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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127/615)

127화 전쟁이 남긴 변화 (2)

좌수검 송백.

그는 황실 금의위(錦衣衛) 출신이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던 그는 전쟁 도중에 오른팔을 잃었고, 상부에서 더는 현장에서 일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황실이 그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간의 공을 인정해 부와 명예를 안겨 주었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던 송백으로서는 평화로운 삶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송백은 한동안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검을 잡았다.

덧없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인(武人)으로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송백은 왼팔이 익숙해질 때까지 수년간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무공을 어느 정도 되찾았을 때, 자신이 만든 좌수검을 기반으로 무림의 고수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비무행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삼류 무인을 상대로도 애를 먹었다.

무너진 몸의 균형은 예전 기량을 완벽하게 회복할 수 없었고, 매 순간 목숨을 걸고 상대를 쓰러트렸다.

그러기를 수년. 좌수검은 점점 체계를 갖추어 갔다.

항상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비틀어진 몸의 균형을 오히려 공격적으로 활용했고, 송백의 변칙적인 공격에 수많은 무인이 쓰러졌다.

결국.

그는 백중혁을 만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 생을 마감하던 그때, 송백은 자신이 살아온 나날에 진심으로 웃음을 보였다.

‘좌수검 송백. 내가 만난 수많은 적 중에 제일의 무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왼팔 하나만을 활용한 변칙적인 검법은 실력의 차이를 넘어서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와의 대결에 진심으로 감탄해서 한동안 폐관 수련에 돌입했을 정도였지. 맥버니도 다르지 않다. 오른팔을 잃어 몸의 균형이 무너졌지만, 자연스럽게 왼팔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맥버니.

그를 원하는 이유는 좌수검을 닮아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선물해 주었던 남부 전선의 정보는, 맥버니가 전장에서 얼마나 유용한 인물인지를 증명했다.

맥버니와 같은 인재가 길가에 돌멩이처럼 떨어져 있다면.

거두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로만은 맥버니를 찾아갔고,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좌수검은 너와 같은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다. 하지만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했고, 나를 놀라게 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좌수 검법을 사용했다. 네가 나를 위해 앞으로의 미래를 맡기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는 너에게 좌수검을 알려 주겠다. 그리고 네 가치를 몰라보는 카이로 왕국과는 다르게, 너를 그 누구보다도 유용하게 사용하겠다.”

가식은 생략했다.

이건 거래였고, 충성심을 대가로 보상을 제안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의 가치를 활용해 주겠다는 로만의 말에, 맥버니는 아까부터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분이야말로 내 인생의 구원자다.’

외팔이 병신.

자신이 전사로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맥버니는 로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쿵!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남들의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고, 얼굴을 숙인 채로 우렁차게 말했다.

“이 맥버니. 저를 유용하게 사용해 주겠다는 그 말이면 충분합니다.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저를 거두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날.

맥버니는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 * *

로만과 헤어지고.

맥버니는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로만을 따라나설 생각이었다.

“어이, 맥버니.”

“아직도 전장으로 떠나겠다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않은 거야? 제발 포기 좀 하라니까. 네가 왕년에 잘나가던 검사라는 사실은 알지만, 지금은 팔 하나를 잃은 병신에 불과하잖아. 그렇다고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민인 주제에 대체 언제까지고 안쓰럽게 발악하고 있을래?”

“그래. 우리가 진심으로 해 주는 조언이니깐 좀 들어.”

임시 부대의 동료들.

그들은 서부 전선의 출신이었다.

맥버니와 마찬가지로 도태가 되어 버린 그들은, 끝까지 발악하는 맥버니의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새끼. 우리가 뭐라고 좀 했다고 표정 굳는 거 봐라. 너나 우리나, 나름 전성기라 불릴 만한 시절들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 우리의 꼴을 보라고. 수도에서 귀족 애새끼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게 우리 인생의 전부야. 그나마 너는 로만 드미트리를 잘 따라가서 막대한 보상이라도 받았잖아. 그러면 주제를 알고 남은 생을 편하게 살지, 왜 아득바득 여기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

“그러니까. 씨발, 좀 꺼지면 안 되나. 괜히 배 아프게.”

신랄한 욕설이었다.

만약 로만의 제안을 받지 못했다면.

맥버니는 한바탕 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은 지금, 맥버니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나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했었지만, 지금부터는 아니야.’

씰룩.

맥버니가 웃었다.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숙소를 나서며 그들에게 중지를 치켜들었다.

“좆 까, 이 새끼들아.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도 너희와 내 삶이 다르지 않은지 한번 지켜보자고.”

숙소를 나왔다.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제 뒤는 없었다.

맥버니는,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 * *

전쟁.

하나의 사건은 많은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에드윈 헥토르.

맥버니.

그리고, 앨버트 가문의 망나니인 헨리 앨버트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에휴.”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에.

헨리 앨버트는 한숨이 나왔다.

로만을 따라다니면 논공행상에서 제대로 보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카이로 왕실은 드미트리의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헨리 앨버트가 받은 거라고는 돈 몇 푼.

맥버니와 같은 평민들은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보상이겠지만, 헨리 앨버트로서는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로만 님도 너무하시지. 그래도 같이 전장에서 고생한 사이인데, 나도 좀 데려가 주면 안 되나.’

전쟁이 끝나고.

헨리 앨버트는 은근슬쩍 로만을 따라다녔다.

