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615)

99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 (3)

계속되는 추격전.

헥토르 왕국은 한발씩 늦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차갑게 식어 가는 시체들만 남아 있을 뿐, 로만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피해가 심각했다.

병사들의 머릿속에 공포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레인저 부대의 대장.

잭슨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까지다!”

꼬리를 밟았다.

헥토르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로만의 모습에, 잭슨은 지체하지 않고 오라를 일으켜 로만을 공격했다.

콰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하듯 분출했다.

순간.

로만은 직감했다.

잭슨이라는 사내가 4성 검사라는 사실을.

쾅!

콰콰콰쾅!

서로의 검이 부닥치며 강력한 충격을 일으켰다.

로만의 검에서 피어오른 오라는 잭슨의 공격에도 밀리지 않았고, 수차례나 공격을 막아 내는 모습에 잭슨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3성 검사로 알려졌다.

그런데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막아 내는 실력이라면, 최소한 동급의 실력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과소평가되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그간의 행보.

헥토르의 병사들이 왜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4성의 경지부터는 그야말로 재앙(災殃)이었고, 일반 병사들로서는 로만을 막을 방법 따위는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잭슨 대장님을 도와라!”

“공격해!”

헥토르의 병사들.

그들이 틈을 노려서 달려들었다.

로만과 잭슨이 부닥치는 상황에서, 후방을 노려 치명상을 입히려는 속셈이었다. 분명히 그들의 공격은 사각지대를 정확히 공략했다.

잭슨과의 치열한 접전에 로만에게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로만은 잭슨의 공격을 쳐냄과 동시에 보지도 않고 후방에 검을 휘둘렀다.

푸확!

단 일격.

병사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위험 요소를 처리한 로만은, 땅을 박차며 곧바로 잭슨을 몰아붙였다.

‘이 녀석!’

잭슨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병사들을 처리하는 여유.

로만이 생각 이상의 실력자라는 사실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경험한 그의 본능은 다른 부분에서 경고음을 보냈다.

잭슨은 4성의 검사다.

외부에는 레인저 부대의 수장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잭슨이 오라 검사로서 얼마나 강한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헥토르 왕국의 랭킹에는 잭슨의 이름이 없다.

잭슨은 명성보다 실리를 택했고, 자신의 공격에 로만 드미트리가 당황하는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예상과는 달리.

로만은 침착했다.

잭슨의 실력을 예상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상대가 4성 검사라는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는 것만 같았다.

잭슨은 상대를 강하게 몰아붙이면서도 이상하게 불안한 감정이 일었다.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는 덫에 걸렸고, 자신에게 발목이 붙잡힌 이상 로만이 살아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대체 어떻게 이리 침착할 수 있는 걸까.

‘네가 어떤 노림수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날 만난 순간, 네가 도망칠 방법 따위는 없다.’

의문을 억눌렀다.

승부는 끝났다.

잭슨이 번 1분이라는 시간.

삐이이익-

“저기다!”

“로만 드미트리를 포위하라!”

잭슨의 뒤로.

수많은 불빛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완벽한 포위였다.

인산인해(人山人海).

주변으로 빠르게 적들이 몰려들었다.

겨우 몇 분 붙잡혀 있지 않았는데도, 헥토르 왕국의 포위망은 로만 드미트리의 숨통을 콱 틀어쥐었다.

“이만 항복해라.”

잭슨이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끝까지 반항한다면.

피해를 각오하고 로만을 죽여야만 했다.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자진해서 항복하는 것이 이상적이었기에, 그는 상대가 선택할 시간을 주었다.

“항복이라. 재밌는 소리를 하네.”

로만이 웃었다.

잭슨의 예상처럼.

로만은 4성 검사의 등장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애초에 카이로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실력자들을 대동했으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그 상대가 잭슨이라는 것은 변수라고 할 만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잭슨이 등장하자마자 당황하지 않고 상대할 수 있었다.

확실히 만만한 실력자는 아니었지만, 예상 범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잭슨.

그는 승리를 자신했다.

얼굴에 차오른 그의 자신감은,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로만을 궁지에 몰았다고 확신했다.

그 모습에.

로만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항복해 봤자 너희들은 위험 요소인 날 곧바로 죽여 버리겠지. 그런데 말이야. 날 추격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상대가 함정을 파 놓았는데도 내가 왜 그곳에 들어갔을까. 어째서 산을 활보하면서 너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을까.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일단 내 몸에 붙은 파편으로는 날 구속할 수 없다.”

화악.

마나를 일으켰다.

단전의 마나로 몸을 순환하자, 몸에 붙었던 빛의 파편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잭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만이 꼬리를 잡힌 이유.

빛의 파편으로 어둠에 숨는 능력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불길함이 커지기 시작했다.

로만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움이 앞섰다.

“두 번째는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위망을 빠져나갈 자신이 있다. 그건 곧 확인할 수 있겠지. 아무리 사방에서 나를 포위한다고 한들, 너희들은 결코 나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로만이, 잭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은 너희들이 나에게 현혹되어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길 바랐다. 잭슨. 레인저 부대의 대장. 헥토르 왕국의 실력자인 네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에드윈 헥토르의 경비가 많이 소홀해졌다는 의미겠지.”

순간.

잭슨이 눈을 부릅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폭발하듯 일어나는 불길한 상상에, 잭슨은 황급히 땅을 박차며 로만의 의도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로만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인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몸놀림으로 나무를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절정의 경공술.

