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5)
한가한 오후였다.
카스트로 백작은, 햇볕이 드는 테라스에서 한 인물과 차를 마셨다.
“그래서 전부 실패하신 겁니까?”
“말도 마십시오. 금은보화에 귀족의 작위를 준다고 했는데도, 단 한 명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습니다.”
맞은편 상대.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어제부터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던 그는, 아무런 소득도 없는 상황에 하소연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내가 로만 드미트리를 바로 배신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중에 귀족파에 들어올 게 분명하니까 먼저 점수 좀 따라는 건데 그걸 단칼에 거절하다니. 이래서 평민 출신들을 상대하기가 싫습니다. 귀족들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만 보고도 계산이 딱딱 떨어지는데, 이 녀석들은 출세의 길이 열려도 받아먹질 못하지 않습니까?”
“백작님이 참으십시오. 원래 태생이 천하면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두 백작.
같은 귀족파 소속으로서 인연을 맺었다.
서로 성향이 비슷하다 보니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이렇게 따로 만나는 날이 제법 잦았다.
카스트로 백작이 말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간의 행보를 보면 예사 인물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그의 수하들을 영입하겠다고 백작님이 이 난리를 피우는 게 살짝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대단하냐고요? 그냥 말이 필요 없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
사람들은 항상 그렇듯, 전장의 소문은 다소 과장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파비우스 백작을 비롯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소문이 과소평가되었다고 단언했다.
“이번 전쟁. 사실상 카이로가 백기를 내걸어도 이상하지 않은 싸움이었습니다. 헥토르는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후방 진지를 함락시켰고, 워프 게이트를 점령당한 탓에 우리가 승리할 방법은 전무했습니다. 그걸 뒤집은 게 바로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홀로 적진으로 가서 버틀러를 쓰러트리고 성문을 여는데…… 크으, 그건 정말 직접 보지 않고서는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혁혁한 공을 세웠던 존재가 바로 그의 수하들입니다.”
“그 정도란 말입니까?”
“예. 베네딕트 후작님이 괜히 로만 드미트리의 영입에 사활을 걸겠습니까? 제가 특별히 카스트로 백작님이니까 해 드리는 말인데,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를 사위로 들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허어.”
감탄했다.
베네딕트 후작.
딸을 보물처럼 여기는 사람인데, 그가 정략결혼을 생각할 정도라면 로만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차를 마셨다.
달콤한 맛에, 카스트로 백작은 웃음을 보였다.
“언제 한번 로만 드미트리를 직접 만나 봐야겠습니다. 후일 중앙 정부의 실세가 될 인물이라면, 미리 점수를 따도 나쁠 것은 없겠지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자리 한번 마련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귀족의 세계에서는 친목 도모가 중요하다.
이렇게 사소하게 주고받는 대화가, 나중에는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그때였다.
멀리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스트로 백작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경비병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그를 밀치며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버지!”
그는 바로.
윌리엄 카스트로였다.
* * *
처음에는 사태 파악이 되질 않았다.
잔뜩 화가 난 아들의 모습.
그리고 뒤이어 따라 들어온 사내는, 단번에 파티장에서 만났었던 로만 드미트리임을 알 수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여길 왜?’
의문 어린 시선으로 아들을 보았다.
그러자.
윌리엄 카스트로가, 분노로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로만 드미트리 저 작자가 저에게 무슨 짓을 한 줄 아십니까? 제 얼굴을 틀어쥐더니, 절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제 얼굴에 손자국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저 빌어먹을 새끼가 제 턱을 부시려고 했단 말입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로만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아들의 말을 들으며, 카스트로 백작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조금 전.
파비우스 백작을 통해 로만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들었다.
그가 변방의 출신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환심을 사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뿐인 아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폭탄을 터트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평소라면 아들을 건드린 작자를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면 얘기가 달랐다.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를…….”
“닥쳐라!”
말을 끊어 버렸다.
윌리엄 카스트로는 화들짝 놀라며 아버지를 보았다.
자신에게 화 한번 내지 않았던 분인데,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 줄 줄은 몰랐다.
“……아버지.”
“윌리엄. 네가 지금 누구를 건드린 줄 아느냐? 로만 드미트리 님은 카이로를 구한 영웅이시다. 그분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어디서 그런 망발을 내뱉는단 말이냐! 당장 사과하거라. 이 아버지 손에 턱이 박살 나기 싫으면, 어서 사과하란 말이다!”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윌리엄 카스트로는 넋을 잃었다.
입을 벌린 채로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모습에, 카스트로 백작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콰당!
로만의 앞에 내던졌다.
