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615)

113화 벼랑 끝에서 (7)

서클이 열렸다.

정확히는, 마나를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자연과 동화되었다.

마법사들의 필살기.

한동안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 되는 대가로, 에드윈 헥토르는 전보다 강한 힘을 얻었다.

“윈드 블레이드.”

사사사삭!

선공은 에드윈 헥토르였다.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바람의 칼날을 일으켜 곧바로 공격을 시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힘.

윈드 블레이드는 검사들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마법 중 하나이건만, 로만의 예민한 감각은 보지 않고도 바람의 칼날이 어느 방향으로 공격해 오는지를 파악했다.

빠르게 피하는 움직임.

살짝 걸음에 제동이 걸린 그때, 사방에서 헥토르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콰릉.

콰르르르릉.

“죽어라!”

“왕자님을 지켜라!”

오라가 폭발했다.

이곳은 적지다.

둘만의 승부를 가리는 낭만적인 상황은 허락되지 않았고, 에드윈 헥토르 또한 정정당당한 대결을 입에 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번뜩.

단 일격.

단전의 마나를 일으켰다.

천마검법 이초식이 발휘되며, 로만은 달려드는 적들을 오라와 함께 모조리 베어 버렸다.

푸확!

단숨에 나가떨어지는 기사들.

그건 정말 장관이었다.

사방에서 오라의 휘황찬란한 빛깔이 일어났건만, 눈 한번 깜빡하는 사이에 그것이 모두 피로 물들어 버렸다.

압도적인 광경에도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헥토르의 병사들도, 그리고 에드윈 헥토르도. 로만의 압도적인 행보를 지켜보면서, 이제는 그가 이 정도에 당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인탱글.”

촥.

파바바바박!

땅바닥을 뚫고 나무줄기들이 일어났다.

에드윈 헥토르는 손길로 나무줄기의 움직임을 조절했고, 로만의 이동 방향을 제한함과 동시에 헥토르의 궁수들이 로만을 향해 화살을 발사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메모라이즈를 발현해 후속타를 준비했다.

“인페르노.”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강력한 화염 마법!

화력(火力)으로만 따지면 4서클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이, 서클의 개방과 함께 엄청난 열기를 폭발시켰다.

그야말로 드래곤의 브레스와도 같았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빨갛게 올라올 정도의 열기였고,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화염을 뚫고 나아갈 방법이 없었다.

한 걸음마다.

사방에서 로만의 목숨을 위협했다.

단 한 명에 의해 많은 것을 잃은 만큼,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헥토르의 병사들은 목숨을 걸었다.

그들의 표정.

그들의 의지.

죽음은 개의치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이대로 두었다간 모두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로만의 검에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생채기 하나 남기려고 발악했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무적이 아니었고, 에드윈 헥토르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몸에 조금씩 상처가 생겨났다.

그럴수록.

로만은 더욱 격렬하게 들끓었다.

생명을 대가로 활활 타오르는 적들을 상대하며, 로만 또한 이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자신의 전력을 다했다.

확!

파박.

불길을 뚫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열기가 로만의 몸을 휘감았지만, 더는 에드윈 헥토르가 날뛰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건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 장면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걸음을 막으려고 발악하는데도, 기어코 그걸 뚫어내는 모습은 로만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자신이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라면 반드시 눈앞에 도달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라이트닝 블레이드(Lightning Blade).”

빠지지지직.

강렬한 전기 다발이 일어났다.

단일 타깃을 대상으로 가장 위력적인 마법.

로만을 기다렸다.

눈앞에 도달하는 괴물과 마주하는 그 순간, 에드윈 헥토르의 손길로부터 비롯된 전기 다발이 로만에게 작렬했다.

콰르릉!

빠지지지지직!

‘먹혔다!’

이번만큼은.

손에 유의미한 감각이 전달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마침내 로만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확-

번개를 뚫고.

로만이, 에드윈 헥토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로만은 무모하지 않다.

마법을 정면으로 맞닥트리는 것이 아니라, 극한의 경공술을 발휘해 눈앞에서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번개를 뚫고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에드윈 헥토르와 같은 사람들의 눈에도, 로만의 움직임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버렸다.

‘끝이다.’

에드윈 헥토르.

짧은 시간을 알았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려고 발악하던 존재다.

살려 둘 생각은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라는 존재를 인정했기에, 성문을 열고도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번뜩.

검을 휘둘렀다.

마법사의 육체 능력으로는 반응할 수 없는 공격.

이번에는 끝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로만의 감각에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왕자님…… 커억!”

푸확!

피가 튀었다.

켈란이었다.

성문에서부터 로만을 따라다니며 어떻게든 저지하려고 하던 그가, 에드윈 헥토르가 위험하다는 사실에 몸을 날렸다.

그의 가슴팍이 잔인할 정도로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켈란은 동공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고, 그 모습에 에드윈 헥토르는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켈란!”

머리가 팽팽 돌았다.

버틀러에 이어 켈란까지.

자신의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로만이 존재하는데도, 에드윈 헥토르는 황급히 포션을 꺼내 켈란의 가슴에 들이부었다.

“제발, 제발!”

“도, 도망치십…… 쿨럭!”

켈란이 피를 한 움큼이나 내뱉었다.

