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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98/615)

98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 (2)

케빈의 의도는 통했다.

일부러 보내 준 병사 중 하나.

그가 에드윈 헥토르를 찾아가서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이 경험한 일을 토해 내듯 말했다.

“카, 카이로의 진영에 마법사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둠을 밝히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동했는데, 갑자기 카이로의 병사들이 나타나서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단순히 수풀에 몸을 숨기고 기습적으로 공격한 게 아닙니다. 마치 신기루처럼, 그들은 공간을 뚫고 나타났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잔인하게 동료를 죽이던 악마.

케빈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병사는 불안한 듯 자꾸만 뒤를 확인했다.

“……지휘관님. 아무래도 적들이 함정을 판 것 같습니다.”

잭슨이었다.

지금 사방에서 적에게 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분명히 수적인 우위가 있는데도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라면, 병사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었다.

“잭슨. 세상에 다수의 사람을 숨길 수 있는 마법은 없다. 일루전(illusion) 계열의 마법으로 환상을 보여 줄 수는 있으나, 적들은 최소 네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마법 스크롤(scroll)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고서클의 마법 스크롤은 마탑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기에, 이렇게 많은 양을 남부 전선에서 보유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다. 카이로가 고서클의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서부도 아닌 남부 전선에, 그런 존재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불가능합니다.”

“그래, 불가능해. 이건 마법이 아니야.”

마법사.

오라 검사보다도 귀한 존재.

그들은 대부분 중립 단체인 ‘마탑’에 소속되어 있다.

골든 뱅크와 마찬가지로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집단이고, 마나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마탑에 소속되길 희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마탑은 지식의 보고(寶庫)이기에, 마법사로서 성장하길 바란다면 마탑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

각 나라에는 소수의 마법사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존재가 남부 전선에 나타났다는 것을, 에드윈 헥토르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그는 즉흥적으로 우리의 추격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로 산으로 우리를 유인했다. 아마도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겠지. 우리가 산에 오랫동안 붙잡힐수록. 조금이라도 병력의 피해가 더 생길수록. 남부 전선은 여유를 찾을 것이고, 카이로 왕실에서 보내온 병력이 도착하는 순간 전세는 단번에 반전되겠지.’

판을 넓게 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체스 말들.

이곳에서의 소모전이 치명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단 한 번의 후퇴. 기세를 잃는 순간 끝난다.’

병력을 물리고.

최전방 방어 진지를 함락시킨다 한들 의도대로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소수의 인원으로 헥토르를 물리쳤다는 명성을 얻을 것이고, 그 명성은 카이로에 포기하지 않을 명분을 부여할 것이 분명했다.

전쟁은 기세가 좌지우지한다.

이번 전쟁으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패색(敗色)이 짙어질 수밖에 없다.

‘아직 병력을 무르기엔 이르다.’

병사들이 죽고 있다.

하지만.

각오한 일이다.

헥토르 왕국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고, 에드윈 헥토르는 그들의 목숨을 헛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때를 기다린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 함정에 걸리기를.’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나타났습니다!]

통신기로 들려오는 음성.

로만 드미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확.

어둠이 밀려났다.

마법 아티팩트에서 발현되는 불빛이 주변을 밝히는 순간, 오라 검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헉?!”

퍽!

바로 눈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그는, 검사가 제대로 대응하기도 전에 그의 가슴팍에 칼을 꽂아 넣었다.

비틀거리는 오라 검사.

그는 피거품을 물면서 무릎을 꿇었지만, 로만을 올려다보는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쿨럭! 드, 드디어 걸렸구나!”

번쩍!

오라의 폭발.

강렬하게 끓어오르는 마나가 아티팩트를 통해 빛으로 발현되었다.

오라 검사는 죽음을 각오했다.

다만.

의식이 끊기기 전,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로만의 목에 방울을 매달길 바랐다.

삐이이익-

“로만 드미트리다!”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위망을 형성하라!”

상황이 빠르게 변했다.

이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공격을 시도하고 어둠에 몸을 숨기면 잡을 방법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로만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불빛이 빛났다.

마나의 빛이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발사된 빛의 파편.

그것이 로만의 전신에 박혔고, 육체적인 통증은 없었지만 로만의 몸을 반딧불처럼 드러나게 했다.

오라 검사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빠르게 이동하는 움직임에, 지휘관들이 통신을 연결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방금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2중대! 2중대! 그쪽으로 쥐새끼가 가고 있다!]

순식간에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헥토르의 병사들은 체계적으로 로만을 몰아넣었고, 아무리 빨라도 인간의 속도로는 포위를 벗겨 낼 수가 없었다.

이를 위해서 에드윈 헥토르는 피해를 각오하고 병사들을 멀리 퍼트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견되는 순간부터 빠르게 산을 올랐고, 유리한 고지에서부터 로만의 위치를 압박했다.

천라지망.

로만을 잡기 위한 그물을 펼쳤다.

시간이 갈수록 그물의 범위는 매우 좁아졌고, 어느 순간부터 로만을 맞닥트리는 병력이 생겨났다.

그러한 상황에.

헥토르 왕국은 생각했다.

