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전쟁이 남긴 변화 (1)
헥토르의 별.
사람들은 에드윈 헥토르를 우러러보았다.
그야말로 몰락하는 왕국을 구원해 줄, 하늘이 내려 준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에드윈 헥토르도 자신의 승리를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맞닥트리기 전까지는.
서걱!
푸확.
피가 튀었다.
어둠에서 불쑥 튀어나온 존재는 헥토르의 병사를 단번에 베어 버렸고, 다시 어둠으로 사라져 버렸다.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로만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대열에서 이탈하는 순간 어김없이 어둠의 손길이 그들을 덮쳤고, 하나씩 하나씩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에드윈 헥토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은 부유(浮遊)하듯 공간에 존재했고, 병사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건 악몽임을.
어서 일어나야 하건만, 아무리 발악해도 눈앞의 학살극은 끝나질 않았다.
‘내 계획의 변수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천외의 존재가 있음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남부 전선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었을까?’
아니.
불가능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 버틀러를 상대했을 때보다 대전사 전투를 벌였을 때 한 단계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의 한계는 심연(深淵)처럼 들여다볼 수 없었고, 그렇기에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최고의 재능이라 불렀다.
에드윈 헥토르 또한 자만은 아니더라도 자신감은 있었으나, 단 한 번의 실패가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난 왕국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만약에.
전쟁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헥토르 왕국에는 조금 더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에드윈 헥토르의 정신이 깊은 어둠에 빠질수록, 눈앞에 벌어지는 학살극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정신이 붕괴되었다.
패배의 책임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러던 그때.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에게 죽임을 당한 한 병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번 원정길에 지원한 병사들에게 왕실은 충분한 식량을 보상으로 지급했다. 저 병사는, 노모를 살리겠다고 검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전쟁에 자원했다. 그리고 처절하게 죽고 말았지.’
가슴이 아렸다.
로만의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자신만의 정의를 실천한 것일 테고, 이 아픔은 패자이기 때문에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정신이 들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신이 돌봐야 할 사람들이 있음을 떠올렸다.
‘헥토르 왕국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아직 헥토르가 멸망한 것은 아니다. 나 하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나는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야만 한다.’
화악.
어둠이 밀려났다.
밝은 빛이 눈을 덮쳤다.
이윽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이냐?”
에드윈 헥토르는 눈을 떴다.
* * *
약 일주일.
그동안 헥토르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전쟁의 관련자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카이로로부터 전해져 오는 소식에 헥토르는 절망에 빠졌다.
“버틀러 기사단장님이 카이로의 악마에게 당했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패배였어. 카이로의 악마는 혼자서 수천의 병사를 도륙했고, 그것도 모자라 버틀러 기사단장님을 베어 버리고 후방 진지의 성문을 뚫어 버렸어. 애초에 우리가 이길 수 없었던 싸움인 거야. 우리는 헥토르의 별이 세계 최고의 재능이라 생각했지만, 넓은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어.”
“헥토르 왕국은 끝났어. 전쟁을 위해 전력을 다했는데,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했어.”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 이름이 대륙을 뒤흔들었다.
워낙 충격적인 활약에, 사람들은 카이로 왕국에 정말 대단한 검사가 탄생했다고 떠들어 댔다.
문제는.
그 업적의 희생양이 헥토르 왕국이라는 것이었다.
절망에 빠진 왕국의 상황에, 에드윈 헥토르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수뇌부들을 불러 왕을 찾아갔다.
“몸은 어떠냐.”
“괜찮습니다.”
“미련한 녀석. 나는 너에게 목숨을 걸라 말한 적이 없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너에게 왕실의 짐을 떠안겼으나, 그렇다고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문제를 해결하길 바라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에드윈 헥토르가 고개를 숙였다.
아비의 마음.
따뜻했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인간적인 감정에 시간을 소모할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 잭슨의 보고를 들으셨습니까?”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3일 전. 헥토르의 한 마을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처음으로 흉작이 시작되었던 마을인데, 땅이 메말라서 푸석푸석해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검게 변하고 생명체들이 죽어 간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네크로맨서의 저주인 것 같습니다.”
네크로맨서의 저주.
예민한 문제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잭슨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헥토르에 찾아온 흉작이 신의 저주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네크로맨서의 저주와 동일한 현상이 발생했다면, 어쩌면 그간 헥토르 왕국을 괴롭히던 흉작이 작위적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보통의 흑마법이 아닙니다. 헥토르 전역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저주를 수년간 공을 들였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저주의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그 말인즉, 우리가 카이로 왕국을 공격하길 기다린 세력이 있었다는 의미인 것이냐?”
“예.”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헥토르 왕국을 일부러 벼랑 끝에 내몬 세력은 존재했다.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수많은 자료를 확인한 에드윈 헥토르는,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우리는 누군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카이로 왕국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어둠에 몸을 숨긴 배후의 세력이, 일부러 두 왕국을 싸우게 만들어 이득을 취한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복수를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 헥토르 왕국에 닥친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고, 확실하고 철저하게 배후의 세력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파악했다.
