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 (2)
드미트리가 난리가 난 그때.
로렌 드미트리는 당혹스러운 순간을 맞이했다.
확!
눈앞에.
윌리엄이 내동댕이쳐졌다.
항상 남들을 깔보던 그가, 초라한 행색으로 자신을 내던진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과해.”
로만이었다.
윌리엄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살면서 이런 굴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다들 가문의 이름을 들으면 비위를 맞추기 바빴고,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자신이 나쁘게 행동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윌리엄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지만, 먼발치에 있는 카스트로 백작은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끝난 싸움이었다.
이미 고개를 숙였는데, 뒤늦게 아들을 도와주겠다고 판을 엎을 수는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말해. 네가 진심으로 사과할 수 없다면, 나는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받아 낼 테니까.”
“윌리엄! 어서!”
로만의 재촉에.
카스트로 백작이 호통을 내질렀다.
윌리엄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로렌 드미트리 앞에 무릎을 꿇더니,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로렌, 지금까지 괴롭힌 것 정말 미안해. 넌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괜한 심술로 너를 괴롭혔던 것 같아. 제발, 제발 내 사과를 받아 줘. 네가 한 번만 용서해 주겠다고 말한다면, 아카데미도 자퇴하고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땅에 고개를 박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지금,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먼발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중에는 로렌에게 로만의 위험을 알린 학생도 있었는데, 상황이 이리 진행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정작 로렌 드미트리 본인은.
눈앞의 상황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히 로만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했던 것인데, 대체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설마 형 때문에 내게 사과하는 건가?’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윌리엄의 목덜미를 붙잡고 나타났다.
가문의 장남이 개처럼 끌려다니는데도, 카스트로 백작은 침울한 얼굴로 따라올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수도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
로만이 위험하다는 동급생의 말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카스트로 가문을 압도하고 자신 앞에 윌리엄을 대령했다.
그제야.
로렌은 자신이 기억하는 형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았다.
카스트로 백작조차도 로만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할 정도로, 로만의 언행에는 강한 힘이 생겼다.
마음이 놓였기 때문일까.
‘……형.’
괜히 울컥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위해 혼자 카스트로 가문을 찾아갔다.
분명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위험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카스트로 백작이 말했다.
“내 아들을 대신해서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내 약속하는데,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카이로 아카데미에 자퇴서를 제출할 것이니 만날 일도 없겠지. 정말 미안하다.”
그간의 악연(惡緣).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차차.’
로렌 드미트리는, 뒤늦게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 * *
로렌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로만과 둘만 남은 로렌 드미트리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한번 정리하고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로렌.”
“……예?”
선수를 빼앗겼다.
로만은, 로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일은 너 하나를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다. 카스트로 가문은 드미트리를 모욕했고, 나는 드미트리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대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드미트리의 성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네가 어디서 무시를 받고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면,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그것밖에 되지 않는 가문이기에 그런다고 생각할 것이다.”
“죄송해요.”
로렌이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로만의 말이 옳았다.
같은 드미트리의 성을 타고났는데, 로만과 로드웰은 수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지 않은가.
자신만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생각에, 로만에게 하려던 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개 들어.”
따뜻하진 않았다.
차가운 음성이었지만, 로렌은 고개를 들어 로만을 보았다.
“네 이름은 로렌 드미트리다. 나는 내 동생이 어디 가서 오늘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니 네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철저하게 공부해라. 카스트로 가문은 중앙 정부의 소속이나, 그들도 드미트리의 저력을 알았다면 너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남들은 네 힘을 알아주지 않는다. 본인의 힘을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능력이고,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너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차갑게 내뱉은 말.
그런데 로만을 올려다보는 로렌의 눈동자에는 감동이 가득했다.
동생이란다.
내 동생이라는 표현에 꽂힌 로렌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해 준 말들 꼭 기억할게요. 다음에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게요.”
앳된 모습에.
로만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형제와의 우애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생은 다르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만큼, 로만 드미트리는 전생과 같은 끔찍한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덧없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은 하고 싶지 않다.’
시선을 돌렸다.
먼저 걸었다.
로렌은 다급히 로만을 따라가다가, 번뜩 아버지의 일이 떠올랐다.
“형! 지금 당장 가문에 연락해야 해요!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아빠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요!”
그때까지도.
그 무슨 일이 설마,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일 줄은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 * *
카스트로 백작.
그가 저택으로 복귀했다.
휘황찬란한 장식품들이 눈을 반겼지만, 오늘은 그것들이 전혀 권력의 상징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짜악!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들의 뺨을 날렸다.
