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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615)

117화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1)

헥토르와의 전쟁이 끝나고.

로만 드미트리가 수도로 복귀한다는 소식에, 한스는 로메로 남작의 허락하에 곧바로 수도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로만의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로메로 남작은 아들에 대한 걱정이 대단했고, 한스라도 보내서 로만을 챙겨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수도에 도착한 한스.

왕실에서 미리 배려해 준 숙소를 정리하던 그는,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온 인물을 만났다.

“……로렌 도련님?”

“한스.”

로렌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를 떠날 때처럼 아직은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그는, 한스의 주변을 맴돌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물었다.

처음에는 가문의 안부였다.

아버지는 잘 계시는지, 어머니에게 특별한 문제는 없는지. 이미 며칠 전에 로렌 드미트리가 가문에 연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스로서는,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바가 있음을 알았다.

기다렸다.

먼저 말해 주기를.

의미 없는 대화가 한참이나 진행되고서야, 로렌 드미트리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한스.”

“말씀하십시오.”

“내가 수도로 떠나 있는 동안 로만 형한테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내가 기억하는 로만 형은 검술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는데, 조금 전에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수도로 복귀하는 모습을 봤거든. 사람들의 말로는…… 로만 형이 헥토르의 랭커를 이겼다고 했어.”

말을 하면서도 수차례 망설였다.

진실이 아니라고 믿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는데도, 로렌 드미트리는 로만의 달라진 모습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스가 말했다.

“로렌 도련님이 떠나 있는 동안 드미트리에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도련님도 세간에 퍼지는 소문을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로렌스 가문과 파혼하고 바르코 가문과 전쟁을 벌였으며, 호메로스를 쓰러트리고 이번에는 남부 전선으로 가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로만 도련님을 알던 사람들은 그게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일은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제가 어찌 도련님에게 거짓을 고하겠습니다. 로만 도련님이 달라진 행보를 보여 주신 덕분에, 최근에 로메로 영주님께서 정말 행복해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저녁에는 숙소로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만나면, 로만 도련님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한스의 제안에.

로렌 드미트리는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그건 괜찮아.”

애매한 반응이었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한스의 반응을 보면서 머뭇거리는 모습은 말과 다른 것 같았다.

결국.

로렌 드미트리는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한스에게 고생하라는 말을 남기고 숙소를 나섰다.

* * *

한스는 드미트리를 오랜 세월 보필했다.

그 시간을 대부분 로만을 위해 투자했지만, 지내 온 세월이 있기에 드미트리 도련님들의 성향을 알았다.

‘무언가 문제가 있구나.’

로렌 드미트리.

마음씨가 여린 분이다.

드미트리의 삼남은 모두 다른 성향을 타고났다.

로만과 로드웰은 그래도 아버지의 불같고 강인한 성질을 물려받은 편인데, 로렌 드미트리는 딸을 낳길 바라던 아비의 마음이 앞선 두 형과는 다른 아들로 성장시켰다.

정확히는 어머니를 닮았다.

매사에 신중하고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으나, 가끔은 답답할 정도로 소심해서 속을 썩였다.

한스가 보기에.

로렌 드미트리가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아무래도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직접 알아보았다.

왕실 아카데미를 통해 조사해 본 결과, 어렵지 않게 로렌 드미트리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 사실을.

한스는 로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로렌 도련님이 아카데미에서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도 로렌 도련님은 바닥에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아프다고 말 한번 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련님이 저를 찾아와서 로만 도련님에 대해 한참을 묻고 갔습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저로서는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실 아카데미.

익히 들었다.

출세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카이로 왕국의 모든 귀족이 자식을 이곳에 입학시켰다.

미래의 권력이 모이는 장소. 그래서인지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중앙 정부 귀족의 자제들이 다른 귀족들을 대놓고 차별했고, 특히 로렌 드미트리와 같은 변방의 출신은 같은 귀족으로서의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나마.

로드웰 드미트리처럼 실력을 증명하면 달라지겠지만, 로렌 드미트리는 실력과 배경 둘 다 없었다.

상황이 뻔히 보였다.

한스는 일부러 예민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채, 간곡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도련님.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로렌 도련님을 만나봐 주실 수 없겠습니까?”

로렌과의 만남.

예정에는 없던 계획이었다.

로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미트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존재가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로렌 드미트리. 나와는 나이 차이가 있는 막냇동생이라고 했었지.’

기억을 더듬었다.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로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차남인데도 로만에게 단 하나의 권리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그때부터 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은 시작되었다.