과도한 액션이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아들을 내동댕이친 그는, 로만을 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못난 아들이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제가 강하게 엄벌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푸시지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와 같이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사과를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로만과 인연을 맺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라는 생각에, 카스트로 백작은 가식적인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로만은 상대의 호의를, 싸늘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내가 사과를 받고 말고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정할 문제입니다.”
* * *
정적이 맴돌았다.
카스트로 백작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파비우스 백작은 먼발치에서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았다.
카스트로 백작의 사과.
당연히 받아 주리라 생각했다.
중앙 정부의 귀족이 먼저 고개를 숙였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공격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문제는 윌리엄 카스트로, 당신의 아들이 저지른 실수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윌리엄은 평소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제 동생을 괴롭혔습니다. 만약 적당한 선의 괴롭힘이었다면, 저는 애들 문제에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보는 앞에서 로렌 드미트리의 팔을 부러트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들의 팔을 부러트리겠다는 녀석이 있는데,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겠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설마.
로만 드미트리의 동생을 건드렸을 줄은 몰랐다.
선뜻 떠오르지 않는 대답에, 카스트로 백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말은 내뱉은 그 순간 힘을 발휘합니다. 윌리엄은 그 행동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고, 저는 제가 목격한 상황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렇다고 내 아들의 팔을 부러트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시지요.”
카스트로 백작은 살짝 화가 난 기색을 보였다.
아들의 실수?
인정했다.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면, 당연히 사과할 의향이 있었다.
다만.
중앙 정부 소속의 귀족을 상대로 과하게 몰아붙이는 태도에, 카스트로 백작은 어느 순간부터 심기가 불편해졌다.
자기가 먼저 미안하다고 수차례 말하지 않았던가.
이쯤 말했으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한발 물러나야 정상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마치 끝을 보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가 말했다.
“어디 말해 보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합니까?”
로만이 웃었다.
아들은 부모를 닮는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윌리엄 카스트로의 인격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윌리엄이 내 동생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합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낱낱이 고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길로 왕실 아카데미를 자퇴하면 됩니다. 윌리엄과 같은 쓰레기가, 내 동생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건.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
카스트로 백작의 분노가 폭발하려는 순간, 로만은 선을 한 번 더 넘어 버렸다.
“그게 싫다면 저는 전쟁도 불사할 생각입니다. 제 가문과 전쟁을 벌이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대전사 전투를 신청하든가. 선택은 카스트로 백작, 당신의 몫입니다.”
* * *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었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과하게 몰아친 탓에, 카스트로 백작은 자신이 들은 게 현실인지를 의심했다.
‘지금 카스트로와 전쟁을 하자고?’
카스트로 가문.
중앙 정부 소속이다.
수도에서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닐 정도로 힘을 갖춘 가문이기에, 살면서 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것도 상대는 드미트리 가문이지 않은가.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가 전쟁 영웅으로 불린다지만, 변방의 가문이 카스트로를 얕본다는 게 너무나도 황당했다.
카스트로 백작이 말했다.
“이래서 태생이 천한 새끼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니까. 로만 드미트리. 네가 베네딕트 후작님의 관심을 받으니까 뭐라도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지? 천만에! 너는 겨우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일 뿐이야. 네가 아무리 버틀러를 쓰러트린 랭커의 검사라 할지라도, 가문과 가문의 대결에서는 카스트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중앙 정부의 소속이라는 건 그만한 힘을 의미하지.”
태도가 변했다.
상대는 선을 완전히 넘었다.
아무리 호의적인 관계를 맺을 생각이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참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귀족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그리고.
베네딕트 후작도, 로만보다는 오랜 인연을 맺은 자신의 편이라 믿었다.
“파비우스 백작님.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셨으니까 하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로만 드미트리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면. 베네딕트 후작님에게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가 선을 넘었고, 그래서 제가 적절한 처벌을 가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귀족의 세계에서는 명분이 필요하다.
상대는 베네딕트 후작이 관심을 보이는 인물.
상대를 짓밟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나, 그 이후에 벌어질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파비우스 백작이라면.
증인으로 적절했다.
발언에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밀한 관계이지 않은가.
그런데.
“크흐음.”
파비우스 백작이 시선을 돌렸다.
헛기침을 몇 번 내뱉더니, 곤란하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상황을 지켜보니까 이건 명백히 윌리엄이 잘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증인을 해 달라니요. 카스트로 백작님도 그러는 거 아닙니다. 아들이 잘못했으면 치부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벌을 받게 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닙니까?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견을 지지합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스트로 백작은, 당황한 얼굴로 파비우스 백작을 보았다.
시선을 피하는 상대.
‘이게 무슨.’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