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615)

78화 남부 훈련소 (4)

맥버니는 생각했다.

혹시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남부 훈련소의 시스템을 몰라서 같이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기에, 맥버니는 로만에게 다가가 물었다.

“로만 님. 남부 훈련소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훈련을 강제하지 않습니다. 훈련을 받지 않길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늘에서 훈련을 지켜보셔도 괜찮습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훈련을 받아야 하는 줄 알고 땡볕에서 기다리다가, 다른 귀족들의 모습에 차별대우하는 것이냐고 가문을 들먹이는 부류들.

맥버니는 그런 쓰레기들을 질리도록 보았다.

베일 프랑크 자작은 남부 훈련소에 한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맥버니와 같은 교관은 교육생들에게 반말조차 할 수 없었다.

무늬만 총괄 교관일 뿐.

맥버니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저들 때문에 하는 말인가?”

로만의 시선이 그늘을 향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대화를 하는지보다는, 서로 재밌는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맥버니.

그로서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훈련을 받을 것이다.”

로만은 진실을 알고도 그늘로 가지 않았다.

남부 훈련소의 귀족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남부 전선은 전쟁도 잘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명령만 내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쟁이야 병사들이 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은 먼발치에서 전장을 구경하는 지휘관의 삶이겠지만, 실제로 전쟁을 경험해 본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맥버니를 바라보며.

로만은 덤덤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네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전장에서 적들의 공격은 신분을 가려서 피해 가지 않는다. 귀족이라 할지라도 기초적인 훈련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저들은 지금 명령권자인 지휘관은 안전하리라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다. 평야에서의 전쟁은 대체로 안전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전쟁에서 대패하여 쫓기는 상황이라면, 아니면 후방으로 돌아 들어온 적의 공격을 받는다면. 귀족은 나약한 체력으로 인해 제대로 된 명령은커녕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전쟁은 평야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산, 강, 늪지대 등등.

다양한 지형에서 지휘관이 제 역할을 하려면, 최소한 병사들을 따라갈 체력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남부 훈련소의 훈련을 병사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남부에서 오랜 시간 머문 너희들의 경험을 전수받는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니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훈련을 받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신분을 떠나 어떤 훈련이든 받을 준비가 되었다.”

말을 끝냈다.

이제는 어서 훈련을 진행하라는 듯이.

가만히 서서 맥버니를 지켜보는 그 모습에, 맥버니는 순간 심장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

로만 드미트리.

맥버니는, 눈앞의 남자에게 반하고 말았다.

* * *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던가.

하루 전날만 하더라도.

맥버니의 의욕은 바닥에 떨어졌다.

훈련 교관으로서의 회의감이 대단했는데, 로만의 말을 듣고 나니 자부심이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내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

처음이었다.

귀족의 신분으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훈련에 충실히 임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건 말만 번지르르한 생각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오래 굴러먹은 맥버니로서는 사람의 눈빛만 봐도 상대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고, 로만의 차분한 눈빛은 전쟁을 모르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에.

의욕이 살아났다.

로만과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의 교육을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적당히 타협해서 훈련을 진행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야. 최고 난도의 훈련을 진행해 주지. 만약에 정말 남부 전선에 재앙이 들이닥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체력과 군사적인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어.’

그 결정 하나로.

지옥문이 열렸다.

1주 차 훈련.

체력 훈련 기간이다.

원래는 간단한 구보로 몸을 푸는데, 시작부터 군장을 메고 산을 타는 기동 훈련이 진행되었다.

“본 훈련의 목적은 단순히 체력 증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발발하는 전쟁은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고, 때에 따라 무거운 군장을 메고 산을 타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번 훈련을 통해 체력을 단련시킬 뿐만 아니라, 산에서는 어떻게 해야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터득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매일 한 번. 날씨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산을 타게 될 것입니다.”

타다닥.

수백의 병사들.

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산을 내달렸다.

가파른 산을 그냥 올라가는 것도 죽을 맛인데, 군장까지 메려니 자꾸만 현기증이 돌았다.

산악 훈련은 시작일 뿐이었다.

오전부터 체력을 완전히 소진한 병사들은,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는 곧바로 훈련장에 집합했다.

“이번 훈련은 기초 체력 단련입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정신력의 싸움입니다. 아침 해가 뜰 때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끝까지 싸우기 위해서는, 체력 훈련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도 때도 없이 시험해야만 합니다. 지금부터 개수를 제한하지 않는 무한 베기 훈련을 진행하겠습니다. 미리 경고하지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하는 인원은 수면 시간을 제한해서라도 연장 훈련을 진행하겠습니다.”

“아.”

“씨발.”

훈련장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일반 병사들로서는 교관의 명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들에게 닥친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맥버니의 경고는 허언이 아니었다.

땡볕에 병사들이 쓰러지고.

일부는 게거품을 물며 몸을 부르르 떠는데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훈련을 진행했다.

‘전장에서는 이보다도 더 잔인한 상황을 일상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남부 전선이라도 예외는 없다.

맥버니는 로만의 말에 감격을 받은 만큼, 서부 전선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알려 주고 싶었다.

“우웩.”

“제, 제발 좀 쉬면서 합시다.”

죽어 가는 병사들.

그들은 징집병이다.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아 보지 못한 병사들로서는,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훈련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면 훈련은 중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로만의 병력.

