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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615)

104화 끝나지 않은 전쟁 (1)

바실리 남작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정찰을 나간 척후병(斥候兵)의 보고로부터 비롯되었다.

“적들이 제3 방어선을 향해 빠르게 진군하고 있습니다. 선발대는 앞으로 2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고, 후발대는 전쟁 물자를 챙겨서 선발대를 뒤따라오는 상황입니다. 저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선발대의 인원은 약 이천오백, 후발대는 오백 명 정도로 보였습니다.”

총 삼천의 병력.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만약 헥토르 왕국이 자리를 잡고 플레어가 불길을 뿜어내기 시작한다면, 바실리 남작으로서는 수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바로 게릴라 부대를 편성해서 적의 후발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남부 전선은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승리할 필요가 없다. 딱 열흘만 버티면 카이로의 본대가 도착할 것이고, 그때부터는 상황이 단번에 반전되겠지. 고로 게릴라 부대의 운용은 적의 후발대를 괴롭힐 아주 좋은 방법이다. 적이 공성에만 신경 쓸 수 없도록 최대한 방해하고, 만약 후발대가 플레어의 탄알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것을 파괴해 플레어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다.’

위험한 작전이다.

말이 오백이지, 잘못 붙잡혔다간 삼천의 병력에 에워싸여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해내지 않았던가.

겨우 이백의 병력으로 적들을 물리친 것으로도 모자라, 약 천에 달하는 적을 학살한 엄청난 행보.

바실리 남작의 가슴 속에서 영웅 심리가 꿈틀거렸다.

비록 남부 전선으로 좌천당했다고 하나, 그는 한때 서부 전선에서 활약했던 3성의 검사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해낸 일을 나라고 못 할 리가 없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전공(戰功)의 싸움이다. 열흘 안에 최대한 많은 공로를 확보한 사람이, 전쟁이 끝난 후에 중앙 정부에 진출할 수 있겠지.’

결단을 내렸다.

바실리 남작은 삼백의 병력을 추렸다.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몰래 성을 나온 뒤에, 선발대를 피해서 후발대가 이동하는 길목을 선점했다.

차차착.

“정지.”

손을 들어 병사들에게 엄폐를 지시했다.

빠르게 풀숲에 몸을 숨기는 병사들.

바실리 남작은 오라 검사로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전방에 후발대가 접근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직은 후발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바실리 남작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남부 전선이고, 다른 곳으로 돌아갈 길은 없기에 반드시 나타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멀리서.

후발대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바실리 남작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현자가 말하길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오늘을 계기로, 나는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백의 전력 차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겨우 이백의 병력에 학살을 당한 오합지졸들이라면, 삼백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번 작전은 속도가 생명이다.

적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빠르게 전쟁 물자에 불을 지른다면,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앞으로의 행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숨을 참았다.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적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바실리 남작은 땅을 박차며 마나를 실은 목소리로 외쳤다.

“공격하라!”

“전군 돌격!”

기습적인 공격.

득달같이 달려드는 카이로의 병사들은, 분명히 승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콰르르르릉.

오라가 일었다.

바실리 남작은 오라를 발현하더니, 적의 선두를 지키는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선공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강한 확신.

공격이 통하리라 믿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기사를 베어 버리고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콰앙!

콰르르르릉!

“……!”

헥토르의 기사.

그도 똑같이 오라를 발현했다.

분명히 기습적으로 공격했건만, 헥토르의 기사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바실리 남작의 공격을 막아 냈다. 오라와 오라의 격돌.

강한 충돌에 바실리 남작은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공방을 여러 번 주고받은 것이 아닌데도, 상대의 오라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다.

‘상대도 3성의 검사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상했다.

예상했던 그림과는 다르게, 자신을 뒤따라 달려들던 병사들도 차례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적이다!”

“카이로의 잔당들이 나타났다!”

헥토르 왕국의 대응은 일사불란했다.

하늘을 수놓은 화살들.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 내더니, 일제히 달려드는 카이로의 병사들을 단번에 도륙해 버렸다.

학살의 시작이었다.

분명히 카이로가 유리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딪치자마자 처참히 쓸려 나갔다.

“내 동료의 복수다!”

헥토르의 병사들.

그들의 눈에서 독기가 일었다.

피곤한 얼굴로 동료의 장례를 진행하며, 그들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상대의 기습적인 공격?

이미 예상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산과 어둠이라는 이점만으로도 수많은 아군을 도륙한 괴물이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었다.

후발대는 일종의 함정이었다.

적이 평야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꼬리를 흔들고, 나타나는 순간 단번에 적들을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팡-

팡팡-

신호탄이 터졌다.