로만에게서 권력의 냄새가 풀풀 풍겼고, 크리스처럼 로만의 최측근으로 남는다면 중앙 정부의 입성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로만은 헨리 앨버트와 같은 부류를 받아 줄 리가 없었고,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냉정하게 버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헨리 앨버트는 초라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출세야. 그냥 날 왕처럼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게 내 주제에 맞는 일이겠지. 암, 그렇고말고. 세상 밖으로 나가니까 로만 드미트리 같은 괴물들만 득실거리잖아. 또 에드윈 헥토르는 어떻고.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야.”

자기합리화에 빠졌다.

양쪽 왕국을 대표하는 두 인물.

로만 드미트리와 에드윈 헥토르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대체 자신은 뭐 하는 존재인가 싶었다.

비슷한 나이대.

그러나 재능은 완전히 달랐다.

헨리 앨버트는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었고, 그들처럼 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앨버트 가문.

그런데.

[카이로의 영웅! 헨리 앨버트 님의 귀환을 축하합니다!]

[앨버트 가문의 자랑스러운 아들! 헨리 앨버트가 무사 귀환하다!]

[앨버트 가문의 미래를 묻거든, 모두 헨리 앨버트를 보게 하라!]

성문 앞에.

이상한 글귀가 적힌 천이 펄럭거렸다.

헨리 앨버트는 멍하니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만 같았다.

* * *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랐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문의 환대를 받던 헨리 앨버트는, 활짝 웃는 얼굴의 베일 자작을 만났다.

“……외삼촌?!”

“내 사랑스러운 조카야!”

베일 자작이 헨리를 와락 안았다.

사실.

베일 자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뺨이라도 시원하게 후려칠 생각이었다.

처음에 남부 전선에 입대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만 믿으라던 베일 자작이,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헨리를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곧바로 도망쳐 버렸다.

산에서 밤을 지새우며 그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헨리는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이 만행을 가문에 알리겠다고 다짐했는데, 베일 자작은 그 마음을 모르는지 헨리의 손을 번쩍 들으며 가문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 자랑스러운 조카의 귀환을 축하해 주십시오!”

“오오!”

“헨리! 헨리!”

다들 열광했다.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사이, 베일 자작은 헨리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헥토르 왕국은 예고도 없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남부 훈련소의 지휘관이었던 저는, 끝까지 남아 적들과 결사의 항전을 벌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헨리가 저에게 지휘관으로서 이 사실을 카이로 왕실에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와 남부 전선에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면서, 저를 전장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베일 자작.

그는 도망자로서 살았다.

당연히 카이로의 패배를 예상한 결단이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카이로가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도망간 것은 아니다.

나름 적들과 싸우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도망쳤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고로 베일 자작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헨리 앨버트와의 영웅적인 스토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 중앙 정부의 연줄이 있는 분들은 그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게릴라 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을 때, 우리 헨리가 로만 드미트리를 대신해서 왕실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는 것을요. 그만큼 헨리는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로만 드미트리가 모든 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헨리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현수막의 존재 이유.

헨리 앨버트는 가문의 영웅이 되었다.

문제는 비단 그게 가문만의 일이 아니라, 주변에 퍼져서 헨리의 명성을 드높였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헨리의 아버지는 헨리를 붙잡고 말했다.

“주변 가문들에서 너와의 정략결혼을 진행하고 싶다는 연락이 빗발치고 있단다. 헨리야, 혹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느냐? 왜 저번에 에이든 가문의 여식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어디 말 좀 해 다오.”

에이든 가문은 중앙 정부의 소속.

속내가 보였다.

그런데 웃긴 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에이든 가문이 정략결혼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이든 가문의 장녀는 그 미모가 대단하기로 주변에서 유명했었지. 그래서 많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그녀와의 결혼을 원했는데, 에이든 가문이 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나와의 정략결혼을 바란다니. 이게 현실이 맞는 건가?’

얼떨떨했다.

현실이 바뀌고 있었다.

헥토르와의 전쟁에서.

핸리 앨버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진 장소에 로만과 같이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위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입니다. 혹시 남부 전선에서 있었던 일을 주제로 강연을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수도에서의 연락.

심장이 뛰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는 똑같은 제안을 드미트리의 사람들에게 했지만,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자 최근에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헨리 앨버트에게 물어보았다.

헨리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평판 하나만을 가지고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내 가치가 더 높아지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널리 알려야 해.’

자신의 유일한 업적.

로만의 옆에 있었다는 것.

헨리 앨버트는 강연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진실은 비참할지 몰라도, 로만의 이름을 빌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뒤는 생각지 않았다.

애초에 똑똑했다면.

헨리 앨버트는 망나니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헨리 앨버트는 로만의 찬양론을 펼치며, 로만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확성기의 역할을 맡았다.

헨리 앨버트.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한 망나니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 * *

며칠 뒤.

로만은 수도를 떠났다.

중앙 정부의 실세들이 배웅을 나왔고, 카이로스의 사람들은 로만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멀어지는 수도.

로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다시 수도로 돌아왔을 때는 반드시 선택해야만 한다.’

카이로의 네 세력.

그들은 더 이상 로만을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때까지. 나는 중앙 정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동북쪽 일대를 완전히 내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중앙 정부의 사람들.

그들은 로만의 속내를 몰랐다.

후일.

로만의 수도행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직은 예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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