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615)

85화 두 번째 변수 (1)

스티븐이 한 병사를 소개했다.

“이 근방 토박이입니다. 주변 지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길잡이로 유용하실 겁니다.”

“코비라고 합니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병사였다.

로만은 코비의 인사를 받아 주고는, 주인을 잃은 지휘실로 자리를 옮겨서 테이블에 지도를 펼쳤다.

촤르르륵.

“남부 전선의 지도다. 후방 진지로 가기 위해서 가장 빠른 길이 어디지?”

“……후방 진지 말씀입니까?”

코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스티븐의 설명으로는 로만이 다른 방어선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방어선이어야 하는데, 갑자기 후방 진지를 거론하자 의문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적극적인 협조를 위해, 로만은 생각을 말했다.

“나는 남부 전선의 방어 진지들이 오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어느 한 곳이 무너져 뚫리고 말겠지.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방어 진지에 고립되어 버릴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먼저 후방 진지로 이동할 생각이다. 후방 진지의 병력과 합류한 이후, 방어 진지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할 것이다.”

“……아!”

코비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실리적인 판단이었다.

로만의 말처럼.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으로 남부 전선의 모든 위협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코비의 시선이 지도를 향했다.

후방 진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물색하던 그는, 한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길을 따라 이동하면, 빠르면 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후방 진지로 향하는 수많은 길 중.

가장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로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에게는 안전한 길을 추구할 여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시간이고, 도착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급경사와 장애물 같은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동할 필요가 있다.”

“으흠, 그렇다면 이 길은 어떠십니까?”

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처음 제안했던 길보다는 지형이 매우 험난했고, 경사를 계속 올라가는 대신에 산을 가로질러서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길이 3시간이었다면 이건 2시간 30분짜리.

이번만큼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리라 생각했는데, 로만의 표정에는 만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이 길을 통해 움직였을 때,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으로는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내 병사들은 어떠한 지형에서도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수준을 고려한, 2시간 안에 후방 진지에 도착할 수 있는 지름길이 필요하다.”

순간.

코비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

두 번의 의견 제시.

두 번의 대답.

길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로만의 반응에, 코비는 당황한 얼굴로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 * *

첫 번째 길.

그곳은 남부 토박이가 아니라고 해도 알 수 있었다.

지도만 보아도 뻔히 평지라는 사실이 보였고, 로만의 입장에서는 더 빠른 길을 요구할 만했다.

그런데.

두 번째 길은 아니다.

‘산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떻게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그건 단순한 예측이 아니야. 분명히 자신의 계산에 확신이 있는 발언이었고, 그렇다면 남부 전선의 지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그런데도 왜 굳이 나를 길잡이로 선택한 거지?’

의문이 들었다.

눈앞의 사내.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길을 이렇게 잘 아시는 줄 몰랐습니다.”

돌려서 물었다.

길을 잘 아는데도,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살짝 떠보는 발언에, 로만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덤덤하게 말했다.

“남부 전선으로 배치를 받고 한동안 이곳을 조사했다. 내가 2년간 생활할 전장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지형지물은 어떠한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많은 것을 공부했지. 나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들이 알 만한 기본적인 것들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발할라의 정보를 듣고.

로만은 루카스에게 남부 전선을 알아보라고 명했다.

그건 단순히 전쟁의 시그널만을 확인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모를 전쟁을 대비해서 남부 전선의 현황을 파악했고, 각 방어 진지로 통하는 여러 갈래의 길도 확인했다.

제5 방어선이 공격을 당했을 때.

로만은 1시간 남짓한 시간에 전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2시간이 걸릴 길을 전속력으로 달려서 빠르게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은 머릿속에 있는 지름길을 활용했다.

그리고.

최근에 맥버니로부터 정보를 받았다.

루카스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세밀한 정보였고, 덕분에 남부 전선의 길을 현지인만큼이나 잘 알았다.

로만의 대답에.

코비는 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박하다면, 여전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스티븐으로부터 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너는 내가 남부 전선에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아, 아닙니다.”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다. 상식적으로는 그게 정상의 범주니까. 내가 스티븐에게 남부 전선에 해박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문서를 통해 접한 정보와 실제 현실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확인한 정보는 두 번째 길이 2시간 30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약에 날씨가 좋지 않거나, 최근에 그 길에 이상이 생겼다면? 그건 분명히 문서로는 알 수 없는 현실의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겠지. 그런 이유로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말한 정보가 맞는지, 그리고 남부 전선의 토박이는 타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특별할 길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나?”

“예?! 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코비가 말을 더듬거렸다.

생각이 읽힌 기분이었다.

로만은 코비가 왜 물었는지를 알았고, 그의 의문을 충분히 해소함으로써 완벽한 도움을 바랐다.