이미 눈에 초점이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애처로운 손길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포션을 들이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당장에라도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때였다.

확!

누군가가 에드윈 헥토르의 몸을 낚아챘다.

바로 잭슨이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발악하며 잭슨의 손길을 뿌리치려 하자, 잭슨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여기에서 정말 죽을 생각입니까! 왕자님의 사람들이, 왕자님 한 명을 살리겠다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에드윈 헥토르. 당신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깐 끝까지 살아남으십시오. 비겁하고 패배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결단이 헛되지 않도록 제발 살아남으란 말입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버틀러.

켈란.

잭슨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 명은 사경을 헤매고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죽음을 코앞에 두었다.

피가 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로만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가 눈에 뻔히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악마다.’

난생처음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이대로 모두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잭슨은 에드윈 헥토르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모두 퇴각하라!”

“성을 포기한다!”

전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로만은 잭슨을 쫓았다.

도망칠 시간을 벌려는 헥토르 병사들의 공격에, 그들을 베어 버리며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에드윈 헥토르.

그는 눈이 팽팽 돌았다.

울먹거리며 자신에게 소리치는 잭슨과 쓰러지는 켈란의 모습.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과도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마침내 그의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렇게.

툭.

에드윈 헥토르의 정신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잭슨.

레인저 부대의 대장.

4성 검사이기도 한 그가 생전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까?

마치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잭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드윈 헥토르를 안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크악!”

“컥!”

바로 뒤에서.

수하들이 죽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저 부대는 잭슨의 명령을 받았고, 어떻게든 시간을 벌라는 말에 초개(草芥)처럼 목숨을 던졌다. 그런데도 로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사방에서 달려들며 로만의 발목을 붙잡으려고 발악하는데도, 로만은 어느새 잭슨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어서 마음을 타들어 가게 했다.

결국.

모두가 살 수 없음을 알았다.

잭슨이 에드윈 헥토르를 맡기려는 순간, 레인저 부대의 부대장이 그의 손길을 저지하며 말했다.

“대장님은 살아남으십시오.”

그 또한 3성 검사.

대답은 듣지 않았다.

검을 뽑아 길을 막아서더니, 빠르게 다가오는 로만의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이미 네가 승리한 싸움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악에 받친 물음.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로만은 부대장과 맞닥트리자마자, 대답 대신 그의 팔을 한 짝 날려 버렸다.

번뜩.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부대장의 표정이 고통과 충격으로 물들었고, 로만은 곧바로 그의 가슴팍마저 그대로 갈라 버렸다.

푸확.

툭.

무릎을 꿇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로만을 올려다보는 부대장의 모습에, 로만이 말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지. 나를 다시 만나는 순간 너희들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이번 전쟁은 너희가 국경을 넘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마치 너희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울부짖지 마.”

저 멀리.

잭슨의 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따라잡기엔 늦었다.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 것은 효과가 있었고, 그렇기에 로만은 잭슨이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오늘을 기억해라. 다시 적으로 만나는 날, 나는 또다시 악귀가 되어 너희를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잭슨을 비롯한 사람들.

그들은 공포를 느꼈다.

로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차마.

뒤돌아보지 못했다.

로만이 따라올까 봐.

부대장의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잭슨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로만은 걸음을 돌렸다.

‘전쟁을 끝낼 차례다.’

남아 있는 적들.

그들에게는, 지금부터 일말의 희망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 * *

전쟁이 끝났다.

헥토르 왕국의 기습적인 침공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싸움.

남부 전선이 함락될 때만 해도 절망적이었던 상황이, 헥토르의 퇴각으로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가 이겼다.”

“카이로의 승리다!”

“카이로! 카이로!”

병사들이 열광했다.

기쁨의 함성은 승자에게 허락된 특권이었고, 후방 진지가 뜨거운 환호성으로 물들었다.

카이로의 병사들은 성벽 위에 걸려 있던 헥토르의 깃발을 단숨에 부숴 버렸다.

그것을 땅바닥에 내던져 짓밟으며, 포로로 붙잡힌 헥토르의 병사들에게 눈앞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 주었다.

승리.

카이로의 귀족들이 성으로 발을 들였다.

참담한 광경에, 그들은 소매로 코를 가렸다.

“……이게 무슨.”

“정말로 참담하군요.”

사방이 시체였다.

어디를 보아도 시체가 없는 곳이 없었고, 성벽을 비롯한 모든 곳에 핏물이 튀었다.

전쟁과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귀족들로서는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의 정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카이로의 귀족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어디에 있지?’

카이로의 영웅.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를 만나,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를 직접 치하해야만 했다.

파비우스 백작이 걸음을 서둘렀다.

그에 질세라.

다른 귀족들도 그를 따라붙었다.

그렇게 계단을 올라 성벽 위로 올라간 그들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

로만 드미트리.

그가 있었다.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지 그는 피로 흠뻑 물든 상태였고, 그의 근처로는 감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시체 대부분을 로만 드미트리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결과로 확인하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문득.

그들은 생각했다.

‘패색이 짙었던 전쟁을 뒤엎은 존재.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가치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겠구나.’

그들의 예상은 옳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대승(大勝)을 거두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로만의 업적과 함께 카이로 왕국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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