳이 최신 정보를 퍼트려서 대비할 명분을 줄 이유가 없었다.
힐끗.
상대편의 모습을 확인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오른쪽 소매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브리엘. 맥버니 저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야. 대진운이 좋아서 3라운드까지 진출했을 뿐이지, 한쪽 팔을 잃어버려서 밸런스가 완전히 엉망이야. 명심해. 동북쪽 연합회를 대표하는 검사 중에서 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탈락해 버렸다는 것을. 너는 동북쪽 연합회의 희망이고, 그냥 승리하는 것 정도로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어. 아주 압도적으로. 상대가 외팔이 검사라고 해서 같잖은 동정심을 가지지 말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보란 듯이 처참하게 짓밟아 버리라고. 알겠어?”
“명을 받듭니다.”
“역시.”
히죽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
그들의 행보는 압도적이었다.
앞선 5개의 조에서 상대 검사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드미트리 가문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드미트리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대단한 실력자를 6명이나 동원할 수 없었고, 결국 맥버니라는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약간의 불길함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콘라드 자작으로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설마 외팔이 병신에게 지겠어?’
의구심을 버렸다.
가브리엘은 3성 검사다.
승리가 당연하고, 이번 경기는 우승을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양 선수 무대 위로.”
심판의 목소리.
지금부터는 낙장불입이었다.
* * *
척.
두 검사가 무대로 올라왔다.
먼저 자리를 잡은 가브리엘은, 같잖다는 눈빛으로 맥버니의 모습을 살폈다.
“쯧.”
팔락거리는 소매.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맥버니를 몰라도 그랬을 텐데, 대회 전에 한 동료로부터 맥버니에 관한 말을 들었다.
“맥버니? 한때 서부 전선에서 활약하던 녀석인데, 검을 쓰던 오른팔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렸어. 걔가 우승할 확률은 제로야. 내가 일 년 전에 맥버니를 만났던 적이 있는데, 왼팔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기는커녕 그 손으로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것도 힘들어하더라. 그런 녀석이 네 조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로만 드미트리의 6관왕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지.”
동료가 단언했다.
맥버니의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들으니, 맥버니의 모습이 더욱 황당하게 다가왔다.
‘세상에는 주제를 모르는 녀석들이 존재하지. 오른팔이 건재할 때도 기사의 문턱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평민이, 팔을 하나 잃어버리고도 기사들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다니. 내가 오늘 맥버니에게 현실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똑똑히 보여 주마.’
콘라드 가문과는 별개다.
맥버니의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준비가 끝났다.
심판이 양 선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한 발 물러나며 깃발을 펄럭였다.
펄럭.
선공은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들었고, 거대한 체구가 마치 성난 멧돼지처럼 맥버니를 덮쳤다.
카앙!
카카카캉!
강렬한 공방이었다.
검과 검이 부닥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고, 맥버니는 연신 뒤로 밀려나면서 비틀거리는 움직임을 보였다.
명백히 힘에서부터 밀리는 모습이었다.
예상이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브리엘은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리며 달려들었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카카카캉!
오라는 사용하지 않았다.
맥버니와 같은 병신은.
검술만으로도 충분히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무대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콘라드 자작도, 가브리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웃음을 보였다.
파박.
압박이 대단했다.
어느새 맥버니는 무대 끝으로 밀려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가브리엘은 페이크를 넣었다.
훅.
‘이걸 막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피할 수밖에 없겠지.’
일부러 상대의 왼팔을 노렸다.
상대에게 하나뿐인 팔.
맥버니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가브리엘의 예상대로 오른쪽으로 피하는 스텝을 밟았다.
그 순간.
타닥.
바짝 붙으며 연계 공격을 펼쳤다.
검을 가로로 휘두르는 척 방어를 유도하고, 빠르게 스텝을 밟아 팔이 없는 오른편을 공격했다.
‘끝났다.’
완벽했다.
왼팔은 모든 범위를 커버할 수 없고, 이번 공격은 그런 허점을 공략했다.
팔 하나를 사용한다는 의미.
그건 단순히 익숙하지 않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오른쪽 공간을 완전히 노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때였다.
비틀.
맥버니가 쓰러질 듯 몸을 틀었다.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등이 거의 바닥에 닿을 것 같은 상황에서, 맥버니는 허리만으로 균형을 잡더니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그리고는.
훅!
퍽.
“크윽.”
가브리엘의 팔뚝을 강타했다.
빠르게 반응해서 다행이었지, 조금만 늦었으면 얼굴을 맞았을 공격이었다.
“이 새끼가.”
가브리엘이 이를 악물었다.
겨우 외팔이 병신에게 한 방 먹었다니.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고, 가브리엘은 오라를 일으키며 맥버니를 몰아붙였다.
콰르르르릉.
카앙!
카카캉!
검이 부닥치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3성 검사가 사용하는 1성의 오라.
검으로 막아도 속이 뒤집힐 정도로 충격이 대단할 텐데, 맥버니는 공격을 막을 때마다 비스듬히 날을 틀어서 공격을 튕겨 냈다.
위험한 장면은 계속 연출되었다.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맥버니는 계속해서 궁지에 몰렸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기괴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했다.
처음 한 번은.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반복되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길어지는 경기에 가브리엘은 이상함을 느꼈다.
‘맥버니. 이 녀석은 밸런스를 잃어버린 게 아니야. 오른팔이 없으면서 생기는 몸의 불균형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이번에도 반격을 시도하는 맥버니.
