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615)

92화 귀영(鬼影) (2)

눈앞의 광경.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헥토르의 기사가 일격에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홀로 적들을 향해 뛰어드는 사내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적이다!”

“죽여!”

헥토르의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언뜻 보아도 수십의 인원.

그런데 그들을 상대하는 사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홀로 전장에 나타난 로만 드미트리는, 수적 차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적들을 정면에서 받아쳤다.

서걱!

파파파팍!

“크아아아악.”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병사들은 외마디 비명을 남기며 나가떨어졌고, 순간 놀라서 멈춘 병사들은 어떻게 대응할 겨를도 없이 육체가 하나씩 잘려 나갔다.

오라를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순수하게 육체의 능력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너무나도 손쉽게 적들을 도륙했다.

일격에 한 명.

검이 번뜩일 때마다 죽음이 따라왔다.

사방에서 로만의 목숨을 노리고 무기를 뻗었지만, 눈을 감았다 뜨면 또 다른 병사를 죽이고 있었다.

괴물이었다.

그런데 압도적인 무력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혼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미친.”

“적은 혼자다! 침착하게 협공을 해!”

“사방에서 공격해!”

일대 다수.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혼자 나타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상황이라니.

헥토르의 병사들이 발악했다.

상식적으로 다수의 인원이 동시에 공격하면 쓰러트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싸움이 진행될수록 바닥에 널브러지는 시체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병사들은 로만에게 상처를 입히기는커녕, 근처에 다가가는 족족 목이 날아가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브란트가 로만의 존재를 인식하고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세(現世)의 지옥이 펼쳐졌다.

풀썩.

끝났다.

마지막 병사.

헥토르의 병사가 고꾸라지는 모습에, 브란트가 창백한 얼굴로 로만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정체가 뭡니까?”

브란트의 상식으로는.

카이로 왕국 소속에, 이런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통성명은 짧았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에.

브란트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게릴라 작전을 한다는 게 정말 사실이었어?’

도날드 백작과의 연락.

제1 방어선을 버리라는 말은 남부 전선을 포기하자는 의미로 해석했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워프 게이트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지금, 헥토르 왕국의 병력을 상대로 남부 전선에서 버틸 방법은 없다.

산의 지리적인 이점? 그것도 말장난일 뿐이다.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분명히 산에 숨어든 잔당들을 처리하는 일에 애를 먹겠지만, 남부 산맥에는 요새로 사용할 만한 곳이 없다.

고로.

게릴라 작전은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

어중간하게 산의 이점을 활용하다가, 역으로 퇴로가 막혀서 적들에게 전멸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남았어. 충분히 도망칠 시간이 있었는데도, 남부 전선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면 도날드 백작에게 연락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어. 후방 진지의 워프 게이트가 점령당한 것을 알아채고 우리에게 도망치라고 말했었지.’

선견지명(先見之明).

로만의 판단은 옳았다.

물론 게릴라 작전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브란트는 로만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남아 주었기에,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알았다.

브란트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도날드 백작은 올바른 조언에도 사지(死地)에 남는 판단을 내렸고, 제1 방어선이 헥토르 왕국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전쟁은 끝났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제2 방어선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들 또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머리를 숙였다.

로만이 왜 혼자 다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게릴라 작전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기에, 브란트는 오히려 로만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포기하라는 의미인가?”

“맞습니다. 세상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얼마나 강한 검사인지는 방금 제가 직접 목격했지만, 헥토르 왕국은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남부 전선을 침략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감당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대로 산을 넘어 후퇴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 님을 욕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로만 드미트리 님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목격했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어쩌면.

브란트는 로만이 복수를 위해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혼자 움직일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수하들을 모두 잃고 복수를 한다는 가설이, 브란트의 상식으로는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현명한 판단이라.’

브란트의 조언.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이대로 물러난다고 할지라도, 로만이 피해를 받을 일은 없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아.’

애국심(愛國心)의 발로가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 출신이고, 자신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남부 전선이 헥토르 왕국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현장에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그 단 하나의 사실.

로만은 그따위 말이 현실에 남아 있길 바라지 않았다.

목숨을 걸 이유로는 같잖았다.

얻을 이득은 적고.

잃을 것은 많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태어나 정점에 오르는 과정에서, 백중혁은 단 하나의 사실을 알았다.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얕보이게 하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다.’

그뿐이다.

그래서 남았다.

그래서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란트의 눈빛에.

로만은 말했다.

“아니,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 *

전쟁이 발발하고부터 지금까지.

로만은 상황을 되짚었다.

‘헥토르 왕국은 유례없는 대기근으로 인해 나라의 사정이 매우 좋지 않다. 일반 백성들에게 먹일 식량도 떨어지는 판국에, 군량(軍糧)을 제대로 확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도 전쟁을 감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헥토르 왕국의 사정이 간절하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

간단한 문제다.