로만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남부 전선에 많은 귀족이 배정되었지만, 로만과도 같은 인물은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안락한 생활을 보내려고 남부 전선으로 오는 귀족들과는 달라. 이분은 정말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분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남부 전선에는 분명히 희망이 생길 거야.’

확신이 생겼다.

코비가 지도를 살폈다.

그러더니,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지형지물에 상관없이 빠르게 이동할 자신이 있다면, 이 길이 최상의 선택지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마을 친구들과 비밀리에 사용하던 길인데, 우거진 수풀을 뚫고 이동하면 2시간 안에 후방 진지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만,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뎠다간, 가파른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회의의 끝을 알리는, 로만이 기다리던 유형의 대답이었다.

* * *

딱 10분.

회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로만이 지휘실을 나왔을 때는, 이미 로만의 병사들이 준비를 끝내고 도열을 마친 상태였다.

“크리스 외 30명. 준비를 모두 끝냈습니다.”

척척.

칼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바짝 군기가 들어 있는 병사들 옆에,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헨리 앨버트 외 50명. 준비를 모두 끝냈습니다.”

헨리였다.

그는 크리스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가 하는 행동을 따라 했다.

물론 기세에서부터 크게 차이가 났지만, 헨리는 나름 진중한 표정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로만이 물었다.

“넌 왜 거기에 있지?”

헨리의 존재.

달갑지 않았다.

병력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시간이 급한 상황에서 헨리를 따르는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첫 만남에 행패를 부리던 헨리 앨버트라면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헨리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드미트리의 실세가 될 사람과 미리 친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당장 꺼지라고 하겠지?’

헨리의 진심이었다.

그는 표정을 굳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적절한 연기였다.

“일단 전에 실수한 것은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염치 불고하고 로만 님을 따라가려는 이유는, 저 또한 카이로의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헥토르 왕국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카이로의 귀족으로서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이 한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하듯.

그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참으로.

같잖은 장면이었다.

로만은 헨리 앨버트가, 절대 아무런 목적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이 말했다.

“나를 따라오는 것은 네 자유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따라올 수 있을지는 네 능력에 달린 일이다. 하나는 확실하게 말해 두지. 만약에라도 내 계획에 네가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발목을 붙잡는 족쇄를 끊어 버리고 나아갈 것이다.”

섬뜩한 경고였다.

그 말을 끝으로.

로만은 홱 돌아섰다.

“크리스.”

“예.”

로만을 따라나서는 병사들.

이제는 길을 떠날 시간이었다.

* * *

로만의 경고에도.

헨리는 로만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금방 시야에서 멀어졌다.

평지에서도 로만을 따라잡지 못한 저질 체력인데,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는 지름길에서 제대로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동하면서 특별한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선두는 로만과 코비가 맡았고, 코비의 안내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사사삭.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확실히 일반적인 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었고, 코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런 길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이동하는 도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으으.”

사람의 신음이었다.

로만은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지름길과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들렸는데, 그래도 신음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

“남부 훈련소의 병사인데요?”

로만의 병사들이 단번에 알아보았다.

격렬했던 훈련.

맥버니의 지시를 받고 훈련을 통제하던 병사 중 하나였다.

그런데.

병사의 상태가 너무나도 처참했다.

공격을 받았는지 옷이 피로 물들었고, 창백한 얼굴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모습이었다.

로만이 빠르게 달려갔다.

병사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간단한 응급처치를 시도했고, 심각해 보이는 부위에는 포션을 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죽어 가는 모습에, 로만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병사가 흐릿한 눈동자로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눈동자의 초점이 돌아왔다.

상대가 로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는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남부 훈련소가 고, 공격을 받았습니다. 제,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발……!”

그 말을 끝으로.

몸이 축 늘어졌다.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고는, 그만 죽음을 받아들였다.

‘남부 훈련소가 공격을 당했다고?’

의외의 상황이었다.

남부 훈련소.

최전방 방어 진지보다는 후방 진지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이 공격을 당했다니.

로만이 제5 방어선을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다른 방어 진지가 뚫렸다는 소식은 들어 보지 못했다.

‘남부 훈련소의 병사가 여기까지 도망친 것으로 보아 최소 30분 전에는 공격을 당했다.

그 말은 방어선의 수성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결과라는 뜻이다.

헥토르 왕국은 다섯 개의 방어선을 동시에 공격하면서, 기동성이 빠른 부대를 움직여 공격을 감행한 것이 분명하다.’

대체 왜 그런 작전을 실행한 걸까.

시간상으로 말이 되지 않았고, 무엇을 얻으려는지 의도가 짐작되질 않았다.

순간.

로만은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내 예상대로라면, 남부 전선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헥토르 왕국.

그들은 무턱대고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철저한 준비 끝에, 이번 공격을 감행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만.

“일단 남부 훈련소로 가자.”

“알겠습니다.”

지금은.

남부 훈련소를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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