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 (1)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케빈은, 로민의 계획을 따르는 것으로 결정 난 뒤에야 물음을 던졌다.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번 전쟁.
로만 홀로 감당할 문제가 아니다.
산의 지형과 어둠을 이용해서 적을 처리하는 것은 좋지만, 이백에 달하는 병력이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케빈은 로만을 위해 자신들의 역할이 있기를 바랐다.
그건 크리스도 다르지 않았고, 케빈이 중요한 부분을 언급해 주자 크리스도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주군 홀로 게릴라 작전을 진행하겠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주군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고, 주군의 능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저희는 방해물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주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끼로 쓰셔도 좋습니다. 저희를 유용하게 사용해 주십시오.”
그들의 말.
괜한 걱정이었다.
로만은 애초에, 자신이 보유한 전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작전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마.”
촤르르륵.
지도를 폈다.
맥버니의 지도였다.
사소하지만 일부러 맥버니의 지도를 꺼낸 로만은, 산의 초입 부분에 해당하는 구역을 지목했다.
“이번 작전은 세 가지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 내가 기동력을 살려 헥토르의 잔당들을 처리할 것이다. 헥토르 왕국은 최전방 방어 진지를 공격한다고 정신이 팔려 있는 상황이니, 그동안 적지 않은 적을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 헥토르 왕국이 내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추격대를 보낸다면, 나는 그들을 산으로 유인할 것이다. 아마 헥토르 왕국은 수적 우위를 활용해 나를 단번에 처리하려고 하겠지. 나는 전투를 길게 끌고 갈 것이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내 능력을 발휘해서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헥토르 왕국은, 반드시 무리해서라도 자신을 추격하려 할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세 번째 단계에 돌입한다. 지형을 활용한 기습적인 공격. 그것이 너희의 역할이다.”
* * *
세 번째 단계.
단순한 작전이었다.
함정을 파고 기다리다가, 대열이 흐트러진 적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작전이기에, 사람들은 기습 공격의 문제점을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았다.
‘산에서의 기습적인 공격은 분명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헥토르 왕국의 추격에 자유로울 수 없겠지. 헥토르와 우리의 전력 차이는 압도적이고, 공격을 성공시키고 무사히 도망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주군의 명령이라면 따를 것이다.’
그 누구도.
작전의 위험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수백, 수천의 적을 상대하겠다는데, 먼저 자리를 잡고 기습적인 공격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질질 짜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이 선택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로만의 병사들은 끝까지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것은 전염병처럼 주변에 번졌고, 맥버니와 스티븐을 따르는 병사들 또한 입을 꾹 다물었다.
강렬한 의지.
제법이었다.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병사들의 마음은 감사하나, 로만은 의미 없는 희생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번 기습 공격의 포인트는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적의 숫자를 줄이는 것에 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헥토르 왕국은 분명히 대열을 형성하고 수색을 시도할 텐데, 그들에게 위치가 발각되는 순간 모두를 죽이지 않는 이상은 꼬리가 붙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희망적인 말을 해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희는 이미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었습니다.”
크리스였다.
목적이 있어 따를지라도.
그의 충성심은 진짜였다.
로만이 말했다.
“아니, 꼬리를 붙잡히지 않을 방법이 있다. 내가 우연히 발견한 고서(古書)에는 이런 내용이 있더군. 마나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해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대자연을 인간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나는 드미트리에 머물면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대자연의 새로운 갈래를 알아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대자연의 갈래라니.
로만은 걸음을 옮겼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와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 돌멩이와 나뭇가지는 다른 것과는 다르게 많은 마나를 타고났다. 사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미약한 양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위치한다면.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마나의 힘은 공간을 비틀어 버린다.”
탁.
돌멩이를 바닥에 놓았다.
앞으로 조금 걸음을 옮기더니, 그곳에는 나뭇가지를 바닥에 심었다.
대체 무슨 행동을 하는 걸까.
한참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에,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이걸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지?’
팽배해지는 의문.
그때였다.
로만이 마지막으로 돌멩이를 내려놓는 순간.
“나는 이 기술의 이름을 ‘진법’이라 부르기로 했다.”
사악.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
로만의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경악.
모두가 놀랐다.
오감(五感)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분명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는데, 신의 장난처럼 로만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제야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방법대로라면, 정말 안전하게 적들을 공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현재.
계획은 통했다.
“공격해!”
“화살을 발사하라!”
파바바박!
바로 코앞에서 발사되는 화살이다.
명사수가 아니더라도 화살을 맞히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육체를 관통하는 화살에 헥토르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방패를 올려 막을 생각조차 하질 못했다.
이번 전쟁을 위해 열심히 훈련했던 병사들이 오합지졸(烏合之卒)처럼 와해되었고, 단번에 오라 검사의 숨통을 끊어 버린 크리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땅을 박찼다.
타닥.
검이 번뜩였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속도에, 가장 선두에 있던 병사들이 놀란 얼굴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크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기습 공격은 기세 싸움이다.