윌리엄이 바닥이 나가떨어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부여잡고, 윌리엄은 충격받은 얼굴로 카스트로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라! 이딴 새끼를 내 핏줄이라고 그동안 거두어 주었다니. 넌 오늘 네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아느냐? 로만 드미트리는 새롭게 떠오르는 신성이다. 베네딕트 후작님은 물론이고 카이로 왕국의 실세들이 그를 영입하려고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너는 그런 사람의 동생을 해코지한 것이다.”
이번 일.
파비우스 백작이 목격했다.
아카데미 학생들까지 보았으니, 입을 틀어막으려고 해도 소문은 곧 카이로 전력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말하겠지. 카스트로 가문은 드미트리를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하는 병신들이라고. 카스트로의 장남인 네가 무릎을 꿇은 그 순간부터, 우리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졌다.”
복구할 방법은 없다.
윌리엄이 선을 넘은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앞으로 귀족 사회에서 추락할 평판을 생각하니, 카스트로 백작은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베네딕트 후작.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이었다.
파비우스 백작의 말처럼 로만 드미트리를 정말 사위로 들이려는 속셈이었다면, 그간의 관계가 단번에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베네딕트 후작이란 그런 사람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순간, 카스트로 가문도 중앙 정부에서 뒤로 밀려날 수 있었다.
일단은.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하인을 시켜 눈앞에서 아들을 치우라고 말한 뒤에, 카스트로 백작은 소파에 앉아 와인을 깠다.
향긋한 냄새.
막 한 입을 마시려는 순간.
“백작님! 드미트리 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드미트리에서?”
그 말에.
카스트로 백작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 * *
로만과 카스트로.
이미 끝난 문제였다.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로메로 남작은, 뒷북을 거하게 쳤다.
[카스트로 백작. 당신이 내 아들을 건드렸다는 말을 들었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우리가 만만하게 보이겠지만, 감히 드미트리 가문의 핏줄을 건드린 너희들의 만행을 우리는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화면 너머.
로메로 남작의 화난 얼굴이 보였다.
카스트로 백작은 머리가 아팠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충격이 상당한데, 로메로 남작은 왜 다 끝난 문제로 시비를 건단 말인가.
[내일 아침. 우리는 날이 밝는 대로 중앙 정부에 정식으로 영지전을 신청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드미트리 상단은 카스트로와 관련된 모든 공급을 중단할 것이며, 골든 뱅크에 남아 있는 너희들의 사채를 비싸게 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 확보할 생각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곧 원금 상환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금전적으로 상당한 압박이 되겠지.]
말에 막힘이 없었다.
상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할 말을 모두 쏟아 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카스트로 가문과 적대적인 세력들과 모두 연락을 취할 것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자금을 대줄 테니, 너희들의 세력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할 것이다. 카스트로! 너희들이 카이로의 명문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드미트리가 이번 선택으로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이 몰락하는 꼴을 반드시 지켜볼 것이다.]
로메로 남작의 협박.
매우 위협적이었다.
만약 그가 말한 사실이 현실로 된다면, 카스트로 가문은 정말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현기증이 일었다.
만약 사채가 돌아오고, 적대세력들이 득세한다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숨을 막히게 했다.
드미트리 가문을 상대로 영지전에서 우위를 점할지 몰라도, 재정적으로 압박을 해 온다면 로메로 남작의 말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애초에 영지전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
일반적인 귀족 가문이 사병을 이백 명 이상 보유하지 않는 것에 반해, 드미트리의 군사력은 변방의 수준을 넘었다.
그리고.
벤자민 용병단과 같은 용병들까지 합세한다면, 그들은 천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단순히 베네딕트 후작의 마음을 걱정했는데, 생각할수록 드미트리의 저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제아무리 수도의 실세라 할지라도 나락으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비를 꼭 빼닮았구나.’
불같은 성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로메로 남작을 설득하기 위해, 뭐라 말해야 할지 감히 잡히질 않았다.
그때였다.
[당장 붙잡고 있는 내 아들을 풀어 줘라. 마지막 경고다.]
순간.
카스트로 백작은 이상함을 느꼈다.
아들을 붙잡고 있다니.
혹시 상대가 착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카스트로 백작이 다급하게 말했다.
“드미트리 남작님! 지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저희는 드미트리 가문의 사람을 붙잡고 있지 않습니다. 제 아들이 로렌 드미트리에게 잘못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충분히 반성하고 있고, 직접 찾아가 제 아들이 무릎을 꿇고 사죄도 했습니다. 이미 다 끝난 문제인데 갑자기 영지전이라니요.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실을 밝혔다.
그러자.
화면 너머, 로메로 남작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던 분노가 단번에 식어 버렸다.
전쟁 준비를 모두 끝낸 로메로 남작으로서는.
로만이 카스트로를 상대로 이미 사과까지 받아 냈다는 현실을, 차마 단번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