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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615)

83화 대비하지 못한 재앙 (4)

무모했다.

기발한 작전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적군을 뚫고 철책을 설치할 공간을 확보하겠다니.

이건 아니다.

작전을 생각한 스티븐으로서도, 로만을 만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일단 적군을 뚫고 성문까지 진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성 밖에서도 끊임없이 적군이 밀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고립이라도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철책을 설치하겠다는 전략은, 사실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처음 보는 사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5 방어선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기존의 예비 부대보다도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을지 눈에 훤했다.

지휘관인 브루스 남작마저도 전장을 버리고 떠난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우군이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그렇기에.

로만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브루스 남작 같은 사람은 살아남고, 그를 대신해 로만이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작전에 목숨을 버리는 얼간이가 아니다.”

훅!

뒤에서 적군이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로만은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해 버리더니 상대의 턱밑에 검을 쑤셔 박았다.

몸을 부르르 떠는 적군.

스티븐이 놀라서 눈만 껌뻑일 때, 옆으로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주군!”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크리스와 병사들.

그들은 피로 흠뻑 물들었다.

로만을 따라오는 과정에서 사망자는 없는 것 같았지만, 검날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는 상당히 많은 수의 적을 죽였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짐승과도 같았다.

전장(戰場)의 귀신들이 일제히 로만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에, 스티븐은 예비 부대에도 희망이 있음을 직감했다.

로만이 말했다.

“지금부터 성문까지 길을 뚫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무도 반문하지 않았다.

얼마나 위험한 작전인지.

작전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의도인지.

로만의 명령에 조금의 의구심도 가지지 않은 채, 병사들은 명령을 이행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맹목적인 신뢰.

감탄이 나왔다.

스티븐이 따르던 브루스 남작은 성문이 박살 나자마자 전장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로만의 병사들은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가겠다는 신뢰를 보였다.

대체 어떻게 저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스티븐의 상식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끈끈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이 앞서갔다.

아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에, 로만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서로의 역할에 집중해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로만은 적군을 향해 달려가더니, 앞길을 막아서는 적군들을 단숨에 도륙해 버렸다.

흩뿌려지는 피.

피의 길이 열렸다.

로만을 따라, 그의 병사들도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아!”

스티븐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넋을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로만의 결단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도 제 몫을 해야만 했다.

“2분대는 나를 따르라!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와 같이 비상용 철책을 옮길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스티븐.

지금부터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역할을 이행할 차례였다.

* * *

남부 전선으로 떠나기 전.

로만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애국심도 없는 이 나라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남부 전선.

정보에 따르면 헥토르 왕국은 분명히 전쟁의 시그널을 보내고 있었다.

타국인 발할라 제국은 그 신호를 읽고 로만에게 경고를 해 주었는데, 카이로 왕국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새카맣게 몰랐다.

한심할 정도로 멍청한 집단이었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건만, 네 갈래로 찢긴 중앙 정부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막말로.

로만은 카이로 왕국의 사람이라 할 수 없다.

평생을 백중혁으로서 살았기에, 카이로라는 나라에 대단한 애국심을 가질 이유가 존재하질 않았다.

‘전쟁을 회피할 방법은 많다. 베네딕트 후작의 손을 잡으면 국방의 의무는 면제될 것이고, 발할라 제국을 따라 강자의 편에 붙는 방법도 있다. 전쟁은 결국 힘이 없는 자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판. 카이로 왕국에서 내 가치를 인정받은 지금, 나는 강자로서의 특권(特權)을 얻었다.’

미지의 세계.

전장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른다.

하지만.

로만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눈앞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거나, 그들의 편이 되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다.’

전생.

백중혁의 위에는 쟁쟁한 형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장남의 영역을 침범할 만큼의 대단한 인물도 존재했지만, 그들은 단 한 번의 타협으로 장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겨우 한 번의 타협이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의지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무릎을 꿇지 않은 다리로는 끝까지 굳건하게 버틸 수 있지만, 한 번 꿇은 순간부터는 수긍의 편안함을 몸이 기억했다.

베네딕트.

발할라.

크로노스.

그리고 왕실.

카이로를 사분하는 네 개의 세력은 모두 로만을 바라지만, 로만은 그들에게 확답을 줄 생각은 없었다.

딱 선을 넘는 부탁을 할 수 없는 정도의 관계로.

로만은 본인에게 닥친 현실은 스스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군림(君臨)하리라는 목적이 있기에,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 사례는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드미트리가, 드미트리로서 남길 바랐다.

‘나는 남부 전선으로 떠난다.’

결단을 내렸다.

어려운 배경?

약소국의 현실?

그따위 조건들은 개의치 않았다.

천마라는 존재는 그보다도 어려운 상황에서 탄생했고, 결국에는 모두를 무릎 꿇리고 정점에 올랐다.

오히려 피가 끓었다.

전장에서의 삶.

그리웠다.

말년에 끝없이 이어지던 태평성대는, 강한 갈증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렇게.

로만은 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이미 패색(敗色)이 짙은 전투였다.

완전히 개방되어 버린 성문을 통해 헥토르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카이로의 병사들은 완전히 압도되어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전력의 차이는 극심했다.

