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금의환향(錦衣還鄕) (2)
며칠 전.
카이로의 본대가 후방 진지를 공격한다는 보고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을 보였다.
“만약에 말입니다. 후방 진지를 함락시키는 것에 실패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국왕파 소속 귀족의 말이었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
그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다니엘 카이로는, 다소 절망적인 기색으로 말했다.
“……패배의 책임은 왕실에 있다. 이 나라가 귀족파에 의해 명령 체계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고 한들, 백성들은 전쟁의 책임을 국왕에게 물으려고 하겠지. 그때부터는 더 이상 국왕의 자격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없다. 하이에나와 같은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나를 끌어내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녀석들!”
“그래도 같은 카이로의 핏줄을 타고났는데, 참으로 너무한 것 같습니다.”
막막했다.
중앙 정부의 세력.
베네딕트 후작과 그레고리 백작, 덴버 백작은 남부 전선을 도와주는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 후방 진지를 함락시키는 것에 실패한다면. 헥토르 왕국은 카이로와의 협상을 거절하고, 크로노스 제국에 남부를 넘길 수도 있다.
그때는.
정말 왕실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남부와 서부에서 크로노스와 국경이 맞닿는다는 의미는,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는 공포를 뜻했다.
다니엘 카이로가 말했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어떤 선택이든 본인들에게는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카이로의 본대가 승리한다면 위기를 넘겨서 좋은 것이고,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왕실을 압박할 확실한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카이로의 안위가 아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카이로 왕국이 부흥하기를 바랐다면, 크로노스 제국에 남부 전선이 넘어가는 꼴을 눈뜨고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무조건 헥토르 왕국과의 협상을 진행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겠지.”
도대체.
어쩌다 나라 꼴이 이렇게 되었을까.
물려받고 싶지 않았던 왕위를 이어받은 순간부터, 다니엘 카이로는 한순간도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카이로를 위협하는 적은 내부에 있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자신들만의 이득을 바라나, 그렇다고 우리 또한 그들처럼 이기적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패배했을 때의 미래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카이로의 백성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할지라도. 우리가 카이로 왕실로서 그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존재 의미를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나약하고 유약한 왕이라 할지라도.
일부 귀족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다니엘 카이로가 왕국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성군(聖君)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고, 약소국에서 유약한 왕은 하이에나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회의는 계속되었다.
만일의 가능성.
그것을 대비하던 국왕파의 사람들은, 남부 전선에서 날아든 하나의 소식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것이 정말 사실인가!”
“살았다!”
승전보.
그것도 겨우 몇 시간 만에.
차마 기대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성과에, 다니엘 카이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
그야말로 성대한 잔치였다.
금의환향.
영웅이 되어서 돌아온 로만의 행보에, 콧대 높은 수도의 귀족들이 모두 로만을 반겼다.
“정말 고생했네!”
“자네 덕분에 카이로가 큰 위기를 넘겼어.”
그들도 소문을 들었다.
정확히는, 각자 자신들의 정보통을 통해 로만이 얼마나 대단한 행보를 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중.
파비우스 백작은 이렇게 보고했다.
“사실 아직도 제가 경험한 것이 현실인지 의심이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헥토르 왕국을 무너트린 전략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해서 헥토르 왕국을 함정에 빠트렸고, 5성의 경지를 자랑하는 버틀러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베네딕트 후작님. 저는 살면서 그와 같은 재능을 본 적이 없습니다. 대륙 제일의 검이라고 불리는 존재도 20대의 나이에는 그만한 행보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검사로서,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무조건 크게 성공할 인물입니다.”
극찬이었다.
이미 모두가 바라는 인재였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평가를 한 번 더 뛰어넘었다.
지휘관으로서의 재능과 버틀러를 쓰러트린 결과는, 그간의 행보가 초라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로만의 복귀를 축하하는 파티장.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로만과 말을 한번 섞어 보려고.
중앙 정부의 귀족들조차도, 자존심을 버리고 로만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로만 드미트리. 드디어 직접 만나 보는구나.”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다니엘 카이로였다.
귀족들이 길을 열었다.
아무리 허수아비 국왕이라지만, 많은 시선이 집중된 자리에서 국왕에게 무례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카이로 왕국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너는 카이로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과감한 결단력으로 헥토르를 물리쳤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카이로의 평화를 되찾았다. 혹시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무엇을 원하든 간에, 내 힘이 닿는 한에서 최대한 들어주겠다.”
논공행상(論功行賞).
보상을 내릴 차례였다.
그것은 국왕의 권한이었고, 다니엘 카이로의 말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때였다.
로만이 대답하기도 전에, 다니엘 카이로가 말을 덧붙였다.
“때마침 로열 나이트의 부기사단장직이 공석이 되었다. 너만 괜찮다면. 부기사단장의 작위와 왕가의 보고(寶庫)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겠다. 그곳에서 재물을 가져가도 좋고, 아니면 카이로가 대대로 보관한 값진 지식을 터득해도 좋다. 어떤가. 내 제안이.”
그 말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해 버렸다.