그들은 로만을 필두로, 처음부터 끝까지 훈련을 완벽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 * *

훅!

검을 휘둘렀다.

벌써 수백 번 반복하는 동작.

햇볕에 피부는 빨갛게 달아올랐고, 전신은 땀으로 흠뻑 물들었지만 로만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로만은 온전히 육체적인 훈련에 몰입했다.

사람들은 그런 로만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남들처럼 그늘에서 쉬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병사들과 같이 훈련에 임했다.

‘싸우기 전에 검을 제련하듯, 나와 병사들의 결속력을 다질 필요가 있다.’

천마 백중혁.

그는 처음부터 정점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 아니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고, 그렇기에 명령을 받는 사람들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졌는지를 알았다.

불만은 정말 사소한 것에서부터 싹을 텄다.

오늘처럼 병사들이 땡볕에서 죽을 듯이 훈련하는데,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그늘에서 시시덕거리며 수다나 떨고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당연히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게 당장 반란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명령의 무게가 전보다 가벼워지게 된다.

만약.

같이 훈련에 임한 지휘관과 그렇지 않은 지휘관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병사들은 어떤 지휘관의 명령에 충실할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차이다.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지휘관보다 같이 고생한 지휘관의 명령을 더 따를 수밖에 없고, 그런 차이로 인해 전쟁의 결과가 뒤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무조건 밑바닥에서 같이 뒹굴라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완전한 신뢰가 형성될 때까지는.

그리고 그 행동이 전쟁에 충분한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승리를 위해서 지휘관이 직접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복합적인 이유였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병사들과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백중혁은 오늘과 같은 시간을 피하지 않았다.

항상 최전방에서 병사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백중혁의 모습에, 마교인들은 맹목적으로 그를 따랐다.

무림 정벌.

개인의 무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져진 백중혁과 마교의 결속력은, 중원 무림이라는 거대한 산을 단번에 무너트렸다.

“후욱, 후욱.”

“우욱.”

로만의 병사들.

그들은 당장에 죽을 것 같은 얼굴을 보였다.

다른 병사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포기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로만의 모습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지휘관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대체 어떻게 병사들이 포기한단 말인가.

주변에서 다른 귀족들의 병사가 우르르 무너졌다.

그들은 바닥에서 숨을 헐떡이며 몰래몰래 휴식을 취했지만, 로만의 병사들은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그날.

훈련이 끝날 때까지.

결국, 로만의 병사들은 단 한 명도 낙오되지 않았다.

* * *

첫날 훈련이 종료되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진 시간.

훈련을 마친 병사들은, 달빛이 비치는 개울에 나와 간단하게 몸을 씻었다.

쏴아.

“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

“남부 훈련소의 훈련이 만만하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어. 첫날부터 이렇게 굴린다는 말은 없었잖아.”

투덜거리는 병사들.

그나마 로만의 병사들은 아직 표정에서 생기가 맴돌았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기 때문일까.

근처에서 몸을 씻던 다른 귀족의 병사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왜 너희 입장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좀 적당히 못 할 수도 있었잖아.”

훈련 내내.

그들은 로만의 병사들 때문에 대놓고 휴식을 요구할 수 없었다.

모두가 감당하지 못하는 훈련이라면 맥버니도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훈련을 수행하는 존재들이 있으니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바닥에서 숨을 헐떡이며 로만의 병사들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그들의 강인한 체력은 분명히 수년간에 걸쳐서 완성된 것일 텐데, 억지로 차출되어 남부 훈련소로 끌려온 병사들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그런 이유로.

멀쩡한 로만의 병사들을 보며 짜증이 일었다.

마침 개울에서 만난 김에, 다른 귀족의 병사는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너희들과는 다르게 징집으로 선별된 병사야. 훈련 기간이 짧은데, 대체 어떻게 너희들과 똑같이 높은 강도의 훈련을 버텨 낼 수 있겠어? 우리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너희들처럼 할 수 있었다고.”

그때였다.

그 말에.

로만의 병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듣다 보니까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얼마나 훈련을 받았기에 우리에게 충분한 훈련 시간을 말하는 거지?”

병사의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몸을 씻기 위해서 상의를 탈의한 병사.

달빛에 비춘 그의 몸은 조각과도 같았다.

오랜 시간 몸을 단련한 모양인지, 쩍쩍 갈라진 근육은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흠칫 놀라는 타 귀족의 병사.

상대의 기세에 살짝 짓눌렸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우리는 겨우 1년밖에 훈련을 받지 못했어. 수년간 전문적으로 훈련받았을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그러니까 살살 좀 해. 그래야 맥버니 교관도 훈련의 강도를 낮추지.”

1년.

짧지만은 않은 기간이었다.

로만의 병사가 웃었다.

1년 전부터 훈련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니, 상대의 말이 어리광처럼 들렸다.

지난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로만의 병사로서는 곱게 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는 변명은 하지 마. 우리는 너희들처럼 1년이라는 시간조차 없었어. 우리가 처음 한 소속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았어. 아니, 정확히 훈련 기간만 따지면 3개월을 간신히 넘기겠지.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준비하지 못했다고? 착각하지 마. 너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야.”

병사의 정체.

그는 사병 모집의 합격자였다.

테스트를 보면서 겁에 질려 벌벌 떨었던 일반인 출신 병사.

그의 이름은 바로.

로렌스 출신의 헨더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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