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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615)

120화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4)

간발의 차이였다.

로렌은 기습적으로 턱을 공략했지만, 윌리엄 카스트로가 짐승 같은 반응 속도로 검을 회수해서 막았다.

확실히 탈 D클래스라고 평가받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순간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윌리엄 카스트로는, 분노한 얼굴로 로렌의 검을 쳐 냈다.

“이 새끼가!”

굴욕이었다.

겨우 로렌 따위에게 당할 뻔했다니.

분노에 찬 그가 반격을 시도하려는 그때, 강한 충격이 복부를 때렸다.

퍽!

“커억.”

회심의 일격.

막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윌리엄 카스트로는 188cm의 장신이고, 로렌은 그보다 무려 20cm나 작았다.

그래서 공격이 막히자마자 복부를 공격했다.

검술 대련은 손발의 활용도 가능하다. 복부를 강타하는 주먹에 윌리엄 카스트로는 신음을 삼켰고, 로렌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연계 공격으로 상대를 밀어붙였다.

탁!

티타탕!

‘이 기세를 살려야 한다.’

평소와는 달랐다.

소심한 성격 탓에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로렌이, 이번만큼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로만이 말한 자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검술 시험에서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면, 로만 드미트리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한때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존재의 변화는, 로렌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훅!

타탁.

깔끔한 연계 공격이었다.

머리를 노리는 척 페이크를 주고는, 한 발 앞으로 파고들며 가슴을 베어 버리는 일격. 복부의 통증으로 호흡을 빼앗긴 윌리엄 카스트로는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냈다.

예상과는 다른 양상에 그의 친구들은 불안한 기색을 보였고, 이대로라면 정말 로렌이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로렌 또한.

승리를 기대했다.

로만을 만나 용기를 얻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자신과 악연인 윌리엄 카스트로를 밀어붙였다.

운명과도 같았다.

로렌은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을 시도했다.

“이 새끼가 진짜.”

확.

공격이 빗나갔다.

팔이 짧았기 때문이 아니다.

윌리엄 카스트로가 신기할 정도로 유연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빠악!

파파파팍!

숨이 턱 막혔다.

폭발하듯 작렬하는 공격.

목검이 부딪칠 때마다 이리저리 휘둘렸고, 반격을 시도하기에는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로렌은 몰랐다.

그동안 윌리엄 카스트로는 그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항상 농락하듯 상대해 주던 그가 진심으로 대결에 임하는 순간, 로렌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검술 대결은 단순히 검만 잘 휘두른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압도적인 피지컬 차이에, 로렌은 정신없이 공격을 막아 내기만 하다가 결국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휘청.

끝났다.

순간 드러난 틈.

윌리엄 카스트로는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공격을 시도했고, 그것이 로렌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퍼억!

* * *

눈을 떴을 때.

주변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얼얼하고 팔뚝이 너무 아팠다.

“간발의 차이였어. 윌리엄의 공격이 네 머리에 작렬하려는 순간, 빠르게 팔을 들어서 공격을 막았어. 만약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면, 아무리 목검이었다 할지라도 넌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

검술 교수였다.

시험을 주관하던 그는, 학생들을 모두 보내고도 훈련장에 남았다.

“……그럼 제가 진 건가요?”

“당연하지. 설마 윌리엄을 상대로 이길 줄 알았어?”

패배.

로렌이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보란 듯이 자신을 증명해 보고 싶었는데,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교수가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제법 좋았다.”

로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술 교수.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다.

자신과 윌리엄 카스트로의 대진을 붙이는 것을 보고, 솔직히 악감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칭찬이라니.

놀라서 눈만 껌뻑이자,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켜본 로렌 드미트리는 재능이 그리 나쁘지 않았어. 충분히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데, 항상 겁을 먹고 움츠리는 바람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지. 그래서 일부러 윌리엄 카스트로와 대진을 붙였어. 지난 대련에서도, 그리고 오늘 시험에서도. 윌리엄이 평소에 널 괴롭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걸 이겨 내야 검사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내가 설마 학생에게 거짓을 말하겠어? 넌 너를 조금 더 믿을 필요가 있어. 네 나이에는 단순히 키가 크고 힘이 센 애들이 세상에서 제일 강해 보이겠지만, 사실 너나 윌리엄이나 크게 다를 것 없거든. 둘 다 오라를 사용할 줄 모르잖아. 애초에 너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재능이었다면, D클래스에서 전전할 게 아니라 네 형처럼 S클래스로 올라갔겠지. 그러니까 제발 지레 겁 좀 먹지 마. 원래 검술이라는 것은 정신에서 패배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거든.”

의외였다.

로렌은 검술 교수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몰랐다.

아직도 고통은 심했다.

웃다가도 자꾸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교수의 말을 되새길수록 실없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문득.

로만이 보고 싶었다.

형은 자신의 대결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 * *

쾅!

“이런 씨발!”

윌리엄이 휴게실의 의자를 걷어찼다.

그것만으로는 분노가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는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진정해!”

“윌리엄, 제발 침착해!”

친구들이 말렸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붙잡지는 않았다.

윌리엄은 눈이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이었고, 그건 그동안 친구라고 불리는 이들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예전에 한 친구가 주제넘었다는 이유로 심한 구타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주변에서 애매하게 말리는 사이, 윌리엄은 휴게실을 정말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로렌 드미트리. 이 새끼가 감히 날 무시해?”