다니엘 카이로의 제안.
로만을 먼저 차지하겠다는 의도에,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더는 웃으며 상황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 * *
로열 나이트의 부기사단장직.
엄청난 특권이었다.
겨우 20대의 나이에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것은, 카이로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니엘 카이로가 말했다.
“카이로 제일의 검이자 로열 나이트의 수장. 니콜라스 백작은 자신의 뒤를 이를 후계를 찾고 있다. 너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지금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는 재능을 보유했지만, 앞에서 이끌어 주는 존재가 있다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국방의 의무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다른 보상을 떠나, 너에게 남은 의무를 특별히 면제(免除)할 생각이다.”
다니엘 카이로.
그가 처음으로 욕심을 부렸다.
‘로만 드미트리를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어린 나이에.
그는 아비의 죽음으로 왕관을 써야만 했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허수아비로 써먹기 좋은 다니엘 카이로의 존재를 반겼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다니엘 카이로는 중앙 정부의 수장들을 상대로 예를 갖추어야 했다.
회의실에서 존대로 그들을 대하는 이유였다.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순간, 베네딕트 후작을 비롯한 중앙 정부의 수장들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국왕을 압박했다.
그렇기에.
항상 숨이 막혔다.
카이로의 백성들은 그를 최고 권력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5성 검사인 버틀러를 쓰러트렸다. 니콜라스 백작에 버금가는 강자를 만약 내 사람으로 들인다면, 귀족파로서도 섣불리 나를 압박할 수 없다. 그때부터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나를 유약한 왕이라 부르지만, 나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생각을 달리 먹었다.
왕국을 지옥에 떨어트리면서까지 자기 잇속을 챙기는 귀족들의 모습에,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약한 면모를 벗겨 냈다.
처음으로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자.
베네딕트 후작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보상으로 또 다른 의무를 짊어지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국왕 폐하. 로열 나이트는 왕실의 직속 무력 단체로서, 앞으로의 미래가 보장된 젊은 인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선택일 뿐입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는 영웅에게 그만한 보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왕가의 보고를 개방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만, 이건 아닙니다.”
반발에 부딪혔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
그들이 앞으로 나섰다.
너도나도 한마디 말을 덧붙이며, 다니엘 카이로의 제안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대체 언제부터 로열 나이트의 입단을 희생이라 표현했단 말인가.’
로열 나이트.
기사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다.
한때는 로열 나이트에 입단하기 위해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평생을 노력했건만, 왕권이 무너지면서부터 계륵(鷄肋)처럼 여기는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귀족들의 말처럼 로만은 자신의 제안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을 내뱉은 이상 자진해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베네딕트 후작. 나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가 결정할 몫이다.”
선을 넘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존대가 아니라 하대를 택했다.
순간 베네딕트 후작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다니엘 카이로는 개의치 않고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만약 로만이 다니엘 카이로를 따르겠다고 한다면.
그때는 정말, 카이로 왕국은 혼란과 공포에 빠질 것이다.
* * *
국왕의 제안.
의외였다.
로만이 기억하는 다니엘 카이로는 유약한 왕인데, 그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왕가의 핏줄이라는 건가.’
세간의 평가.
어쩌면 다니엘 카이로는 소문처럼 유약한 왕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속되었던 압박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그게 유약한 것처럼 비추어졌다.
마침내 반전의 기회가 생기자.
다니엘 카이로는 도박을 걸었다.
이로 인해 앞으로 압박이 더욱 심해지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카이로 왕실을 떠안을 이유는 없다.’
이번 전쟁.
헥토르 왕국을 상대하며, 로만은 자신이 아직 새로운 세상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법을 사용하는 에드윈 헥토르와 5성 검사 버틀러.
카이로 왕국의 사람들은 그들을 쓰러트린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대륙의 기준에서는 그들의 표현처럼 대단하지는 않았다.
에드윈 헥토르?
겨우 4서클 마법사다.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부류들은, 무려 7개의 서클로 천재지변(天災地變) 같은 마법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버틀러.
헥토르 왕국에서 그의 랭킹은 2번째다.
하지만 대륙 랭킹에서는, 버틀러의 이름을 끝자락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딱 그 정도다. 우물 안 개구리. 카이로를 벗어나서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없는 존재.’
다니엘 카이로.
베네딕트 후작.
그레고리 백작.
덴버 백작.
그들도 마찬가지다.
카이로 왕국이기에 그들은 권력자의 행세를 하는 것이지, 대륙으로 나가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제안도 승낙할 수 없었다.
지금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최소한의 조건을 갖출 시간이 필요했다.
로만이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저는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열 나이트. 검사로서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미래를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
명백한 거절.
다니엘 카이로는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에 반해,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웃는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실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지 못했다면 2년 뒤에나 하려던 계획입니다. 일단 수도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고, 저는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얻은 깨달음들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드는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준비가 끝났을 때.”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행보를 밝혔다.
“저는 공개 랭킹전에 도전하겠습니다.”
공개 랭킹전.
그 단어에.
사람들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