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서열 정리 (3)
귀족의 세계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서로 분쟁이 있더라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오늘과 같은 자리에서는, 절대 상대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예의다.
그걸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끝까지 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콘라드 자작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상대는 선을 넘었다.
만약 남들이 보지 않는 조용한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콘라드 자작은 최선의 타협점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메로 남작도 아니고 장남에 불과한 로만 드미트리가.
이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놓고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렸다.
화가 났다.
드미트리가 동북쪽 일대의 실세라고는 하나, 대놓고 무시를 당했는데도 참아 넘길 수는 없었다.
“콘라드 가문이 드미트리의 농민들을 쫓아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내 가문의 것입니다. 내가 내 것을 환수하겠다는데, 그걸 일일이 드미트리 가문에 보고라도 해야 합니까? 아무리 드미트리의 세력이 대단하다지만, 우리는 당신의 말을 따르는 수하가 아닙니다.”
일부러 우리를 언급했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동북쪽 연합회 사람들이 말을 덧붙였다.
“콘라드 자작님의 말이 맞습니다. 설령 땅을 환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할지라도. 로만 님의 귀환을 축하하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그런 무례한 언행을 해야겠습니까? 이건 좀 아닙니다.”
“로만 님. 당신은 드미트리 가문의 주인이 아닙니다. 로메로 남작님이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가문 간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콘라드 자작님도 순순히 따랐겠지만, 로만 님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번 문제를 입에 올리시는 겁니까?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라서?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콘라드 자작님은 한 가문의 가주입니다. 이리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들은 사납게 로만을 몰아붙였다.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기에, 그걸 물고 늘어지면서 로만의 잘못이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동북쪽 연합회의 특징이지. 평소에는 거리를 두다가도, 서로가 위험하다 싶으면 이렇게 똘똘 뭉치지.’
웃겼다.
만약 베네딕트 후작이었다면.
아니, 중앙 정부의 비호를 받던 바르코 가문만 되었어도 이들이 이렇게 반응했을까?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귀족들은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고, 드미트리 가문은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상대라고 판단했다.
드미트리의 뒤에는 중앙 정부가 없다.
문제가 발생할지라도 동북쪽 일대 안에서 해결할 가능성이 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드미트리를 상대로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대 다수.
머릿수는 무한한 자신감을 부여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만은 자신의 계획에 확신을 얻었다.
‘동북쪽 일대를 비롯한 지방 귀족들은 이미 중앙 정부의 개가 되었다. 이들은 언제든 중앙 정부의 명령을 따라 드미트리의 턱밑에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이들을 완전히 도려내 버리든, 아니면 우리의 말을 잘 따르는 개로 만들든. 확실한 선택지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고로.
로만은 물러나지 않았다.
사납게 변한 얼굴로, 자신을 적대하는 귀족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다들 뭐 하자는 겁니까?”
* * *
상식적으로.
이렇게 커질 문제가 아니었다.
동북쪽 연합회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이와 관련 없는 귀족들도 놀란 얼굴을 보였다.
로만이 말했다.
“지금 여러분들은 제 언행이 무례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카이로 왕국에서 다른 귀족의 영지민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콘라드 자작님. 당신이 건드린 드미트리의 농민들은 제 사람들입니다. 드미트리에 거주하고, 드미트리에 세금을 내며, 드미트리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들을 건드렸습니다. 그러고도 지금 무례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 겁니까?”
상식 밖.
너무 당황스러우면 말을 잃게 된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 버리는 발언에, 콘라드 자작과 연합회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제가 화가 난 이유는 그런 일이 있고도 저에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거는 콘라드 자작님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드미트리가 어떤 가문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 사람들을 건드렸는데도, 실실 웃으면서 대화를 받아 주길 바라신 겁니까? 그랬다면 아주 크나큰 착각을 하셨습니다. 이번 문제는 드미트리 가문 내부에서 이미 회의를 모두 끝마친 사안입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이번 일의 전권을 일임받았고, 콘라드 가문의 행동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그제야.
콘라드 자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로만의 객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을 기다린 함정임을 깨달은 것이다.
낙장불입(落張不入)이었다.
지금이라도 한발 물러난다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겠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단 한 번의 굴복이라 할지라도, 드미트리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앞으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러서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본인들이 옳다는 듯이 로만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모습은.
로만이 바라던 바였다.
“아직도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으시군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다른 가문의 사람을 건드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드미트리 가문도 똑같이 하겠습니다. 만약 드미트리의 땅에서 드미트리 소속이 아닌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 책임을 수백 배로 물어 드리겠습니다. 아마 볼 만할 겁니다. 지금 저를 책망하신 분 중에는 드미트리 상단과 거래를 하지 않는 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하는지 한번 봅시다.”
외통수였다.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 발언.
그들은 몰랐겠지만, 애초에 이건 그들이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끝까지 해 봅시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드미트리는 이번 문제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 * *
왜.
