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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81/615)

81화 대비하지 못한 재앙 (2)

1시간 전.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

제1 방어선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카이로의 병사들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한가로운 표정으로 국경을 바라보았다.

근무는 언제나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시야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무뚝뚝한 부사수와의 경계 근무는 딱히 할 말도 없어 지루함이 배가 되었다.

결국.

사수는 지루함을 참지 못했다.

선임 병사는 바닥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숨 잘 테니까, 누가 오거나 근무 끝나면 말해.”

“알겠습니다.”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남부 전선에서는, 굳이 두 사람이 졸음을 참아 가며 국경을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후임 병사가 선임 병사를 다급하게 불렀다.

“이, 일어나십시오. 저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염병. 무슨 일…… 헉?!”

잠결에 일어난 선임 병사.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한소리 하려던 그는, 성벽 밖의 풍경을 확인하고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멀리.

제1 방어선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언뜻 보아도 무장한 병력이었고, 그들의 선두에는 헥토르 왕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사고 회로가 완전히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한 10초 동안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선임 병사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후임 병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지휘관님에게 연락해! 어서!”

“아, 알겠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가장 최전선인데도.

적의 출현이 지휘관에게까지 알려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병력이 제법 가까워졌을 즈음에야,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휘관이 헐레벌떡 올라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제1 방어선의 지휘관.

도날드 백작은, 창백한 얼굴로 국경을 확인했다.

보고대로였다.

헥토르 왕국이 진군하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벽을 공격할 것 같았다.

사실 매뉴얼에 따르면 곧바로 공격해야만 했다.

성벽에 준비되어 있는 수성 병기들을 활용해 적의 접근을 막는 것이 일차적인 대처인데, 우르르 올라온 병사들이 화살을 발사할 준비를 끝냈는데도 그는 선뜻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정말 카이로와 전쟁을 선포하려는 의도일까?’

헥토르와 카이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 헥토르 왕국은 최근에 나라 사정이 나빠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시국에 전쟁을 감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군사 훈련이거나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정말로 전쟁을 하려는 의도였다면, 이렇게 밝은 시각에 대놓고 깃발을 펄럭이며 진군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헥토르 왕국은 명분이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도 명분이 중요하듯, 나라 간의 전쟁에 명분은 반드시 필요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은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렸지만, 도날드 백작은 결국 명령을 입 안으로 삼켰다.

‘내가 괜한 명령을 내렸다가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건 일개 귀족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일단 헥토르 왕국이 깃발을 내세워서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우리와 대화할 의향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헥토르 왕국의 지휘관과 얘기를 나누어 보자. 그리고 그때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겠지.’

도날드 백작.

전쟁 경험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지휘관.

그는 결국.

“일단 활을 내려놓아라. 우리가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여 준다면, 헥토르 왕국도 대화에 응할 것이다.”

정말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 * *

헥토르 왕국.

그들은 대화 자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성벽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전장의 북이 울리며 일제히 돌격을 명했다.

둥! 둥!

“전국 돌격!”

“공격하라!”

타다다닥.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공성 병기를 앞세워 빠르게 달려들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이로의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부 전선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광경이다 보니, 눈앞에 닥친 현실이 정말 현실임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뒤늦게.

도날드 백작이 정신을 차렸다.

설마 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고, 지금부터는 살기 위해서 적들이 성벽을 넘어서는 걸 막아야 했다.

“모두 화살을 발사하라!”

“발사!”

파파파팍.

수백의 화살.

하늘 높이 올라간 화살들이 그대로 비처럼 적군의 머리에 쏟아졌다.

위협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적군은 얼마 죽지 않았다.

헥토르 왕국이 방패를 위로 올리며 미리 대비한 것도 있지만, 화살의 적중률이 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좋지 못했다.

대부분 멀리까지 날아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박혔고, 그나마 적에게 닿은 화살들은 방패에 막혔다.

그건.

훈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한 것도 있었지만, 병사 중 일부는 대낮부터 낮술을 마시는 바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들로서는 전쟁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결코 술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갑작스러웠고,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화살은 잘 발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엉망이었다.

성벽에 다가오는 동안 얼마 죽이지도 못했고, 성벽 여기저기서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했다.

“화살이 모자라.”

“얼른 화살을 챙겨 오라고!”

“마법 병기가 작동하지 않는데?”

“이런 빌어먹을!”

총체적 난국이었다.

화살을 미리 세팅하지 않은 탓에 일부 병사들이 화살을 가지러 뛰어갔고, 십수 년 전에 구매해 두었던 마법 병기는 먼지가 쌓인 채로 작동하질 않았다.

카이로가 그간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방심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서부 전선과는 다르게, 남부 전선은 안락함에 찌들어 최전방 국경 방어선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조차 놓치고 말았다.