로만과 로드웰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로만은 자신의 한계에 부닥쳤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에 반해.

로렌은 권력의 경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나이 차이를 떠나서, 로렌 드미트리는 형들을 따라다닐 뿐 권력에는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챙길 필요는 없다.’

다만.

직계 가족이다.

자신이 경험해 보지도 못한 기억을 근거로 동생을 애틋하게 챙겨 주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드미트리의 성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한 번쯤 로렌을 만날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로렌 드미트리를 평가하는 자리다.

백중혁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정점의 자리에 오르는 잔인함을 보였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주는 한스와 로메로 남작과 같은 새로운 인연들은 선뜻 받아들였다.

판단의 기준은.

현생의 자신이 정했다.

드미트리의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로만은 로렌의 어려움을 도와주진 않을 것이다.

“알겠다. 한번 만나 보도록 하지.”

“도련님!”

활짝 웃는 한스.

로만은 어쩌면, 한스의 부탁이기에 들어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로만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영입은 무기한 연기되었어. 하지만, 아직 베네딕트 후작님에게 점수를 딸 방법은 남아 있다.’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로만을 회유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그는, 로만의 선언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

그는 새로운 해결책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만 눈여겨보고 있지만, 사실 그를 따르던 수하들도 만만치 않은 인재들이었어. 처음에는 정말 당황스러웠지. 드미트리는 변방의 가문인데,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재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고 있다니. 그들을 회유한다면 베네딕트 후작님은 분명히 크게 기뻐하시겠지.’

전장 한가운데서.

파비우스 백작은 똑똑히 보았다.

로만을 도와주라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수하들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을 도륙해 버렸다.

특히 크리스.

존재감이 도드라졌다.

한때 드미트리의 천재 검사라고 불리던 그도 수도에서는 무명(無名)에 불과한데, 헥토르의 오라 검사들을 동시에 베어 버리는 모습에 전율이 돋았다.

크리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20대가 넘어 보이지 않았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가 20대 중반의 나이에 버틀러를 쓰러트리면서 다른 존재들이 빛을 발하지 못했을 뿐이지, 크리스의 성장은 충분히 비슷한 나이대를 월등히 뛰어넘었다.

확실했다.

크리스는, 수도의 그 어떤 귀족도 두 팔을 벌려 반길 인재였다.

‘이게 바로 현장의 경험이지. 내가 직접 남부 전선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로만 드미트리만이 베네딕트 후작님을 기뻐하게 할 선물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일단 단계적으로 로만을 공략하자. 크리스를 비롯한 로만의 수하들. 그들을 우리의 편으로 만들고 천천히 로만의 마음을 회유하도록 명령한다면, 나는 단번에 베네딕트 후작님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 될 수 있어.’

일거양득(一擧兩得).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거절은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고?

로만 드미트리도 아니고, 크리스와 같은 녀석들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자신이 있었다.

로만과 그의 수하들.

그들을 회유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 * *

로만은 크리스를 비롯한 수하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치열했던 전쟁.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막대한 휴가비도 지급해 주었기에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휴식을 즐겼다.

크리스.

그는 홀로 수련장에 남았다.

남부 전선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도저히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 주군을 만났을 때. 주군은 분명히 내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언제고 주군을 넘어서리라고 다짐했는데, 짧은 시간에 주군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올라섰다.’

충격적이었다.

버틀러와의 대결.

상식적으로 로만이 패배하는 것이 맞는데, 크리스는 왠지 로만이 승리할 것만 같은 믿음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틀러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헥토르가 자랑하는 5성의 검사가.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던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패배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머릿속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확실한 건 주군의 곁에서 내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주군의 등만 보고 따라갔을 뿐인데. 지난 반년간, 나조차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아직도 내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주군은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발전 속도를 보여 주고 있고, 주군이 내게 말해 주는 지식은 모두 보물이라 할 만한 것들이다.’

섬전.

변방의 남작 가문이 보유할 만한 지식이 아니다.

만약 애초에 드미트리의 것이었다면, 드미트리 가문은 검의 명가로서 이름을 떨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인즉.

로만이 만들어 냈다는 의미다.

오라의 원리를 의심했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선구자(先驅者)의 면모를 보였다.

고로.

자신의 선택은 옳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발전한다는 확신이 있었고, 지금은 매 순간 강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멈추고 싶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안일한 태도를 보인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손길이 영영 닿지 않는 세계로 나아갈 것만 같았다.

그를 쓰러트리겠다는 목표.

진심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떠난 훈련장에서 그는 검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혹시 크리스 님 되십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파비우스 백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크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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