세상을 살면 그런 상황이 있다.
정말 피하고 싶은데, 상대가 강제로 끌고 와 버리는 상황.
콘라드 자작으로서는 지금이 그랬다.
‘이런.’
드미트리 가문.
귀족들은 그들을 부정했다.
바르코를 무너트릴 정도로 강하고, 카이로에서 손꼽히는 대부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태생이 평민 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에 그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비위를 맞추면서도.
돌아서자마자 드미트리를 욕하는 게 바로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드미트리의 세력이 정말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로만의 말이 현실이 된다면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드미트리 가문은 동북쪽 일대 귀족들의 민심을 잃겠지만, 실존하는 그들의 힘은 우리의 숨통을 조여 버리겠지. 로만 드미트리. 단순히 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여우 같은 녀석이었구나. 대화로 문제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힘으로 우리를 찍어 누르려 하고 있다.’
눈동자를 굴렸다.
연합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해답을 구했지만, 그들로서도 선뜻 생각나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모두가 알았다.
연합회라는 존재는 약하기에 생긴 울타리였다.
포식자인 드미트리가 횡포를 부린다면, 그들로서는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이렇게 타협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동북쪽 일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타협하더라도 연합회의 저력은 증명해야 했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콘라드 자작님의 실수가 맞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로렌스 자작.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선후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드미트리 가문 사람들의 일인데, 그들에게 아무런 언급도 없이 해코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저라도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시지요.”
그건.
로만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로렌스 자작은 로만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때 발에 땀이 나도록 도움을 구하러 다녔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상황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하하호호 웃던 귀족들이, 바르코와 대척하는 상황에서는 조금의 온정도 베풀지 않았지. 동북쪽 연합회? 다 의미 없는 일이다. 로렌스는 앞으로 드미트리를 따르며 살아갈 것이다.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믿지 못할 다른 녀석들보다는 드미트리가 낫다.’
그는 은혜를 알았다.
자신의 발언으로 적대적인 세력이 생기겠지만, 로렌스 자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분위기가 변했다.
원래 시작이 어렵다.
로렌스 자작이 한번 물꼬를 트자, 친 드미트리 세력들이 말을 덧붙였다.
“이번 문제는 로만 님의 말이 옳습니다. 가문의 사람이 다른 가문에게 해코지를 당했는데, 대체 어떤 귀족이 그걸 웃으면서 넘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로만 님에게 사과하십시오.”
콘라드 자작이 당황했다.
그가 예상했던 그림과는 달랐다.
분위기를 몰아가서 로만을 압박했어야 했는데, 반반으로 나뉜 분위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보 후퇴.
분노를 삼켰다.
한발 물러난 그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파티장을 나가 버렸다.
* * *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콘라드 자작을 비롯한 동북쪽 연합회는 파티장을 떠났고, 친 드미트리 세력들만이 자리에 남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어차피 편이 갈라진 싸움이었다.
로만의 편을 들었기에, 확고하게 드미트리의 편으로서 남았다.
로렌스 자작이 말했다.
“동북쪽 연합회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들이 이번 문제로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로렌스 가문은 드미트리를 위해 무엇이든 도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희는, 바르코와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로만 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말을 높였다.
로만이 명성을 떨치면서, 로렌스 자작은 로만 드미트리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존재로 받아들였다.
참.
재밌는 관계였다.
처음에는 파혼 문제로 뒤얽혀서 서로 얼굴을 붉혔었는데, 인생의 흐름이 로렌스 자작의 충성심을 끌어냈다.
플로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변했지만, 수도로 떠난 이후에는 그녀의 소식을 들어 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었다.
사실 이번 문제를 혼자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밝혀 분위기를 망칠 이유는 없었다.
드미트리의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
그들은 리스크를 감수했다.
치하할 가치가 있었고, 로만은 일부러 파티장에 남아 그들이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도록 충분한 유대감을 쌓았다.
그래서인지 파티의 분위기는 처음보다도 좋았다.
귀족들은 밝은 얼굴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즈음에 로만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아버지를 만났다.
로메로 남작이 말했다.
“……정말 이렇게 극단적으로 일을 처리해도 괜찮겠느냐? 다수의 귀족이 우리의 편을 들어준 것은 매우 희망적인 일이나, 동북쪽 연합회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절대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걱정이 앞섰다.
로만의 방법.
귀족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자존심을 위해서는 목숨도 거는 족속이 귀족인데, 상대를 너무 과하게 밀어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이 말했다.
“아버지. 서열을 확실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전력을 다해야만 합니다. 극한의 분노를 느끼고 최선을 다해서 부딪쳤는데,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을 때 드미트리 가문과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동북쪽 연합회가 이대로 물러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제가 바라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똘똘 뭉쳐서, 어떻게든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해야만 제 계획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로만의 예상은 옳았다.
그 시각.
동북쪽 연합회는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로서는, 파티장에서의 굴욕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