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615)

122화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6)

파비우스 백작.

그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었다.

‘카이로스의 너구리.’

실없는 얼굴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잇속을 확실하게 챙기는 행보에 붙은 별명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부정적인 의미로 파비우스 백작을 너구리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정작 별명의 주인은, 자신에 대한 평판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카이로의 귀족들은 모두 수도로 진출하길 바라지. 그중에는 출중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지만, 막상 살아남는 건 나와 같은 부류야. 시국(時局)을 읽을 줄 아는 눈. 내 잇속을 확실하게 챙겨 주는 사람들과 거래를 함으로써, 나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성공할 수가 있어.’

파비우스 가문.

그리 대단한 가문이 아니다.

그런데도 중앙 정부에 진출했고, 베네딕트 후작의 곁에 남은 것은 항상 적절한 위치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흐름을 읽었다.

남들은 로만 드미트리에만 집착할 때, 그는 로만의 수하들이 키포인트가 되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비록 생각보다 맹목적인 충성심에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노림수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파비우스 백작님.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셨으니까 하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카스트로 백작이 도움을 구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아직 말을 전부 끝내지 않았는데도, 파비우스 백작은 머릿속에서 두 존재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카스트로 백작. 모두가 인정하는 카이로의 명문 가문 출신으로, 베네딕트 후작님과는 어린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어. 그래서 나는 중앙 정부에 입성하자마자 카스트로 백작과의 인연을 만들려고 참 많은 노력을 했었지. 문제는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거야. 웬만해서는 카스트로 백작의 편을 드는 게 맞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베네딕트 후작님이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카이로의 영웅. 괜히 건드렸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복잡한 문제다.

그렇다면.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베네딕트 후작님이 누구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베네딕트 후작님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적군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분이야. 헥토르를 상대로 남부 전선을 버린 판단도 그렇고, 애초에 적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언제든 절친한 친구도 버릴 수 있다는 의미지. 예외가 있다면 혈연관계 정도. 그런데 베네딕트 후작님은 최근에 로만 드미트리를 자신의 사위로 받아들이려는 의도를 보였고, 그건 카스트로 백작을 외면할 수도 있다는 의미야.’

대놓고 버리진 않을 것이다.

그간의 관계를 생각해서 방관을 택한다면.

파비우스 백작으로서는 두 번째 포인트가 매우 중요했다.

‘베네딕트 후작님의 방관으로 카스트로 가문과 드미트리 가문이 붙는다면. 과연 그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까? 이건 매우 간단한 문제가 되겠지. 카스트로가 카이로의 명문으로서 인정을 받는다지만,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준 로만 드미트리에 비할 바는 아니야.’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싸우는 상상을 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상대로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로.

카스트로 백작을 외면했다.

시선을 피하고,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했다.

“제가 상황을 지켜보니까 이건 명백히 윌리엄이 잘못한 일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파비우스 백작은 자신의 경험을 믿었다.

* * *

예상과는 다른 전개.

카스트로 백작이 당황스럽다는 기색을 보였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리라고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기에, 대놓고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파, 파비우스 백작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파비우스 백작의 별명.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이라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지만, 오히려 그런 성향 때문에 파비우스 백작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자신은 이득이 되는 인물이라는 의미이지 않은가.

자신의 가치를 높여 주는 파비우스 백작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세간의 소문은 무시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가.

자신을 외면했다.

방금까지 분노로 들끓던 머리가,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이로의 너구리가 계산을 끝낸 게 분명하다. 파비우스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빌어먹을. 로만 드미트리가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의미인가?’

입이 바짝 말랐다.

남부 원정.

실속이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파비우스 백작은 자진해서 남부로 떠났다.

그 결과가 어땠는가?

베네딕트 후작은 최선을 다한 파비우스 백작의 모습에 흡족해했고, 고된 시간을 보낸 만큼 중앙 정부에서의 입지도 한 단계 발전했다.

사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수도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남부로 내려갈 용기가 없었고, 파비우스 백작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었다.

‘확실하다. 드미트리 가문과 전쟁을 벌인다면, 우리는 나락으로 빠질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았다.

드미트리 가문.

변방의 출신이기는 하나, 그들의 재력(財力)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사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그들에게 부족한 건 크게 없었다.

벤자민 용병단이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로만 드미트리가 있기에 대전사 전투에서도 카스트로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약점은 단 하나.

태생이 천하다는 것이다.

중앙 정부의 권력이라면 드미트리를 찍어누르리라 생각했건만, 파비우스 백작이 그를 외면했다.

미래가 보였다.

파비우스 백작의 계산처럼 베네딕트 후작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카스트로는 드미트리 가문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

승리한다고 해서 이득을 볼 게 없는 싸움이다.

아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자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기에는, 패배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나도 컸다.

게다가.

로만의 소문 중에는 잔인한 면모도 언급되었다.

바르코를 멸문시키고 헥토르를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로만은 적에게 자비 없는 손속을 보였다.

‘자존심 때문에 파국(破局)으로 치달을 수는 없다.’

분노를 삼켰다.

카스트로 백작은, 억지로 얼굴을 피며 말했다.