헥토르의 본심.

그들은 이번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런 전제라면 헥토르 왕국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남부 전선은 다른 곳에 비해서 척박한 땅이라서, 타국으로서는 무리하게 침략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헥토르 왕국은 남부 전선을 완벽하게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다. 단순히 국경을 넘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으로 눈을 속이고 워프 게이트를 점령했다. 완벽한 고립. 그들은 지금부터 어떤 거래를 하든 유지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전선 너머로.

상대의 의도를 읽었다.

헥토르가 빠른 시일 내로 전쟁을 끝내려 한다면, 사실 그들의 약점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낸 상태였다.

로만이 말했다.

“이번 전쟁은 매우 특수한 케이스다. 헥토르 왕국이 단번에 남부 전선을 점령하려고 한 것은, 헥토르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당연한 이유와 더불어 그들이 전쟁을 오랫동안 지속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목적이 있다. 헥토르의 목적은 나라의 어려움을 전쟁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고, 그렇기에 남부 전선을 완벽하게 점령해야만 카이로 왕실과 원활한 협상을 진행할 수 있겠지.”

“……그게 무슨.”

브란트가 눈을 부릅떴다.

로만의 말.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시도하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간단한 문제다. 헥토르 왕국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도 큰 이득이 없는 남부 전선을 공격했다. 지금도 백성들이 굶고 있는 헥토르가 남부 전선을 계속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그들은 지금 나라의 명운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벼랑 끝에서.

헥토르는 살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말라죽을 것이니, 굶어 죽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고로.

로만은 판단을 내렸다.

“우리는 남부 전선에서 헥토르 왕국의 병력을 모두 상대할 필요가 없다. 적의 숫자가 일만이라면 그중 백을. 단 1%의 성과만으로도 전쟁의 양상은 많이 달라지겠지. 헥토르 왕국은 내부에 남아 있는 우리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카이로 왕실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판단에 헥토르 왕국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전쟁에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헥토르 왕국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다.”

그 말에.

브란트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로만은 예사 인물이 아니었고, 선견지명을 보였던 것처럼 다른 시각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는.

로만의 계획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게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다.”

반문은 할 수 없었다.

의구심을 갖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브란트를 충격에 빠트렸다.

* * *

남부 전선 제2 방어선.

헥토르 왕국은 이미 공격을 시작한 상태였다.

“발사!”

투웅.

콰르르르르르릉!

플레어가 성벽에 작렬했다.

이미 수차례 시도된 공격에 일부 성벽은 무너졌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카이로의 병사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에드윈 헥토르는 조급하게 공격을 명령하지 않았다.

카이로 왕실과 연락을 끝낸 지금, 시간은 헥토르의 편이었다.

지금부터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계획은 완벽하다.’

일 년에 걸친 준비.

수도 없이 훈련했던 상황을 현실로 만들었다.

국경을 넘어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사이에, 제일 중요한 포인트였던 워프 게이트를 점령했다.

그것으로 전쟁은 끝났다.

탁상 위에서 계획을 논의할 때.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순간부터는 실패의 가능성이 없었다.

사실상 구부능선을 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부터는 안정적으로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고, 카이로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아 내면 끝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유리한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질 않았다.

‘내 계획에서 맥클리어리 남작의 죽음은 계산에 없었다. 제5 방어선은 남부 전선 최약체.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맥클리어리 남작이 죽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전력의 열세를 이겨 낼 정도의 변수가 된다는 의미일까.’

에드윈 헥토르는 항상 자신을 의심했다.

순탄하게 풀려 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판단에 오점이 없었는지를 되짚어 보며 변수를 차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수의 크기는 미약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3성 검사는 대세를 뒤집기에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제5 방어선 공략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조심해야 할 변수는 무엇이 있을까? 단언컨대 우리를 위기에 빠트릴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만 드미트리가 병력을 이끌고 우리에게 대항한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의 병력으로는 헥토르의 병력을 감당할 수 없다. 만약 패잔병의 증언처럼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면? 애를 먹겠지만 치명적인 변수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헥토르 왕국은 일개 개인에게 휘둘릴 만큼 나약하지 않다.’

제2 방어선을 공격하기 전.

에드윈 헥토르는 명령을 내렸다.

카이로의 잔당들을 처리하라는 명령.

혹시 그들이 로만에게 흡수될 것을 염려해서, 변수를 미리 차단하는 판단이었다.

의구심을 진실로 억눌렀다.

예민한 신경이 자꾸만 계획을 돌아보게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문제가 없다는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그때였다.

한 병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에드윈 왕자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떠났던 1중대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하나의 소식.

불길함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2중대와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3중대가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연락에.

에드윈 헥토르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변수.

불길함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