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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80/615)

80화 대비하지 못한 재앙 (1)

헥토르 왕국.

그들은 한때 크로노스 제국과 비견되는 강대국이었다.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던 그들은, 척박한 밀림 지대를 나온 발할라와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는 카이로 왕국과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어떤 결정을 하든 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대륙에 존재하는 6개의 왕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그들이.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왕궁에서, 비밀리에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 얼굴의 사내.

레인저(ranger) 부대의 대장 잭슨은, 헥토르 왕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이 알아 온 정보를 보고했다.

“지난 일 년. 레인저 부대는 카이로 왕국의 남부 전선을 총 48차례나 확인했습니다. 남부 전선은 5개의 방어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은 크로노스 제국과 대립이 있는 서부 전선을 방어하느라고 남부 전선은 아예 관심이 없는 상태입니다. 각 방어선의 경비는 보통 4시간의 간격으로 근무자를 교대하는데, 그간 헥토르 왕국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경비 인력과 경비 태도 모두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단언컨대, 남부 전선을 함락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무혈입성(無血入城)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몰래 수풀에 숨어 성벽을 확인할 때면, 꾸벅꾸벅 졸거나 술을 마시는 경비병들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오랜 옛날.

아직은 헥토르 왕국이 강대국이라고 불리던 시절에는, 카이로 왕국의 이런 안일한 태도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는 서부 전선에서만큼이나 긴장한 모습으로 국경을 지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헥토르 왕국이 힘을 잃어 가자, 카이로 왕국은 헥토르를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약소국.

침략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매일 외세의 침략에 벌벌 떠는 그런 곳이라고 말이다.

“아버지.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왕궁에는 헥토르 왕과 잭슨 외에 한 명의 사내가 더 있었다.

빨간 머리칼의 사내.

헥토르 왕의 외동아들인, 에드윈 헥토르였다.

“말하거라.”

“최근 5년, 헥토르 왕국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흉작(凶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땅은 가뭄으로 인해 말라서 비틀어졌고, 그나마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에는 강력한 바람이 불어 농작물을 모두 쓸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골든 뱅크에 빌렸던 돈은, 막대한 이자가 되어 우리의 숨통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 국고(國庫)는 바닥을 보인 지 오래고, 지금 이대로라면 왕국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나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헥토르 왕이 참담한 표정을 보였다.

선대 국왕.

그들은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겠지만, 패배로 인한 결과는 후손들이 그대로 떠안아야만 했다.

헥토르 왕은 완벽한 피해자였다.

그가 왕위(王位)에 오를 때부터 헥토르 왕국은 사정이 좋지 않았고, 아등바등 발악하면서 국가를 운영하던 것이 최근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하늘이 노했다고.

말라서 비틀어진 땅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결단을 내릴 때가 찾아오고 말았다.

에드윈이 말했다.

“발할라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헥토르 왕국의 역사는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전쟁을 멀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현재 절망에 빠진 국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만 합니다. 역사가 말하는 패배는 우리가 경험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일 년간 정말 많은 준비를 했고, 상대는 발할라 제국이 아니라 카이로 왕국입니다. 왕국을 위해서 지금은 결단을 내리셔야만 합니다.”

전쟁.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단어였다.

헥토르 왕은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반대로 신중한 성향을 보였다.

그렇기에 일 년이나 걸렸다.

전쟁이라는 안건이 올라오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저 사내가 정녕 내 아들이란 말인가.’

에드윈 헥토르.

그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강인했고, 한때 강대했던 헥토르 왕실의 핏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열망으로 타오르는 아들의 눈빛을 보며.

헥토르 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신이 있느냐?”

“예. 확실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알겠다.”

탁.

왕좌에서 일어났다.

헥토르 왕국은 벼랑 끝에 몰렸다.

난세(亂世)에 영웅이 탄생한다는 말처럼, 에드윈의 성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전쟁에 관련한 전권은 모두 에드윈 헥토르, 너에게 일임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마침내.

헥토르 왕국이 결단을 내렸다.

* * *

그 무렵.

남부 훈련소는 3주간의 훈련이 마무리되었다.

수백의 훈련생들을 앞에 두고, 베일 자작은 퇴소식의 지루한 연설을 맡았다.

“그동안 다들 고생이 많았다. 남부 전선은 서부 전선과는 다르게 전투가 일상처럼 벌어지는 곳이 아니다. 예비 부대에 편성된 이후로는 생각 이상으로 따분한 나날을 보내겠지만, 너희들은 엄연히 카이로 왕국을 수호하기 위한 군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방심은 재앙을 부른다. 남부 전선에서 보내는 너희들의 시간이, 평화로운 나날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매번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말.

베일 자작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퇴소식을 마무리했다.

퇴소식이 끝난 직후.

그는 로만을 따로 불러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휘실에서 달콤한 커피를 내온 그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자네는 오늘부터 제5 방어선의 예비 부대로 편성될 걸세. 아마 다른 귀족들이 하는 말을 들었겠지. 그곳은 남부 훈련소에 입소하는 모든 귀족이 배정되기를 바라는 파라다이스고, 군인으로서 자유가 제약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제일 안락한 삶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네. 그리고…… 크흠흠, 자네를 제5 방어선으로 보내기 위해서 내가 인맥을 조금 발휘했네.”

