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615)

79화 남부 훈련소 (5)

사병 모집 공고를 확인한 날.

헨더슨은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되고 싶다.’

로렌스 광장.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헨더슨을 비롯한 사람들은 일상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평화를 짓밟으며 나타났다.

사람들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인 벤 마일즈가 로만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인 채로 질질 끌려왔고, 그 걸음에 따라 핏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로만은 벤 마일즈를 처형했다.

드미트리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블러드 팽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다.

그 모습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로렌스의 군중 중 하나였던 헨더슨은, 그렇게 사병 모집에 지원했다.

‘사병은 크게 대단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겠지.’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로만 드미트리 개인의 사병(私兵)이니 문턱이 높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겨우 턱걸이로 합격한 헨더슨이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다들 일반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리스와 케빈은 대전사 전투에서 보여 주었듯이 오라를 사용하는 실력자였고, 루카스와 푸키 같은 베테랑 용병들도 있었다.

완벽한 일반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헨더슨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훈련을 진행하며.

헨더슨은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이곳에서 도움이 될까?’

처음 몇 주.

헨더슨은 방황했다.

곧잘 훈련을 따라가는 다른 병사들을 보면서, 이곳은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말로.

눈앞에서 화살을 발사하는 테스트에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강심장들과는 달리, 자신은 오줌을 지릴 것처럼 덜덜 떨지 않았던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집단에, 나 홀로 초식동물인 것만 같았다.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국.

헨더슨은 크리스를 찾아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모실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다수를 위해서, 이것이 옳다고 믿었다.

크리스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이유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병사들과는 다르게, 저는 검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초보자입니다. 훈련 과정을 따라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가 특출나지도 않습니다. 평생을 농사만 하고 살았던 제가,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오만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수준이 떨어지기에 포기하고 싶다는 말인가?”

“예.”

로만을 만나기 전이였다면.

크리스는 헨더슨의 말에 수긍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내가 케빈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녀석은 눈에 독기밖에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솔직히 주군 정도 되는 사람이 빈민가의 어린 소년을 왜 거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 그런데 지금도 케빈이 그렇게 나약한 사람처럼 보이나? 아니. 그 짧은 시간에, 케빈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전사로 성장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웃긴 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주군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멋모르고 주군에게 덤볐다가 앞니가 모두 날아가 버렸지. 그때의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과거의 케빈과 현재의 케빈이 달라진 것처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도 주군의 가르침을 받아 달라졌다. 그런데 대체 뭘 걱정하는 거지? 주군은 널 사병으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의 너는 초라할지 몰라도, 나와 케빈이 경험한 것처럼 너 또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로만 드미트리. 우리가 모시는 주군은,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을 보유한 분이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케빈은 모두가 인정하는 독종이다.

그런데 그런 케빈조차도, 로만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빈민가 소년에 불과했었다니.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앞선 사례들을 들으며,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저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농사꾼 출신에 불과한 제가 남들처럼 강해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크리스님의 말처럼 주군의 안목을 믿어 보겠습니다. 그분이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저를 선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겠지요. 다시 훈련에 매진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따위 일로 크리스 님을 찾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날.

헨더슨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헨더슨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 * *

지난 몇 달.

헨더슨은 죽을 듯이 훈련에 매달렸다.

로만의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매일 훈련이 끝나고 토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훈련 도중에 기절하는 일이 발생할지라도.

헨더슨은 동료들을 따라잡기 위해 악에 받쳐 훈련했고, 결국 지금의 육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1년이라는 기간을 준비할 수 있었던 다른 병사들을 보면서, 헨더슨은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들은 대체 전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남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생사(生死)의 경계선에 떨어졌을 때, 그때도 전쟁을 준비한 기간이 짧아서 싸울 수 없다고 말할 건가? 한심한 새끼들. 1년이면 한 해 농사를 시작하고 수확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야. 그동안 안일하게 살아 놓고서 이제야 시간이 부족했다고, 징집병의 신분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한심한 핑계나 대다니.”

전쟁이 시작되면.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 했다.

징집으로 끌려왔을지언정, 본인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적어도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귀족들의 병사는 어떤가?

그들은 최소한의 자격조차도 갖추질 못했다.

그래 놓고도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헨더슨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1년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던 너희들에게는 오늘의 훈련이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현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에게 투정을 부릴 것이 아니라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지 않나? 대체 왜. 우리에게 너희들과 같은 수준이 되라는 같잖은 부탁을 하는 거지?”

로만은 말했다.

이번 남부 전선행.

전쟁을 각오하라고.