마침내 적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독 안에 든 쥐라고.

단 한 명 때문에 많은 아군을 잃었지만, 밤새 그들을 괴롭히던 귀신을 처리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 * *

로만의 꼬리를 밟았다.

파편의 불빛을 흩뿌리며 도망치는 로만의 모습에, 헥토르의 병사들은 발견하자마자 일제히 공격했다.

“죽어!”

“내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 주마!”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수많은 아군을 죽인 악마다.

밤새 공포에 떨었던 기억에, 병사들의 눈빛이 독기(毒氣)로 물들었다.

훅!

날카로운 무기가 사방에서 로만을 덮쳤다.

그 순간.

로만의 몸이 흐릿해졌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병사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을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번뜩!

푸학!

피가 튀었다.

독기를 드러내던 병사들은 일격에 몸이 찢겨 나갔고, 로만은 멈추지 않고 이어서 공격해 오는 병사들도 모조리 베어 버렸다.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수많은 병사가 로만을 맞닥트릴 때마다 사방에 피를 흩뿌렸다.

분명히 방금까지는 그 어떠한 상대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강렬한 독기를 보였지만, 단 한 명에 의해 무력하게 학살을 당했다.

하지만.

“쫓아!”

“절대 놓치지 마라!”

추격전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적들.

단숨에 여러 명의 적을 베어 낸다고 할지라도, 그 이상의 적들이 나타나서 로만의 뒤를 쫓았다.

도망칠 공간은 없었다.

천라지망.

완벽한 그물에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끌리는 사이, 헥토르의 고수들도 출몰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오라의 폭발이 일어났다.

오라 검사들.

그들이 오라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그중에는 3성의 오라 검사도 있었고, 대기를 찢어발기는 강력한 오라는 로만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이번만큼은 공격이 통했다고 확신했다.

지휘관들에게 들은 바로 로만 드미트리는 3성의 검사였고, 같은 오라 검사 여럿을 상대할 방법은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사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오라의 불길에, 로만은 단전의 마나를 폭발시켰다.

‘천마검법 이초식.’

검이 번뜩였다.

사납게 일어나는 마나가, 시야를 가득 메우는 오라와 충돌했다.

콰콰콰콰쾅!

“크악!”

“으아아아악!”

강력한 폭발에 오라 검사들이 그대로 쓸려 나갔다.

오라로 일렁이던 그들의 검이 단번에 잘려 나가며, 그 뒤에 있던 연약한 육신도 같이 찢겨 나갔다.

단 일격.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엄청난 공격을 보여 주고도, 로만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들 충격에 빠졌다.

로만은 무서운 적이었다.

상식을 완전히 벗어났고, 그의 꼬리를 움켜쥔다고 해도 죽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혼자서도 저렇게 강한 괴물이다.

그런데 놓치면 어떻게 될까?

상상조차도 싫었다.

남부 전선에 있는 진지들을 모두 함락시킨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어떻게든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을 도륙해 버릴 악마로 보였다.

다들 악에 받쳤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소중한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내던졌고, 로만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면 칼에 목을 들이밀기까지 했다.

처절했다.

로만을 죽일 절호의 기회.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했다.

겨우 10분.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죽어 나간 사람들의 피가 강을 이루었고, 움직일 때마다 발바닥에 시체가 밟혔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악마.

정말로 그가 도망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

그건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너무나도 불길한 가능성이었다.

* * *

푹!

“커억.”

이번에도 추격하던 적을 처리했다.

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

로만은 핏물을 털어 내며, 살짝 차오르는 숨을 진정시켰다.

‘내 체력도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천마검법.

로만으로서도 자주 사용할 수 없는 수였다.

하지만 헥토르의 오라 검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다 보니, 무리하게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로만의 발밑에서.

가슴팍이 길게 베인 검사가, 숨을 헐떡이며 로만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네, 네가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후욱, 후욱.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수천의 병력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다. 네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후욱. 결국은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가 발악했다.

소리를 지르며, 잔뜩 빨개진 눈으로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피식.

로만이 웃었다.

인간이란 항상 한결같았다.

톰슨의 일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특정 상황에 똑같은 착각에 빠졌다.

“너희야말로 왜 내가 스스로 이 덫에 들어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거지? 뻔히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앞으로 나서는 검사들을 보고도, 나는 그들을 죽이고 내 몸에 파편이 박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그게 무슨.”

헥토르 왕국.

그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미끼였다.

일부러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자신을 쫓아오도록 판을 만들었다.

경악으로 물드는 검사의 얼굴.

그를 내려다보며, 로만은 잔인한 현실을 말해 주었다.

“나를 추격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너희들은 포위망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인간이 하는 일에는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1분. 아니, 단 30초라도. 먼저 도달하는 적들은 멍청하게도 나를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지. 재밌지 않나? 나를 궁지에 몰았기에, 너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알고 있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 작전인지를.

하지만.

천마 백중혁은 항상 이렇게 살았다.

역발상(逆發想).

파격을 행하는 존재.

“그러니까 갈 데까지 가 보자고.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으니까.”

적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아니.

백중혁의 세계에서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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