“……파비우스 백작님의 말을 들으니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아들의 일이다 보니 잠깐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파비우스 백작님. 제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태도가 돌변했다.

귀족들의 성향이다.

상황에 따라 동전을 뒤집듯 순식간에 태세를 변환하는 것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비결이었다.

“아버지!”

윌리엄 카스트로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상황.

카스트로 백작은 악귀 같은 표정으로 그의 불만을 억누르더니, 아들의 머리를 강제로 숙이게 만들며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이번 일은 제 아들이 명백히 잘못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동생분에게 그에 합당한 사과를 구하고,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는 자퇴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아비의 마음을 한 번만 이해해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는 카스트로 백작.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던 상황이, 한쪽의 백기로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 * *

이번 사건.

로만은 일부러 선을 넘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항상 본인들이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한다. 내 가치가 치솟아 오르고 있는 지금, 어쭙잖은 시기와 질투에 가문과 내가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한 번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줄 필요가 있겠지. 그 상대로 카스트로 백작은 나쁘지 않다.’

위치가 변했다.

로만은 자기객관화가 빨랐다.

자신의 명성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상대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확신도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자신은 균형의 추다.

어느 한 곳으로 이동하면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질 것이 뻔했기에, 베네딕트 후작은 카스트로 백작의 편을 들어주는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선을 넘어 버렸다.

하지만 만약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았다 하더라도, 로만은 카스트로 가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나의 목표.

수많은 갈래.

로만은 가볍게 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다.

가끔은 과격할 정도의 행보를 보일지라도, 그 행동에는 반드시 그만한 계획이 밑바탕 되어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직접 사과하고 자퇴를 하는 선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넓은 아량,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 순간.

윌리엄 카스트로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세상이 무너졌다.

환한 얼굴로 감사함을 표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윌리엄 카스트로는 순간 로만과 눈이 마주쳤다.

‘난 끝났어.’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어떤 인물을 건드렸는지를.

로만 드미트리야말로, 진짜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 * *

그 시각.

로렌 드미트리는 아직 아카데미에 있었다.

교수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기도 했고, 로만을 만나 대답을 듣고도 싶었다.

‘형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로만은 자격을 언급했다.

궁금했다.

자신이 그만한 자격을 보여 주었는지.

윌리엄 카스트로를 상대로 일방적인 패배를 맛보긴 했으나, 그래도 평소와는 달랐다는 사실을 본인이 더 잘 알았다.

맞은 부위에서는 계속 쓰라린 고통이 밀려왔다.

예전 같았다면 그 고통에 한없이 우울해졌을 텐데, 지금은 고통마저도 즐거운지 자꾸만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로렌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로렌! 큰일 났어!”

표정이 굳었다.

상대는 아카데미 동급생이었다.

문제는 평소 친했던 관계가 아니라, 윌리엄 카스트로와 같이 자신을 괴롭히던 패거리 중 한 명이었다.

로렌은 사나운 어투로 말했다.

“무슨 큰일? 네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주지?”

이판사판이었다.

또 괴롭힘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로렌은 상대를 들이받을 생각이었다.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도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동급생의 목적은 그와 전혀 달랐다.

“에이씨. 지금은 그렇게 공격적으로 반응할 때가 아니야. 네 형. 로만 드미트리가 윌리엄 카스트로와 시비가 붙었어. 그것 때문에 카스트로 가문에 끌려갔고, 이대로 두었다간 네 형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뭐라고?!”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신이 애타게 찾던 로만 드미트리가, 뜬금없이 윌리엄과 시비가 붙어서 카스트로 가문에 끌려갔다니.

동급생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은 윌리엄이 너에게 한 방 먹은 게 분해서, 네 팔을 부러트려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어. 그걸 하필이면 네 형이 들어 버렸고, 윌리엄의 얼굴을 틀어쥐면서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같이 카스트로 가문으로 향했어. 이번에는 진짜 위험할지도 몰라. 너도 알잖아. 윌리엄의 성격이 아빠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거. 카스트로 백작은 네 형을 해치고도 남을 사람이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형.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험담을 참지 못하고 나섰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니.

‘……형.’

눈물이 팽 돌았다.

단 한 번도.

로렌은 형들의 도움을 받아 보지 못했다.

친구들은 형이 있으면 든든하지 않냐고 물어보지만, 두 형 모두 제 살길이 바빠서 로렌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형이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로렌은,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형이 나 때문에 다치기라도 한다면. 난 절대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거야.’

“말해 줘서 고마워!”

곧바로 뛰어갔다.

수도에서의 시간.

힘들고 외로웠다.

아버지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항상 진실을 숨겼지만, 지금만큼은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빠르게 숙소에 도착한 로렌 드미트리는, 서러움과 걱정을 모두 토로하는 음성으로 통신기에 말했다.

“흐윽, 흐윽. 아빠. 형이 위험하대. 형이 날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카스트로 가문에 끌려간 것 같아!”

그 말에.

통신기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발칵 뒤집혔다.

아직 상황이 종결된 줄도 모르는 그들로서는, 로렌이 전한 소식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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