헨더슨을 비롯한 로만의 병사들은 정말 실전 같은 훈련에 임했고,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언제 전쟁이 발발해도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다.

그렇기에 다른 병사들의 반응을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 그들은 한심할 정도로 현실을 낙관했다.

헨더슨의 말은 공격적이었다.

다른 귀족의 병사들.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헨더슨의 준비 기간이 반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들로서는 뭐라고 따질 말이 없었다.

“병신들.”

걸음을 돌리는 헨더슨.

오늘의 일을 겪고도 저들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헨더슨은 내일도 모레도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주군의 뜻이기에.

로만의 병사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 * *

훈련은 계속되었다.

극한의 체력 훈련.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로만의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끝까지 훈련에 임했다.

다른 병사들과의 격차는 심했다.

압도적인 차이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일까.

훈련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쟤들은 왜 저렇게까지 오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곳이 시도 때도 없이 전투가 벌어지는 서부 전선이라면 모르겠지만, 남부 전선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하여간 저런 녀석들 때문에 우리 애들만 고생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태생이 천박하면 의미 없는 곳에 힘을 빼기 마련입니다.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드미트리 가문이 어디에서 인정을 받겠습니까?”

“맞습니다, 하하하!”

그들은 대놓고 로만을 조롱했다.

같잖았다.

남부 훈련소는 귀족들의 세계에서 2년간 휴양을 보내는 곳으로 유명한데, 대체 왜 이곳에서 저렇게 아득바득 훈련을 받는단 말인가.

차라리 서부 훈련소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공을 세우면 그만한 보상이라도 받는다지만, 남부 훈련소는 애초에 귀족들에게 훈련을 강제하지 않는다.

땡볕 아래에서.

로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병사들과 같이 훈련을 받는 그의 모습을 보니,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늘에 있는 귀족 중에는.

헨리 앨버트도 있었다.

로만을 조롱하는 귀족들과는 다르게, 그로서는 로만을 볼수록 걱정만 앞섰다.

‘……대체 저런 녀석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 내라는 거지?’

참.

특이한 인물이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향락에 관심이 있다면 그걸로라도 대화의 물꼬를 터 보겠지만, 남부 전선에서 쓸데없이 땀을 빼 가며 훈련에 임하는 녀석이다.

자신과는 애초에 생각 자체가 달랐다.

솔직히 외삼촌인 베일 자작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다른 귀족들과 신나게 흉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앞으로 저런 녀석과 같은 부대에 배정된다고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안전 과민증이라도 있는 건가? 좀 남부 훈련소에 왔으면 같은 귀족들끼리 대화도 나누고 친목도 다지면 얼마나 좋아. 하여간 평민 출신들은 여유를 모른다니까. 에라,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늘에 벌러덩 누웠다.

햇볕이 뜨거웠다.

멀리서 병사들이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늘의 서늘함 속에서 눈을 붙였다.

단잠을 자고 나면.

아마도, 이 지루한 훈련은 끝나 있을 것이다.

* * *

그 시각.

남부 전선 제1 방어선.

높게 쌓아 올린 성벽 위로, 카이로의 병사들이 국경을 주시했다.

“어후, 피곤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 2분대 애들이랑 밤새 카드를 치느라고, 겨우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어.”

병사가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을 보였다.

그는 국경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슬쩍 성벽 아래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더니, 허리춤에 매달린 수통을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착.

코끝을 자극하는 알코올 냄새.

옆에 있는 병사가 놀라서 물었다.

“설마 술을 챙겨 온 거야?”

“설마는 무슨. 수통에 술을 담아 오는 게 하루 이틀 있는 일이냐. 넌 좀 고지식한 면을 버릴 필요가 있어. 어차피 누가 오지도 않을 이곳에서, 술을 좀 마신다고 별일 있겠어? 그리고 오히려 이게 일의 능률을 위해서 좋아. 졸려서 국경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술을 조금 마셔서 정신을 차리는 게 낫잖아.”

“하지만…….”

“안 마실 거면 말아라. 나만 마시지, 뭐.”

꿀꺽꿀꺽.

병사가 술을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자극적인 느낌.

크으, 하며 감탄사를 내뱉는 병사의 모습에, 결국 같이 근무를 서는 병사도 욕구를 참질 못했다.

“나도 한 입만.”

“그럼 그렇지.”

남부 전선.

그곳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오랜 평화는 안일한 마음을 낳았고, 이렇게 수년을 근무하면서도 큰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국경에서 수풀이 우거진 곳.

술을 마시는 동안, 그곳이 눈에 보일 정도로 들썩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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