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한 단계 앞으로 (1)
보름 전.
화륵.
화르르륵.
로만은 화덕에 불을 붙였다.
염화신공을 발휘해, 사방에서 일렁이는 열기를 한껏 받아들였다.
‘만약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버틀러를 처음 만났다면. 나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상념(想念)에 빠졌다.
반복적으로 강철을 두드리는 행위와는 다르게, 로만은 머릿속으로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로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대전사 전투에서 버틀러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은 준비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지, 처음 만났던 순간의 나는 5성의 오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전생의 기억으로 인해 오만한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헥토르 왕국이 전력을 다해 달려드는 전쟁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의 출현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사실.
버틀러와 같은 변수는 예상했다.
그렇기에 도망칠 길을 열어 두고, 게릴라 전투를 통해 적을 상대했다.
‘나는 아직 내가 약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만이 아니다.
전생으로 인한 괴리(乖離)였다.
현생의 로만 드미트리로서 적응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로만의 정신이 천마 백중혁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적들과 부딪쳤다.
버틀러라는 가상의 위험을 현실로 마주하고, 자신의 위치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 대가로 목숨을 걸었지만, 로만은 버틀러를 쓰러트리고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전생의 나는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현생의 나는 아니다. 버틀러는 대륙 제일은커녕, 헥토르 왕국에서도 최고라고 말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존재를 상대로 나는 목숨을 걸어야 했고, 앞으로도 수많은 싸움에서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대륙의 강자들. 그들과의 승부에서 항상 승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따위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
카앙!
캉!
강철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우스웠다.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가며 많은 일을 벌였는데, 그것을 완벽하게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그때 패배해 버렸다면.
그 책임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하들이 모조리 죽었을 것이고, 그들의 가족들은 평생 로만을 원망하며 살았을 것이다.
원망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끝까지 자신의 손을 잡아 준 사람들은,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고 싶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내 욕심이다. 상대가 생각보다 강했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는 등의 변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모든 상황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버틀러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검사를 만났을지라도. 나는 그 상대의 목을 베어, 내 위치에서 흔들림 없이 존재할 것이다.’
정점의 자리.
외롭고 고독하다.
자신의 몫을 누군가 대신해 주길 바랄 수 없고, 나약한 마음은 정점의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감내했다.
자신이 바라는 삶이기에.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짐이 많아진다고 할지라도, 로만은 누군가에게 굴복하는 삶은 생각조차 싫었다.
화륵.
화르르르륵.
불길이 타올랐다.
로만은 끊임없이 강철을 두드렸다.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로만의 의식이 불길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시간이 흘렀다.
해가 떠오르고, 해가 지는 동안.
로만은 대장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화덕의 불길 앞에서 강철을 두드리는 행위만 반복했다.
카앙!
캉!
입이 바짝 말랐다.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새빨개졌고, 타닥타닥 타오르는 피부는 화상의 초기 증상을 보였다.
게다가 수시로 현기증이 일었다.
그동안 물 한 모금, 밥 한 톨 먹지 않았기에, 로만의 육체는 끊임없이 한계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도.
로만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상념으로 뒤얽혔던 머릿속이 정리되며, 로만은 단 하나의 목적에만 집중했다.
‘새로운 나를 받아들일 검이 필요하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경지.
현재에 집중했다.
검에 빠져들며, 일정한 속도와 간격으로 강철을 두드렸다.
카앙!
충격이 일었다.
빨간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굶주림과 피로, 열기가 로만의 감각을 방해했지만, 로만은 한 번의 호흡으로 그것들을 모두 이겨 냈다.
“후우.”
염화신공.
불길을 삼키며, 그 안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불길을 내뱉으며, 몸의 불순물을 열기에 태워 버렸다.
단순히 강철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다.
로만은 검과 불길이라는 매개체를 활용해, 자신의 몸을 이상적인 형태로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발렌티노 후작.
그는 어떻게 블레이즈와 같은 검이 탄생했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만약 진실을 안다고 할지라도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나에 완벽하게 반응하고 오히려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검.
그건 일반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로만이 호흡하는 과정을 함께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카앙!
검을 두드릴 때면.
로만의 마나가 강철에 전달되었다.
로만이 호흡을 들이킬 때는, 강철에 전달된 마나가 회수되며 강철의 불순물도 같이 빨아들였다.
그렇게 반복되는 행위.
강철은 마나에 익숙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강철로 검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로만과 같은 호흡을 주고받은 강철은 전혀 다른 형태의 물질이 되었다.
방법을 알아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작업.
로만은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도 잊어버린 상태로, 미친 사람처럼 똑같은 행동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지만, 자연과 동화되어 흡수한 기운들로 로만은 몸을 움직일 힘을 얻었다.
극한의 상태.
광기(狂氣)에 타올랐다.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로만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얼마나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고통도 잊고.
굶주림도 잊어버렸다.