복부의 충격?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때만 아팠을 뿐이지, 지금은 멀쩡했다.

문제는 자신이 조금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로렌 드미트리가 마치 승자처럼 굴었다는 것이었다.

“로렌, 이 새끼는 주제를 몰라. 내가 그동안 봐준 줄도 모르고, 기세를 조금 잡았다고 그따위 눈으로 날 쳐다보다니. 씨발,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설마 내가 로렌 드미트리 따위에게 진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당연히 널 믿었지.”

친구들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들도 같은 수도 출신이다.

하지만 카스트로 가문은 한 단계 위의 가문이었고, 그렇기에 윌리엄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윌리엄의 눈빛이 변했다.

그건 살의(殺意)였다.

그의 아버지는, 살면서 태생이 천한 녀석들에게는 절대 얕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겠어. 로렌, 그 녀석의 팔이라도 하나 부러트려야겠어.”

“그,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래. 그건 좀 아니야. 너 로렌 드미트리의 형이 누군지 몰라? 최근에 헥토르 왕국을 물리치고 카이로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로만 드미트리잖아. 만약 일이 잘못되면, 가문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어.”

이제는.

로드웰이 아니라, 로만이 드미트리 가문을 대표했다.

친구들의 말이 옳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이는, 드미트리 가문을 우습게 보았다.

“카이로의 영웅? 좆 까라 그래. 내가 로렌을 건드렸다고 해서 지들이 뭐 어쩔 건데? 카스트로 가문의 장남인 날 건드리기라도 하겠어? 우리 아버지와 베네딕트 후작님은 어렸을 때부터 절친한 사이야. 내가 어떤 개망나니 같은 짓을 하더라도, 카이로에서는 절대 날 건드릴 수 없다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지금과 같은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윌리엄 카스트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고, 감히 자신을 우습게 보는 녀석들이 있다면 철저하게 짓밟아 주었다.

그중에는 제법 이름을 알리는 존재도 있었다.

그들은 윌리엄 카스트로를 죽여 버리겠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나중에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게 바로.

중앙 정부의 권력이다.

카스트로 가문이 중앙 정부에 발을 걸치고 있는 한, 윌리엄 카스트로는 그리 두려울 게 없었다.

그가 말했다.

“지금 당장 로렌 드미트리를 내 앞으로 데려와. 저항한다면 기절시켜도 좋아. 로렌을 괴롭히는 건 그동안 모두 동조했던 일이잖아.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 두자고. 결국, 태생에는 한계가 있음을. 그 녀석의 형이 카이로의 영웅이라 불려도, 진짜 권력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걸 보여 주지. 난 로렌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어.”

친구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결정은 내렸다.

말이 친구의 관계지, 부모로부터 비롯된 그들의 사이에서는 윌리엄이라는 절대적인 갑(甲)을 모셨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말해 봐.”

홱.

다들 고개를 돌렸다.

휴게실 입구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사내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동생을 어떻게 할 건지 다시 한번 말해 보라고.”

* * *

동생이라는 말.

그들은 직감했다.

‘로만 드미트리다.’

수도로 귀환한 영웅.

방금까지 자신감 넘치게 굴었던 윌리엄 카스트로도, 막상 로만을 마주하자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윌리엄 카스트로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원한다면 말해 주지. 감히 주제도 모르는 그 녀석을 내 앞으로 데려와서…… 크흡?!”

콰악.

로만이 손을 뻗어 윌리엄의 하관을 틀어쥐었다.

피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윌리엄의 표정이 공포로 물들었고, 로만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아?”

“읍, 읍…… 읍!”

“로렌을 괴롭히는 것까지는 좋아. 로렌은 자신이 어떤 배경과 힘을 쥐고 있는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는 녀석이고, 나는 그런 녀석을 챙겨 주겠다고 일일이 나서는 보모가 아니니까. 아마 너희들이 평소처럼 로렌을 괴롭히는 것에서 끝냈다면 나는 나서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로렌.

그는 로만의 시험에 통과했다.

최소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그 순간부터, 로만은 로렌이라는 존재를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내가 그걸 봐 버렸다는 거야. 로렌을 괴롭히고, 드미트리를 우습게 보는 너희들의 말을 들어 버렸어. 나 로만 드미트리를. 나아가 너희는 드미트리 가문을 무시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너희에게 어떤 대가를 받아야 할까?”

꽉.

손에 힘을 주었다.

윌리엄 카스트로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감히 공격하지는 못하고, 양팔만 휘저으며 벗어나려고 발악했다.

툭.

얼굴을 놓아 주었다.

창백한 얼굴로 숨을 들이켜는 윌리엄의 모습에, 로만이 말했다.

“너희 가문으로 안내해.”

“……뭐라고?”

때마침.

로만은 명분을 원했다.

드미트리 가문의 위상이 바뀌어 가고 있는 지금, 그에 걸맞은 사건이 필요했다.

“진짜 권력이 어떤 것인지 한번 경험해 보고 싶군. 그러니까, 지금 당장 너희 가문으로 안내하라고. 철없는 자식이 실수를 저질렀으면. 그 잘못은 부모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윌리엄 카스트로는, 절대 로만 드미트리를 가문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이 개새끼야. 어디 우리 부모님 앞에서도 그따위 말을 내뱉을 수 있을지 보자.”

그는 믿었다.

태생의 차이를.

윌리엄은, 분노한 얼굴로 휴게실을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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