몸을 틀어서 왼팔의 거리를 확보하더니, 넘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가브리엘의 급소를 노렸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공격은 가까스로 막아 냈지만, 가브리엘은 그제야 진실이 보였다.
‘맥버니의 3라운드 진출은 요행이 아니다.’
외팔이 병신.
팔락이는 소매가, 더는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 * *
처음 좌수검을 배울 때.
맥버니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좌수검의 기본은 잃어버린 몸의 균형을 활용하는 것에 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신체가 발달하는데, 너는 팔을 하나 잃어버림으로써 이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것이 검사로서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좌수검은 잃어버린 균형으로부터 비롯되는 독특한 움직임을 검술로 승화시켰다.”
왼팔로 검을 휘두르면.
신체 구조상 당연히 몸이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오른쪽이 훤히 드러나는 상황에, 오른팔이 있을 때와는 다르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기 힘들었다.
그런데.
좌수검은 다르게 생각했다.
오히려 왼쪽으로 무너지는 균형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적절한 발의 위치를 가져가며 허리의 힘을 활용했다.
그로 인한 효과는 마법과도 같았다.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오히려 상대의 허점을 공략했다.
충격적이었다.
좌수검.
한 검사의 경험 안에는, 무너진 균형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이 녹아들어 있었다.
‘좌수검의 창시자는 나와 똑같은 외팔이다. 그도 팔을 잃어버린 현실에 충분히 절망스러웠을 텐데도, 대체 어떻게 이런 검술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 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니다. 그와 나는 다르지 않다. 팔이 잘려 나간 그 순간부터 현실을 포기해 버린 나와는 다르게,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았기에 좌수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좌수검은 단순히 새로운 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외팔이의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때부터.
이를 악물었다.
검을 얼마나 휘둘렀는지 모른다.
그간 왼팔을 사용하는 것에는 익숙해졌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넘어지고.
땅에 얼굴을 받고.
피를 흘리고.
처절한 시간이었다.
한심한 현실을 다시 한번 마주하는 순간에도, 맥버니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주군은 내게 새로운 현실을 제시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수준으로는 절대 주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드미트리에 도착하고.
맥버니는 충격을 받았다.
드미트리의 수하들이 대단한 실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았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수련한 기간이 일 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신이었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였고, 그로 인해 그의 수하들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로만 드미트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보다 뛰어난 검사를 수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병신이야. 주군이 나를 받아들인 것은, 내 검술 실력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의 충성심이 필요한 것이겠지. 팔이 하나 없다고 제자리걸음을 걸었다간 주군을 따르는 괴물들에 비해 도태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긴 싫다. 내가 어떻게 잡은 희망인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로만의 사람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동아줄을 내려 준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중요한 인재로 사용하기를 바랐다.
왕국에서도 거절한 애물단지.
자신이라는 존재가, 이번만큼은 존재 의미를 찾길 바랐다.
‘주군을 대표하는 6인.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반드시 주군의 이름을 걸고 우승을 차지하고 말겠어.’
한 달의 시간.
악착같이 훈련했다.
이번에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병신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헨더슨과 같은 턱걸이.
6인에 포함되었다.
그 결과는, 맥버니가 현실을 마주하면서 얻은 눈물의 성과였다.
* * *
“후욱, 후욱.”
숨이 가빴다.
좌수검의 움직임.
체력적인 소모가 매우 심한 검술이었고, 가브리엘의 실력은 출중해서 쉽게 당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히죽.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공격이 눈앞에서 번뜩이는데도.
팔 하나로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삶의 밑바닥에서.
맥버니는 다시 일어났다.
모두가 맥버니의 패배를 확신하는 상황에서, 맥버니는 순간적으로 가브리엘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딜!”
파박.
반격은 빨랐다.
검을 빠르게 회수하며, 가브리엘은 맥버니의 머리를 노렸다.
맥버니가 스텝을 밟았다.
상대의 공격을 살짝 피하면서, 다리 부근에서 폭발하는 오라를 이용해 가브리엘의 왼편을 공격했다.
턱걸이로 도달한 오라 검사의 경지.
수라 심법의 기적이었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으나, 가브리엘로서는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속도였다.
콰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가브리엘이 성난 얼굴로, 맥버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팔락.
“……!”
순간 가브리엘의 표정이 굳었다.
맥버니는 일부러 몸을 내주었다.
그로 인한 결과는 당연히 맥버니의 패배여야 하건만, 검이 지나간 자리가 펄럭이며 현실을 보여 주었다.
오른팔.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순간적인 상황에 오른팔이 없음을 의식하지 못했고, 맥버니는 의도적으로 오른팔 부위를 내주었다.
상식의 세계에 사는 검사들은.
오른팔을 베어 버리는 동작이 몸에 익었을 것이다.
그건 정상인을 상대로 너무나도 훌륭한 반격이었고, 가브리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함정에 빠진 그 순간.
가브리엘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검을 보았다.
퍽!
“컥.”
피가 튀었다.
가브리엘의 거대한 체구가 뒤로 무너지며, 시야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경악한 관중들.
창백한 얼굴의 동북쪽 연합회.
충격을 받아 말을 잃어버린 콘라드 자작.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
풀썩.
가브리엘이 쓰러졌다.
맥버니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로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게 새로운 삶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미쳤다!”
“외팔이 검사가 가브리엘을 이겼어!”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
그건 예상과는 다른 변수이자, 콘라드 자작을 비롯한 동북쪽 연합회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