헥토르의 병사 하나가 두세 명을 상대하는 상황에, 성문 주변은 어느새 헥토르 왕국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다.

모두가 알았다.

끝난 전투임을.

성문과 최대한 멀어지려는 병사들과는 다르게, 로만은 그들을 뒤로하고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확!

가장 먼저 달려든 다섯 명의 적군.

그들의 가슴이 동시에 갈라졌다.

로만은 하늘에 흩뿌려지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적으로 득실거리는 공간을 파고들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적진에 홀로 고립된 상황에 헥토르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로만은 사각에서 들어오는 공격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른쪽.’

훅!

창이 바람을 일으키며 옆을 지나쳤다.

로만은 창대를 잡아 상대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끌어오더니, 그대로 딸려온 병사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앞으로 치고 나가며 적들을 공격했다.

콰직.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분명히 방패를 들어서 막았는데, 헥토르의 병사는 두 동강이 나는 방패처럼 상체와 하체가 반대 방향으로 갈라졌다.

주변에 있던 적들의 반격은 먹히지 않았다.

로만은 계속 전진하면서도 적들의 공격을 흘리거나 막았고, 로만이 공격을 시도할 때는 반드시 죽음이 따라왔다.

열을 죽였을 때.

헥토르의 병사들은 서로를 믿고 달려들었다.

이십을 죽였을 때.

그들은 상대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삼십, 사십, 어느 순간부터 오십이 넘는 인원을 도륙하자, 그들의 표정이 공포로 물들었다.

“으으으!”

“저, 저 녀석을 어떻게든 막아 봐!”

난리가 났다.

단 한 명.

로만이 날뛰는 바람에 헥토르는 더 이상 밀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용기 있게 덤빈 병사들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었고, 로만은 아직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멈추지 않고 적들을 죽여 나갔다.

그건 단순히 오라의 힘이 아니었다.

로만은 오라를 제대로 발휘하지도 않았는데, 오라 검사를 뛰어넘는 무력을 보였다.

백중혁.

그는 아무런 힘이 없을 때부터 사람을 죽이는 법을 터득했다.

돌멩이로 상대의 머리를 부숴 버렸고,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백중혁이다.

밑바닥에서 정점까지.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했다.

지금에 이르러 절대적인 무력마저 얻은 백중혁을, 겨우 일개 병사들 따위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학살극(虐殺劇).

홀로 고립되는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많은 양 떼가 한 마리의 늑대를 제압하지 못하듯이, 로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적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만을 따라 도착한 병사들.

그들도 일반 병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었다.

헥토르의 병사 하나가 카이로의 병사 두세 명을 상대했다면, 로만의 병사들은 혼자서 대여섯 명을 거뜬히 상대할 정도로 능숙한 전투 능력을 보였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겨우 30명이다.

예비 부대는 전체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수인데, 그들의 활약으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헥토르의 지휘관이 지켜보고 있었다.

* * *

헥토르의 지휘관.

제5 방어선의 공격을 맡은 맥클리어리 남작은, 성문을 부서트릴 때만 하더라도 승리를 확신했다.

“쯧쯧쯧, 한심한 녀석들.”

웃겼다.

헥토르는 전력을 보내지 않았다.

일부의 병력만을 제5 방어선으로 보냈는데, 카이로 왕국은 그간 얼마나 안일했는지 이 정도의 공격도 버텨 내질 못했다.

적군이 다가오는데도 화살을 발사하지 않는 얼빠진 대응과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수성 무기들.

카이로 왕국은 전쟁 국가이면서도 황당할 정도로 한심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제5 방어선을 먼저 무너트릴 수도 있겠어.’

애초의 계획.

승패와는 상관이 없었다.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카이로라는 모래성은 알아서 와르르 무너져 주었다.

어차피.

다섯 개의 방어선을 모두 손아귀에 넣어야 했다.

간 보는 정도로 이런 성과를 얻는 것이라면, 맥클리어리 남작으로서는 전혀 나쁠 것이 없었다.

“공격하라! 제5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트려라!”

결단을 내렸다.

절호의 기회다.

이대로 방어선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에는 의도가 먹혔다.

성으로 밀고 들어가는 병사들이 내부를 점령하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도, 도망쳐!”

“뒤로 물러나!”

“으아아아악!”

헥토르의 병사들.

그들이 도로 밖으로 나왔다.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그들의 모습에, 맥클리어리 남작은 당황한 얼굴로 전장을 확인했다.

아직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 밖으로 빠져나오고는 있는데, 멀리서 보기에는 그들을 상대하는 카이로의 병사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의문이 일었다.

그때였다.

병사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공간이 열리며, 한 존재가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그건.

정말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카이로의 검사가 헥토르의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맥클리어리 남작은 그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섬뜩한 눈빛.

거리가 멀기에 눈이 마주친 것은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내가 갑자기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가 튀었다.

막아서는 족족 머리가 날아갔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시간에도, 사내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 날 죽이겠다는 건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상식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저 녀석이 더 날뛰기 전에 죽여라!”

“명을 받듭니다.”

앞으로 나서는 헥토르의 기사들.

그때만 해도.

맥클리어리 남작은, 아직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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