팔을 내리치는 감각도 희미해져 버렸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몸은 저절로 움직일 뿐이었다.
정확히 보름째가 되던 날.
투둑.
후두둑.
로만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화상으로 인해 진물이 흐르던 피부가 떨어져 나가며, 그 사이로 백옥 같은 새로운 피부가 자라났다.
두 번째 환골탈태(換骨奪胎).
로만이,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 * *
그날.
로만은 대장간을 나섰다.
뜨거운 열기에 노출되었다가 찬 바람을 맞았지만, 로만의 감각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한서불침(寒暑不侵).
새로운 경지에 들었다.
이제 로만에게, 추위와 더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두 번째 환골탈태. 나는 이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기 위한 초석을 쌓았다.’
단전.
새롭게 받아들인 마나가 들끓었다.
당장에라도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 마나에, 로만은 정신을 집중해 주변의 환경을 천천히 변화시켰다.
하나, 둘.
인기척이 생겨났다.
이윽고, 가상의 존재는 로만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폭발하는 오라.
버틀러였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버틀러가 나타나, 동시에 5성의 오라를 발현하며 로만을 공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공격이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로만의 존재는 위태롭게 보였지만, 로만은 단전의 오라를 일으켜 버틀러의 공격을 그대로 막았다.
콰앙!
콰콰콰쾅!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로만은 밀려나지 않았다.
먹지 못해서 메마른 얼굴에 상처가 생겨났지만, 오히려 오라의 폭풍에 발을 들이며 검법을 펼쳤다.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콰앙!
버틀러의 머리를 공격했다.
첫 번째 버틀러는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고, 두 번째 버틀러는 빠르게 비어 있는 공간을 파고들며 로만의 옆구리를 노렸다.
바람이 불었다.
아슬아슬하게 검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정면에서 공격을 막았던 첫 번째 버틀러가 오라를 폭발시키며 공격을 시도했다.
‘천마검법 전반부 이초식.’
콰앙!
콰르르르르릉.
적들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이어서.
수십 합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육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속도였고, 로만과 버틀러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상대를 밀어붙였다.
누가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흐트러지는 존재가 있다면, 상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사선.
죽음 위에 섰다.
실제로 몸에 상처가 생겨나는 데도, 격렬하게 뛰는 심장에 로만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나는 패배자가 되기 위해서 새로운 삶을 택한 것이 아니다. 나 로만 드미트리는, 언제나 포식자로 남을 것이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상대를 압도했다.
천마검법 전반부 삼초식.
마나가 휘몰아쳤다.
예전과 똑같은 공격이었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난 마나는 버틀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가상의 버틀러들은 힘을 합쳤다. 혼자서는 힘들다는 생각에, 동시에 로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폭발하는 오라.
같은 곳을 공격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저 공격을 막을 힘이 없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도망쳤을 것이고, 패배로 인해 어떤 결과든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보름간 무아지경의 시간을 보내며, 로만은 다른 세계로 한 발 나아갔다.
‘천마검법 중반부 삼초식.’
콰릉.
콰르르르르릉.
천마의 검.
로만이, 전생(前生)의 힘을 발현했다.
* * *
천마검법.
그것은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 삼초식.
중반부 삼초식.
후반부 삼초식.
세 번의 환골탈태를 걸쳐 후반부 삼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단언컨대 그것을 막아 낼 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만 따위가 아니다.
무림에서 절대 고수라고 불리는 상대들을 쓰러트리며 얻은, 천마 백중혁으로서의 확신이었다.
고로.
‘중반부 초식을 사용하면 버틀러를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다.’
확신이었다.
승리할 자신이 있었지만, 로만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평범한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전생과 똑같은 방식으로 천마검법을 사용한다면 분명히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바라는 것처럼 상대를 압도하지는 못한다. 버틀러는 대륙 제일이 아니다. 그런 존재를 상대로도 압도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들을 실현할 수 없다.’
마나가 들끓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명의 버틀러를 바라보며, 로만은 문득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전생의 힘을 그대로 발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이 세상의 검사들은 오라를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방법을 택한다. 부분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생길지는 몰라도, 어느 한 부분에서는 내가 발현하는 힘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고로, 매번 똑같은 수로 대응하는 것은 멍청한 선택이다.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나는 이 세상의 방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발상의 전환.
다르게 생각했다.
새로운 세상의 방식이 무조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을 무공에 활용했다.
‘천마검법 중반부 삼초식.’
콰릉.
콰르르르르릉.
단전이 요동쳤다.
필요한 만큼의 힘을 검에 골고루 전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은 폭발하듯 마나를 분출해 버렸다.
현생과 전생의 중도.
적절한 타협을 보았다.
강하게 분출하되, 현생의 사람들처럼 무분별하게 분출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콰르르르릉.
강렬하게 폭발하는 오라.
세상을 뒤엎은 밝은 빛무리가, 그대로 버틀러의 존재를 집어삼켜 버렸다.
콰콰쾅.
콰콰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