네크로맨서의 저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헥토르 전역에 퍼진 저주라면.
최소 대사제(大司祭)가 나서야 했다.
헥토르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제가 어렸을 때. 천공(天空)의 탑주는 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왕자의 직위를 포기하고 마탑에 몸을 담는다면, 제게 많은 것을 주겠다고요. 저의 시간을 천공의 마탑에 팔겠습니다.”
“……에드윈!”
다들 눈을 부릅떴다.
에드윈의 말은.
왕자의 자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알기에 모두가 말리려고 했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딱 1년이면 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들은 알았다.
어떤 방법이든 해결책이 제시된 순간.
헥토르 왕국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선택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카이로 왕국이 축제를 벌이고 있는 그때, 헥토르 왕국은 자국의 영웅을 떠나보내는 결단을 내렸다.
* * *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남부 훈련소의 교관이었던 맥버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수도에 도착하고서 술집에만 살았다.
“크으.”
탁.
술병을 내려놓았다.
한동안 끊었던 술이다.
남부 훈련소에서는 항상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논공행상(論功行賞) 과정에서 맥버니는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막말로 아껴 쓰면 평생을 먹고 살 정도의 돈이었는데, 그런 물질적인 보상으로는 맥버니를 기쁘게 만들지 못했다.
“다시 전장으로 보내 달라고? 맥버니. 정신 좀 차리자. 그나마 로만 드미트리 덕분에 전쟁 영웅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넌 남부 훈련소를 지키지 못하고 수하들을 모두 잃었어. 외팔이에 불과한 네가 전장에서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보여 주는 결과지. 그런데 누가 너를 믿고 따르겠어? 그러니까 왕실에서 받은 돈으로 남은 세월을 편안하게 보내. 그게, 너에게 어울리는 말로야.”
상급 지휘관의 말.
잔인한 현실이었다.
그도 자신의 한계를 모르지 않았지만,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정신은 더욱더 선명해졌다.
‘나는 전장에서 죽어야만 한다.’
전장에서 보낸 십 년의 삶.
그에게는 그간 많은 동료가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처절하게 살아남았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맥버니를 베테랑 전사라고 불렀다.
평민의 신분으로 백인장의 자리까지 올라간 능력자.
하지만 그의 정신은 온전치 못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닳아 버린 정신력은, 이제 일상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언제고.
동료들을 따라 전장에서 죽고 싶었다.
그것이 맥버니가 바라는 자신의 최후이건만, 전장으로 보내 주지 않는 상부의 명령에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했다.
‘그래, 외팔이 검사가 뭘 할 수 있겠어.’
최근.
로만의 소문을 들었다.
남부 전선에서의 공으로 카이로의 영웅이라 불리기 시작한 그는, 카스트로 가문과의 마찰에서도 압도적인 행보를 보였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병사들과 같이 훈련을 받으려는 태도부터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까지 올라갔다.
문득.
그의 수하들이 부러웠다.
로만과 같은 사람을 주군으로 모시고, 맹목적인 신뢰를 보이는 것은 맥버니가 바라던 삶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 밑에는 이미 능력자들이 즐비해. 그분에게는 나와 같이 전투 능력을 잃어버린 외팔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맥버니, 이게 현실이야. 너는 이미 전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버렸고, 남부 훈련소에서와 같은 결과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
목이 탔다.
술을 다시 들이켜려 했다.
그런데 그때.
탁.
“오랜만이군.”
바로 옆에 착석하는 남자.
그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맥버니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 * *
심장이 뛰었다.
로만 드미트리.
자신의 우상.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그때, 로만이 본론을 말했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뛰어난 인재들이 필요하다. 맥버니. 나는 네가 내 계획에 부합하는 그런 인재라고 생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나를 따라 드미트리로 갈 생각이 없나?”
순간.
쿵쾅쿵쾅.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자신이 꿈에서 그리던 상황이었고, 거절할 이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알다시피 저는 외팔이 검사입니다. 검을 휘두르던 팔을 잃어버린 그때부터, 검사로서의 제 가치는 전무합니다. 이런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카이로 왕국에서도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저 따위가, 로만 드미트리 님의 발목을 붙잡을까 걱정이 됩니다.”
거절하기 싫었다.
마음은 로만의 제안을 백번이고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거절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 도착하고.
아주 잠깐 소속된 부대의 사람들은, 외팔이 주제에 대체 뭘 하겠냐고 빨리 전역하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운 좋게 살았을 뿐, 자신이 해낸 일은 없었다.
“내 귀에는 왠지 거절의 의미로 들리지 않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
맥버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로운 세상.
로만이 인재를 받아들이는 기준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가치였다.
로만이 말했다.
“혹시 좌수검(左手劍)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나?”
백중혁의 기억 저편에.
로만은,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던 한 무림 고수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