퇴로가 막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분명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선발대의 병력이 순식간에 복귀했고, 카이로의 병사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퇴로를 완전히 막아 버렸다.

어딜 가더라도 헥토르의 병사들이 길을 막았다.

악에 받쳐서 길을 뚫어 보려고 했지만, 그들의 예상처럼 단번에 나가떨어지는 오합지졸들은 없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바실리 남작.

그의 눈이 팽팽 돌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상식으로는 헥토르 왕국은 오합지졸이어야 하건만, 그들의 재빠른 대응에 숨이 막혔다.

단순히 대비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다.

헥토르 왕국은 애초에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 병사들을 충분히 훈련시켰고, 남부 전선의 안락함에 취한 병사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바실리 남작으로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기에 가능한 업적이었음을.

기적적인 승리는 과신을 낳아 버렸고, 시종일관 헥토르의 기사에게 밀리던 그는 힘이 풀리고 말았다.

콰앙!

팔이 튕겨 나갔다.

표정이 창백해졌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오라.

‘씨발.’

서걱!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카이로 왕실.

그들은 여유를 찾았다.

단 한 번의 승전보에,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주도권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기쁨도 잠시.

겨우 하루의 시간이 지났을 때, 카이로 왕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충격적인 보고를 연달아 받았다.

“제3 방어선의 지휘관인 바실리 남작이 적과의 교전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국왕 폐하! 제3 방어선과 제4 방어선이 적들의 공격에 함락당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제2 방어선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곳도 무너진다면, 남부 전선은 헥토르 왕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됩니다.”

“지금 제2 방어선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적들의 공격에,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단 하루.

헥토르 왕국이 최전방 방어 진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서, 겨우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전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남부 전선의 병력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기세를 뺏어 오면서 그래도 열흘의 시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다니엘 카이로는, 순식간에 악화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라도 발생했단 말인가.’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진실은 아니었다.

헥토르 왕국의 공격에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은, 왕실과의 마지막 연락에서 이렇게 말했다.

[헥토르 왕국이 보유한 플레어가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그들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성벽을 무너트리고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데도, 성벽에 사다리를 걸고 넘어와서 아군을 학살하는 헥토르 왕국을 막을 수 없단 말입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열흘을 버틸 수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남부 전선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남부 전선.

그곳은 노후화된 시설로 인해, 플레어를 방어할 마법 방어 장치들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처음의 패배는 플레어로 인해 성벽의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헥토르 왕국은 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전쟁 물자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플레어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악스럽게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병력은, 카이로 왕국에 잔인한 현실을 보여 주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

남부 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다니엘 카이로는, 그제야 단 한 번의 승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카이로 왕국이 강했던 것도, 그렇다고 헥토르 왕국이 약했던 것도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돌연변이가 파격적인 승리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우리가 안일했구나. 적들과의 전력 차이를 인정하고, 남부 전선의 지휘관들에게 절대 적들과의 정면 승부는 피하라고 명령했어야 했다.’

어쩌면.

자신도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로만이 만들어 낸 기적적인 승리에, 다른 전장에서도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현실이 무너졌다.

막막한 상황에.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어디에 있나.”

다니엘 카이로는, 자연스레 로만의 존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 * *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 왕실이 그를 찾았다.

왕실의 연락을 받은 헨리 앨버트는, 크리스를 찾아가 물었다.

“크리스! 로만 님이 언제 나온다고 따로 말씀한 건 없었나? 남부 전선이 적의 손아귀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실의 연락을 로만 님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그로서는 답답했다.

산 아래.

최전방 방어 진지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때야말로 혁혁한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인데, 전투가 끝난 이후로 로만은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크리스가 말했다.

“이미 예상했던 상황입니다.”

“……뭐라고?”

“주군이 말씀하시길,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행운이 많이 따른 결과라고 했습니다. 적들이 산으로 따라오지 않았다면. 끝까지 자신을 붙잡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헥토르 왕국은 지금보다 빨리 남부 전선을 함락시켰을 겁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했고,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막겠답시고 산에서 내려갔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알았다.

그렇기에.

로만은 휴식을 명령했다.

카이로의 패배를 예상하고, 전력을 아꼈다.

“……대체.”

헨리 앨버트는 말문이 막혔다.

그로서는 로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릴라 전투.

모두가 패배를 예상했다.

말도 안 되는 작전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홀로 결단을 내리고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 내더니만, 이제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자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다.

확실히 상식의 영역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무엇을 하는지는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애가 탔다.

왕실에 자신이 로만의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어야 하건만, 크리스의 단호한 태도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저 멀리.

로만이 있다는 위치를 보았다.

‘저기서 혼자 뭘 하는 거야?’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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