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615)

86화 두 번째 변수 (2)

남부 훈련소의 한 건물.

맥버니는 건물 벽을 뒤로 한 채,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후욱, 후욱.”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사슬로 촘촘하게 엮어서 만든 갑옷은 이미 다 뜯겨 나가 맨살이 드러난 상태였고, 쩍 갈라진 복부를 통해서 핏물이 줄줄 흘렀다.

그나마 내장이 흘러내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일반 사람들 같으면 한 손으로 복부를 틀어막았겠지만, 맥버니는 적들을 향해 검을 쥔 외팔을 겨누느라 복부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둬도 죽겠는데?”

“이만 포기하지? 그럼 고통 없이 죽여 줄게.”

헥토르의 병사들.

그들이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수는 세 명이었다.

그들은 맥버니를 둘러싸는 형태로 천천히 다가오며, 언제든 공격하겠다는 듯이 무기를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맥버니는 입이 바짝 말랐다.

현기증에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입 안의 살을 베어 물었다.

아득.

“좆 까, 이 개새끼들아.”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퍼져나갔다.

핏물도 물이라고, 약간이지만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누구라도 먼저 공격하는 새끼는 내 목숨을 걸고 반드시 죽여 주마. 그러니까 들어와 봐. 동료를 위해서 희생할 자신이 있으면, 제 목숨을 걸고 한번 공격해 보라고. 그 새끼의 목덜미만큼은 내가 직접 이빨로 물어뜯어 줄 테니까.”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독기로 번들거리는 눈빛.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 맥버니의 모습에, 헥토르의 병사들로서는 선뜻 공격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실제로 맥버니를 만만하게 보고 공격을 시도했던 병사는, 지금 차가운 바닥에서 식어 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을 삼켰다.

겉으로는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지금 그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로지 의지만으로 버티고 있었고, 헥토르의 병사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안전하게 시간을 끌었다.

‘오른팔만 멀쩡했어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건데.’

눈앞의 현실에.

절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서부 전선에서 활약할 때만 하더라도, 맥버니는 검 한 자루로 2~3명의 적을 거뜬하게 상대했었다.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것은 아니다.

전장에서 굴러먹으면서 터득한 실전 검술이었고, 상대의 예상을 넘어서는 공격적인 검법에 수많은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왼팔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몇 명 죽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당해 버렸다.

끝났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

맥버니는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사실에, 마지막으로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인상 깊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남부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제대로 된 귀족이었고,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전쟁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남부 전선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유일한 인물.

제5 방어선에 배정되었다고는 하나, 로만 드미트리라면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냈을 것 같았다.

궁금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황당하게도, 죽음의 끝자락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가족과 친구가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만큼 전장에 미련이 남았다는 의미겠지.’

꽉.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든 달려들 수 있도록.

복부에서 피가 흘러내리든 말든, 날카로운 눈빛은 상대의 허점을 찾았다.

그때였다.

콰앙!

“크악!”

“공격해!”

건물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 *

로만은 한발 늦었다.

남부 훈련소는 도착했을 때부터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방에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참혹한 광경.

아직 주변에서 소음이 들렸다.

적들이 전부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판단에, 로만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적의 잔당을 소탕하고 생존자를 구출하라.”

“알겠습니다.”

크리스를 비롯한 병사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로만은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병사의 유언대로 남부 훈련소는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 중에는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빠른 기동을 위해서인지 가벼운 가죽 갑옷만을 걸쳤다.

대부분은 카이로 왕국 병사들의 시체였다.

시체만 보더라도 헥토르의 기습적인 공격이 확실히 먹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감각을 확장하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맥버니?’

수많은 소리 중.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맥버니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고, 헐떡이는 목소리로 보아 상당히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았다.

곧바로 땅을 박찼다.

멀지 않은 거리의 건물.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상했던 그림이 펼쳐졌다.

“뭐, 뭐야?!”

“카이로가 벌써 지원 병력을 보낸 건가?”

헥토르의 병사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의 계산대로라면.

남부 훈련소에 지원 병력이 도착할 일은 없었다.

당장 최전방 방어 진지들이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도 없는 이곳에 지원 병력을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저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헥토르의 병사들이 적의를 보이며 무기를 겨누자, 로만은 그들과 맥버니를 번갈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아직 살아 있었군.’

맥버니는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두 발로 서 있을 힘은 있었다.

경악으로 물드는 맥버니의 눈빛.

그 눈빛을 뒤로하고, 로만은 적들에게 다가갔다.

‘이들은 생포한다.’

판단이 섰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다가오지 말라며 소리를 치는 그때, 로만은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서 나타났다.

확.

콰직!

헥토르 병사의 얼굴에 주먹이 작렬했다.

거칠게 피어오르는 핏물에 그의 동공이 풀려 버렸고, 로만은 그대로 쓰러지는 적의 혈을 점해 버렸다.

이로 인해 정신을 차리더라도 움직이지 못할 터.

헥토르의 병사 한 명이 분노하며 공격을 시도하려고 하자, 로만은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퍽!

작렬하는 주먹.

그리고 혈을 점하는 손가락.

순식간에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름 베테랑 병사들이었건만, 정말 찰나의 시간에 두 명이나 제압을 당해 버렸다.

마지막 한 명.

그는 도망치려고 했다.