소문은 들었다.

그늘에서.

귀족들은 제5 방어선으로 노래를 불렀다.

남부 전선에서도 제일 편하기로 유명한 곳이니만큼, 아무런 인맥 없이 배정받기에는 힘들었다.

베일 자작은 보통 특별한 대가를 받고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먼저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고, 자신의 호의는 직접 밝혀야 직성이 풀렸다.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무슨. 나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네. 전에도 말했었지. 내가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고. 나는 자네가 남부 훈련소에서 안락한 삶을 보내고, 나중에 베네딕트 후작님의 사람이 되거든 ‘베일 프랑크 자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더라. 딱 그 정도면 된다네. 그러니까 남부 전선에서 지내면서 필요한 게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 주게나. 남부 훈련소의 지휘관이라는 직책은, 많은 일을 도와줄 수 있으니 말이야.”

익살스럽게 웃는 베일 자작.

로만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음에도 없는 만남을 마무리했다.

* * *

지휘실을 나오고.

로만을 찾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맥버니였다.

남부 훈련소의 총괄 교관인 그는, 평소와는 다른 표정으로 로만에게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실 남부 훈련소를 맡으면서 로만 드미트리 님처럼 훈련에 열정을 보여 준 귀족은 없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앞으로 더욱 열정적으로 훈련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준비했습니다.”

맥버니가 건넨 물건.

허름한 책과 지도였다.

로만이 무엇이냐는 눈빛을 보이자, 맥버니가 설명을 덧붙였다.

“남부 전선에 대한 정보와 지형지물을 정리한 것입니다. 정말 만약에. 남부 전선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필요한 정보일 겁니다. 물론 평화롭게 2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제일 좋은 상황이겠지요. 저 또한. 로만 드미트리 님이 몸 건강히 전역하시길 바랍니다.”

“고맙다.”

상대의 호의에.

로만은 웃으며 받아들였다.

순간, 맥버니는 심장이 뛰었다.

마음 같아서는 로만을 따라가고 싶었다.

한때 전사였던 사람으로서,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삶을 바칠 가치가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 따위는 방해가 되겠지.’

외팔이 불구.

좌수(左手)로는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조차 불가능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고, 이미 크리스와 케빈 같은 한눈에 보아도 걸출한 인재들을 밑에 두었다.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일 인분을 해내지 못하면 방해만 될 테니, 차라리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남부 훈련소에 남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의 대화는 끝났다.

로만은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제5 방어선의 예비 부대로 갈 시간이었는데, 로만은 맥버니가 멀어지자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얻어 내려고 루카스가 고생했다고 했었지.’

지도였다.

남부 전선에 대해 기록한 지도.

맥버니가 선물한 것과 매우 흡사했다.

사실.

로만은 맥버니의 선물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남부 전선으로 오기 전에 정보를 파악해 둔 상태였고, 그건 그다지 필요한 선물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웃었다.

정말 고맙다는 듯이.

지금도 기존의 지도와 같이, 품에 고이 챙겨 두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맥버니의 정성이기에.

로만은 순수한 호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 *

부대 배치가 끝났다.

각자의 부대로 이동하는 길에, 헨리는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걸이를 보였다.

‘내가 직접 내 발로 움직여야 한다니. 적어도 귀족들은 최소한 마차를 보급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발이 아팠다.

고생 한번 하지 않은 말랑말랑한 발.

굳은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발로 머나먼 길을 이동하려니, 벌써부터 땀이 흐르고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정을 부리며 마차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베일 자작의 인맥을 활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자신의 시야에 닿는 한 인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지금의 상황에 불만이 없는 모양이지, 한참 앞에서 병사들과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아. 내 신세가 어쩌다 이리됐을까.’

어제저녁.

베일 자작은 헨리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수도 없이 반복했던 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헨리. 특별히 너를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제5 방어선의 예비 부대로 편성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명심해. 이번 문제는 이 외삼촌의 미래가 달린 매우 중대한 문제고, 아무리 조카라 할지라도 일을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기증이 일었다.

제5 방어선 예비 부대로의 배정.

매우 좋은 소식이었다.

딱 그것까지였다면 웃으며 걸었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보낼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현실은 눈앞에 닥쳤다.

로만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

헨리는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갈증을 꾹꾹 참아 가면서 병사들과 같이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이나 이동하고서야,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풍경은 예상과 달랐다.

뎅뎅뎅!

“비상! 비상!”

“모두 출전을 준비하라!”

난리가 났다.

비상 신호가 울렸고,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병사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혹시 가상 훈련인가 싶었는데, 예비 부대의 간부가 다가와서 하는 말에 헨리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지금 남부 전선의 5개의 방어선이 모두 공격당했습니다! 헥토르 왕국. 그들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전쟁.

그 단어에.

헨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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