포위망을 형성한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우거진 나무를 박차고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에, 잭슨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당장 왕자님에게로 가라! 지금 왕자님이 위험하다!”

역발상.

로만은 승부수를 걸었다.

* * *

게릴라 작전.

적들을 갉아먹는 전략에는 한계가 있다.

처음에는 적들이 자신의 실력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큰 재미를 볼 수 있었지만, 잭슨과 같은 실력자들이 개입하면서부터는 그게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은 천마가 아니다.

천하십대고수가 전부 달려들어도 전부 쓰러트렸던 사람이 천마 백중혁이었다면, 현생의 로만 드미트리는 잭슨과 같은 인물이 여럿 나타나는 순간 목숨이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

작전이 필요했다.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헥토르 왕국의 계획을 망가트릴 작전이.

‘소수의 인원으로 전쟁을 종결시킬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적의 우두머리. 이번 작전을 계획한 에드윈 헥토르를 죽인다면,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전쟁을 지속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시선을 돌렸다.

에드윈 헥토르.

그야말로 헥토르의 전부였다.

그때부터였다.

로만은 일부러 통신을 걸어 적에게 공포를 심어 주면서도, 통신기를 통해 마나의 흐름을 파악했다.

‘마법 통신기는 마나의 연결을 통해 서로의 목소리를 전달해 주는 도구다. 통신기에서부터 시작되는 흐름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파악한다면, 에드윈 헥토르의 위치를 알 수 있지. 단 한 번만이라도 연락에 성공하면 그 이후부터는 재차 통신을 연결할 필요가 없다. 에드윈 헥토르가 사용하는 통신기의 독특한 마나 흐름을 기억한다면, 내 능력으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작전의 밑그림을 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의 행동은 철저하게 계산되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연락을 넣었고, 마나의 흐름을 파악한 뒤에는 일부러 상대의 덫에 걸렸다.

그리고는 상대들을 끌고 다녔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확신한 적들이 방심하도록, 에드윈 헥토르를 지키던 실력자들도 자신을 잡겠다고 대열을 이탈하도록.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애초에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칠 능력이 있었는데도, 로만은 위험을 감수하고 적들을 상대했다.

무모한 작전이다.

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전장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과감함은 천마 백중혁만의 강력한 무기였다.

홱홱.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경공술.

마나를 발휘한 그의 몸은 마치 산짐승이라도 되는 듯이, 빠르게 산을 헤쳐 나가며 목표를 향했다.

마나의 흐름.

근처에서 느껴졌다.

그곳에 분명히 에드윈 헥토르가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헉!”

“로만 드미트리다!”

에드윈 헥토르.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당황한 호위들이 다급하게 에드윈 헥토르의 앞을 막아섰지만, 찰나의 순간에 그들의 목이 날아갔다.

푸확!

벽이 허물어졌다.

이제는.

에드윈 헥토르를 처리할 차례였다.

그대로 에드윈 헥토르의 머리를 베어 버리려는 순간.

“……!”

에드윈 헥토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로만의 모습을 직시했다.

* * *

로만을 추격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에드윈 헥토르는 말했다.

“아마도 로만 드미트리는 우리가 추격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함정을 파 놓았을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즉흥적으로 우리를 상대하는 것 같지만, 내가 파악한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아무런 계획 없이 모습을 드러낼 녀석이 아니다. 이번 작전. 희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많은 병사가 로만 드미트리의 함정에 죽어 나가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쫓아갈 것이다. 단 한 번의 선례. 우리는 겨우 이백의 병력에 당한 얼간이가 아니라, 끝까지 저항한 적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린 확실한 성과가 필요하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산에 발을 들인 순간.

전쟁은 시작되었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계획을 준비했든 간에, 에드윈 헥토르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랐다.

게다가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괴물이라면.

더더욱 숨통을 끊어 버려야 했다.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분명히 더 큰 위험이 돼서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분명히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우리로서는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상대의 목적. 내가 로만 드미트리라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일까? 그들은 우리가 3일 안에 남부 전선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생각이다. 그런데 사실, 함정을 파서 우리의 숫자를 줄이는 것보다 전쟁을 단번에 끝낼 더욱 간단한 방법이 있다.”

“……설마.”

잭슨이 눈을 크게 떴다.

생각이 통했다.

에드윈 헥토르와 잭슨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바로 헥토르 왕국의 지휘관인 나를 죽이는 것. 로만 드미트리를 추격하는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어쩌면 그는 나를 죽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판단을 내릴지도 모른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선택할 수 없는 무모한 작전이지. 하지만 무전기를 통해 내게 적의를 드러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보고, 그 녀석이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의 가능성이다.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에드윈 헥토르는, 그걸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왕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나 또한, 왕국을 위해 미끼가 되겠다. 잭슨이 로만을 추격함으로써 내가 무방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떠올릴 것이다.”

그 또한.

무모한 사내였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승부수를 걸었다.

“내 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는 순간. 우리는 그를 처리할 확실한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예상대로였다.

황당할 정도로 과감한 판단.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호위를 처리하고 달려드는 모습에, 에드윈 헥토르는 준비했던 수를 사용했다.

화악.

마나가 일어났다.

그런데 그건.

오라 검사가 사용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인페르노(Inferno)!”

화륵.

화르르르르륵.

강렬하게 일어나는 불길!

에드윈 헥토르.

헥토르 왕실의 정식 후계자이자, 하늘이 내린 축복을 타고난 존재.

그는 바로 마법사였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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