결국.

척척.

성벽에 사다리가 걸렸다.

빠르게 올라오는 적군의 모습에, 도날드 백작은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명백히 불리한 상황.

제1 방어선의 힘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판단에, 그는 병사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예비 부대에 연락해! 예비 부대에 상주하고 있는 모든 인원을 제1 방어선으로 보내고, 왕실에는 헥토르 왕국이 기습적인 전쟁을 선포했다고 보고해! 한시가 급한 일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전쟁은 현실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방심의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

* * *

그 시각.

제5 방어선도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에, 헨리를 비롯한 병사들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이 찼다.

그렇지 않아도 한참을 걸었는데, 쉬지도 못하고 전력으로 달리려고 하니 현기증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제5 방어선과 예비 부대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간부의 설명에 따르면 걸어서 2시간 정도는 걸린다고 했으니, 그 말은 지금부터 최소 1시간은 죽도록 달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진짜 남부 전선 녀석들은 생각이 없는 건가? 예비 부대가 유사시에 빠르게 방어선을 지원하려는 목적이라면, 당연히 1시간 이상의 거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에라, 멍청한 새끼들.’

속에서 욕이 치밀었다.

불과 하루 전.

예비 부대가 한적한 곳에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던 헨리지만, 자신의 과거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다.

현실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헨리의 시야에는 로만과 그 병력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라면 금방 도착하겠지?’

전쟁 소식을 접한 직후.

로만은 병력을 이끌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헨리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데까지는 채 3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름 이를 악물며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헨리는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늘에서 다른 귀족들과 휴식을 취하며 열심히 훈련하는 로만 드미트리가 어리석다며 흉을 보았는데,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시작부터 체력적인 차이를 보였다.

그에 반해.

헨리는 물론이고, 그의 병사들은 헨리와 똑같이 숨을 헐떡였다.

다들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쉬지 않고 뛰려고 하니, 바짝 말라버린 입에 탈수 증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결국.

헨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부끄러운 건 잠시였다.

그는 현실에 타협하며,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욱, 후욱. 모두 멈춰! 후욱, 잠깐 쉬고 가자고!”

빨리 가지 않으면.

제5 방어선이 위험하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당장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헨리는 언제나 그렇듯, 그냥 발라당 드러누워 버렸다.

* * *

제일 먼저 공격당한 곳은 제1 방어선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함락의 위기를 맞이한 곳은 제5 방어선이었다.

쾅.

콰르르르르릉.

“성문이 뚫렸다!”

“막아!”

성문이 박살 났다.

강철로 만들어진 성문은 그간 관리 소홀로 인해 내구도가 매우 약해졌고, 헥토르의 병사들이 공성 병기로 몇 번 두드리자 문이 활짝 열렸다.

그때부터는 지옥의 시작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적군과 더불어, 성문을 통해 밀물처럼 밀려드는 적군들에 의해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제5 방어선의 지휘관.

브루스 남작은, 창백한 얼굴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여긴 끝났어.’

남부 전선의 파라다이스.

이곳에 그런 별명이 붙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브루스 남작은 썩을 대로 썩은 인물이었고, 청탁을 받아 안락한 삶을 제공하는 대신 제5 방어선의 인물들에게 군인으로서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한 위험성?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을 텐데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이번에도 베일 자작의 청탁을 받아서 전력에는 하등 쓸모없는 귀족들을 제5 방어선의 예비 부대로 배치한 그는,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렇기에.

그는 알았다.

예비 부대가 도착한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제5 방어선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다. 살기 위해서는 이곳을 버리고 도망쳐야 한다.’

판단은 빨랐다.

괜히 어물쩍거리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

브루스 남작이 소리쳤다.

“끝까지 위치를 지켜라! 이곳이 뚫리면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다들 목숨을 걸고, 절대 물러서지 마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자신은 목숨을 걸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시간을 끌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브루스 남작은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서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빠르게 도망쳤다.

“지휘관님!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직접 왕실에 연락할 생각이다. 그러니 시간을 벌어다오.”

중간에 브루스 남작을 붙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거짓을 말했다.

나중에 그들의 증언이 어떻게 돌아오든 말든, 일단 목숨을 구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브루스 남작은 뚱뚱했다.

평소에는 1분만 뛰어도 숨을 헐떡일 정도.

그러나 오늘만큼은 정말 빨랐다.

신속하게 제5 방어선을 빠져나온 브루스 남작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쉬지 않고 달렸다.

‘아예 후방으로 도망쳐야 한다. 후방 진지에 도착하면, 헥토르 왕국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겠지.’

얼마나 달렸을까.

그때였다.

브루스 남작의 시선에, 빠르게 달려오는 한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 선두에는.

바로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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