상대가 드러낸 틈을 완전히 난도질하기 위해, 크리스는 우악스럽게 밀고 나갔다.
“다들 정신 차려!”
“반격하라!”
헥토르의 기사들이 반응했다.
그들 중에는 오라 검사도 포함되었다.
사방에서 오라가 일어나며 동시다발적으로 크리스를 공격했으나, 한발 빠르게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는.
푹!
퍼억!
정확히 급소를 공략해 상대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대전사 전투.
3성 검사를 쓰러트리며 크리스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단순히 오라의 위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로만과의 훈련을 통해 더 강해지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흘린 땀방울이 강을 이루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로만의 가르침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기에, 일주일 내내 밤을 새우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훈련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그 결과.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섬전(閃電).
무림을 호령했던 천하십대고수의 검술이 발현되며, 헥토르의 기사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해 버렸다.
“이런 미친.”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거야?!”
적들이 경악했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크리스에 의해, 고통에 찬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만의 병사들.
그들의 무력도 심상치 않았다.
수라 심법과 수라 검법을 익힌 그들은, 일반 병사인데도 일당백(一當百)의 전투력을 보였다.
압도적이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적을 도륙해 낸 크리스는, 갑자기 뒤로 물러나더니 마나를 담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퇴각하라!”
“퇴각!”
여기까지였다.
헥토르 왕국.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호각으로 적의 출현을 알렸다.
그건 상황이 역전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근처에서 지원군들이 달려오는 소리에, 크리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퇴각을 명령했다. 이미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애초에 이번 작전은 많은 적을 죽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안전하게 적들을 괴롭히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다음 포인트로 이동한다.’
이 넓은 산에.
진법을 활용한 은거지를 여러 군데 만들어 두었다.
로만은 현실을 직시했다.
결국은 머릿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기에, 철저하게 본인이 원하는 상황에서만 싸움을 걸었다.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카이로의 병사들.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헥토르의 병사들은 악에 받쳐 따라붙었지만, 어느새 크리스를 비롯한 병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 * *
그 시각.
다른 구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적이다!”
“막아!”
퍽!
카이로의 선두.
케빈이 맡았다.
경악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적의 머리를 베어 버리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적들을 빠르게 도륙해 버렸다.
전투의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만이 의도한 것처럼 헥토르 왕국은 무리해서라도 포위망을 형성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적의 대열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래도 상식적으로 헥토르가 유리한 싸움이었다.
소모전에서는 수적 우위가 절대적이건만, 카이로의 기습적인 공격은 상식적인 범위에 해당하질 않았다.
“죽어!”
헥토르의 오라 검사.
폭발하는 오라는 헥토르의 희망을 담았다.
케빈의 머리를 베어 버리려던 오라 검사는, 오히려 치고 들어오는 케빈의 공격에 먼저 목숨을 잃었다.
로만의 병사들은 말한다.
케빈.
제일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괴물이라고.
분명히 아직 크리스보다 강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을 도륙하는 속도는 오히려 그가 더 빨랐다.
이번 작전.
많은 의문이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헥토르 왕국을 상대하는 것에 걱정했고, 산에서의 게릴라 작전은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케빈은 사사건건 확실한 근거를 확인하는 크리스와는 다르게,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겨우 빈민가나 전전하던 자신과 같은 사람을 단기간에 성장시킨 로만이라면, 상식을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무조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맹목적인 신뢰.
케빈의 원동력은 로만의 존재 자체에 있었다.
크리스와 결과는 같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적을 죽였지만, 그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콱!
푹푹푹!
도망치는 적의 머리칼을 낚아챘다.
그러더니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와, 그의 복부를 수도 없이 찔러 버렸다.
단번에 급소를 끊어 버리는 공격이 아니었다.
최대한 비명을 지르도록. 사정없이 상대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헥토르의 병사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차마 케빈을 공격할 엄두를 내질 못했다.
헥토르는 적이다.
케빈은 로만의 옆을 지키며, 로만이 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바르코와의 싸움.
로만은 상대 가문을 멸문시키는 잔인함을 보여 주었다.
적을 상대로는 한없이 잔인해지던 그 모습에, 케빈은 적들에게 공포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었다.
‘나는 주군이 추구하는 가치를 따른다.’
도망치는 적들.
붙잡지 않았다.
공포를 전염시키기 위해서는 생존자가 필요하다.
일부러 적당히 생존자를 남긴 케빈은, 적들이 몰려드는 소리에 곧바로 후퇴 신호를 보냈다.
크리스.
케빈.
푸키.
볼칸.
기습적인 공격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병 모집에서 가장 처음으로 도전했던 볼칸과 오라 발현에 성공한 푸키가 각각 병력을 맡았고, 그렇게 네 갈래로 찢어진 병력이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일방적으로 적들을 죽이고 도망친 크리스와 케빈처럼, 나머지 두 병력 모두 작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헥토르 진영을 충격에 빠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