동료들을 희생시키고 반대편 문으로 뛰어가던 그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존재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탁.

“커억.”

“내가 말했지. 한 명은 데려간다고.”

맥버니였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로만이 상대를 생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검으로 상대를 베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왼팔로 상대의 목을 졸랐다.

팔이 하나밖에 없어서 반발은 매우 거셌다.

하지만 맥버니는 이를 악물면서 끝까지 상대의 목을 졸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헥토르의 병사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털썩.

“하악, 하악.”

맥버니가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한계였다.

정신이 흐릿했고, 역한 기운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그의 시야로.

로만의 얼굴이 보였다.

“고생했다. 지금부터는 내게 맡기고, 잠시 쉬어라.”

쪼르륵.

로만은 맥버니의 육체에 포션을 뿌려 주었다.

고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전신에 퍼지는 포션의 기운에, 맥버니는 그만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남부 훈련소 주변을 모두 확인한 크리스는, 로만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12명의 적을 발견해서 그 자리에서 처리했고, 남부 훈련소의 생존자 5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베일 자작은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고 산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의외였다.

베일 자작.

브루스 남작과 마찬가지로 곧바로 도망칠 줄 알았던 그는, 나름 적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뿐.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그간 방심한 대가로 남부 훈련소의 병사들은 대부분 죽었고, 겨우 10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 살아남았다.

‘헥토르 왕국의 본대는 남부 훈련소를 공격하고 어디론가 떠났다. 생존자들의 말로는 적의 숫자는 최소 수백 명. 그들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을 사용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하나의 가능성.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적들의 목적이 어느 정도는 예상되었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판단 하나에.

수많은 목숨이 걸려있다.

그 말의 무게를 알기에, 로만은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헥토르의 병사들은?”

“한 건물에 모두 가두어 두었습니다.”

진실을 확인할 방법은 하나다.

로만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크리스, 지금부터 내가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건물 안으로 들이지 마라.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끼익.

쿵.

로만을 집어삼킨 건물의 문이 닫혔다.

* * *

건물 안.

헥토르의 병사들이 포박되어 있었다.

로만이 안으로 들어서자, 병사 한 명이 엉망이 되어 버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구질구질하게 살려 두지 말고 죽여라! 어차피 카이로의 겁쟁이들에게는 그 어떤 말도 해 줄 생각이 없다. 캬악, 퉷!”

걸쭉한 침이 발밑에 떨어졌다.

로만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상대의 말에 반응하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해 주지도 않았다.

다만.

싸늘한 얼굴로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한 명당 3분의 시간을 주겠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 이상의 시간을 허락할 수는 없다. 룰은 간단하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만약 3분 안에 원하는 대답을 말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 주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죽기 직전까지 끔찍한 고통을 맛볼 것이다.”

“이런 개새끼가!”

“죽여, 죽이라고!”

헥토르의 병사들이 발악했다.

로만은 담담히, 그들 중 한 명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이다. 헥토르 왕국의 목적은 무엇이지?”

“좆 까!”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병력.

애국심이 대단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시간이 흘렀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일방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시간이 끝나고, 로만은 상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3분 끝.”

툭.

혈을 눌렀다.

그때만 해도 헥토르의 병사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순간.

그가 눈을 부릅떴다.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며, 극심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크아아아아악!”

“그것을 나는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수라고 표현한다. 온몸의 근육과 뼈가 뒤틀리는 고통을 받다가, 아주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겠지. 너희들은 카이로 왕국을 공격한 적이다. 나는 그런 적을 곱게 살려 둘 생각이 없고, 유일하게 예외를 두는 경우는 내게 협조하는 사람뿐이다.”

옆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병사들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굳건했던 동료가 흰자를 드러내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전염시켰다.

“두 번째 질문. 너희들은 왜 남부 훈련소에 있는 거지?”

사신(死神)의 물음이었다.

병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항복을 외치고 싶었지만, 비밀 서약을 했던 순간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결국.

“3분 끝.”

“크아아아아아악!”

그도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이제는 마지막이었다.

로만이 다가오자, 세 번째 병사는 아직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이 이런다고 결과가 바뀔 것 같아? 이미 끝났어. 내 입에서 헥토르의 ‘작전’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너희들이 막을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고! 그러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카이로 왕국은 방심의 대가를 치를 것이고, 너희들은 그 치욕스러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테니까! 크하하하하하!”

웃었다.

공포를 감추기 위해 미친 듯이 웃었다.

순간.

로만은 그를 마주 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였다.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나는 너희들에게 처음부터 진실을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싶었을 뿐이지. 너희들이 그 정도로 확신을 가진 일이라면, 나는 한 가지의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지.”

당황하는 병사.

로만은 그에게 폭탄을 날렸다.

“후방 진지. 너희들의 진짜 목적은 그곳에 있다.”

그 말에.

병사는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대답 또한, 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으니까.

“이만 죽어라.”

툭.

혈을 눌렀다.

마지막 병사마저도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뒤로하고, 로만은 건물을 나섰다.

‘동시다발적으로 남부 전선을 공격한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만약 그들이 정말 작전에 성공한 것이라면, 남부 전선은 함락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사람들의 예상보다, 남부 전선은 훨씬 더 큰 위험에 빠졌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의 유출.

그것은 헥토르 왕국이 예상하지 못한 두 번째 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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