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615)

76화 남부 훈련소 (2)

다음 날.

로만은 예정대로 남부 훈련소에 입소했다.

전장에 투입되기 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과정이었고, 로만을 비롯한 여러 귀족이 각자의 사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귀족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못했다.

이들 중에 자진해서 입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약 그 정도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면, 남부 전선으로 빠지는 편법이 아니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서부 전선으로 향했을 것이다.

입소식이 시작되자.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남부 훈련소의 지휘관인 베일 프랑크 자작이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남부 훈련소는 남부 전선에 배치되는 병사들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가르치는 곳이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3주간의 훈련을 받고, 예비 부대에 편성되어 남은 복무 기간을 보내게 될 예정이다.”

기본 훈련과 예비 부대 편성.

그 과정은 서부와 남부 모두 동일하다.

다만.

남부의 병력은 예비 부대에 편성된 이후로 전장으로 나갈 일이 전무한 반면, 서부의 병력은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전투로 인해 사실상 예비 부대로서의 의미가 없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돌았다.

주인을 잘 만나 남부로 간 병사는 살이 뒤룩뒤룩 쪄서 돌아오지만, 서부로 떠난 병사는 몸 성히 돌아올 수 없다고 말이다.

극과 극.

입소식의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전장의 비장함이 감돌기는커녕, 귀족들은 베일 자작의 말이 지루한지 하품을 쩍쩍 내뱉었다.

“남부 훈련소에서 지내면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너희들이 입소하기 전에 어떤 신분이었든 간에, 이곳에서는 병역의 의무를 행하는 병사일 뿐이다. 남부 훈련소의 규율을 어기고 무단으로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 벌로 서부 전선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참 웃긴 말이었다.

벌이라는 게 서부 전선 배정이라니.

황당한 사실은, 그 협박이 먹힌다는 것이었다.

남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일반 귀족들로서는 상상조차도 싫은 일이었고, 그래서인지 조금은 입소식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설은 짧았다.

할 말을 모두 끝내자, 베일 자작은 병력을 해산시켰다.

“모두 배정된 숙소에서 짐을 풀도록. 훈련과 관련한 일정은 저녁에 따로 통보하도록 하겠다.”

입소.

지금부터는 남부 훈련소에 소속되었다.

로만은 다른 사람들처럼 숙소로 이동하려는데, 병사 한 명이 다가와서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지휘관님이 따로 보자고 하십니다.”

베일 자작.

연설 내내 눈이 마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은, 로만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 * *

지휘실에 들어서자.

로만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입소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베일 자작의 환한 웃음이었다.

“어서 오게나! 남부로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고?”

“예. 별문제 없었습니다.”

“일단 이리 앉게나.”

드르륵.

베일 자작이 손수 의자를 하나 빼 주었다.

어색할 정도의 친절함이었다.

로만은 베일 자작이라는 사람을 난생처음 보았건만, 베일 자작은 오래된 인연인 것처럼 행동했다.

“자네가 남부 전선에 배치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설렜는지 아나?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 왕국의 최연소 랭커! 캬아. 드미트리에서 잠룡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내가 다 들뜨더라고. 아차차, 커피 괜찮지?”

“예.”

베일 자작은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만들었다.

보통은 병사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직접 움직이며, 자신과 로만이 마실 커피를 한 잔씩 만들었다.

지휘실은 금방 커피의 달콤한 향으로 물들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로만의 앞에도 커피를 한 잔 내려놓았다.

탁.

“마시면서 듣게나. 사실 내가 자네를 따로 부른 이유는 한 가지 사실을 물어보기 위해서라네. 소문에 의하면, 자네를 남부 전선에 배치하기 위해서 베네딕트 후작님이 힘을 썼다고 하더군. 그게 정말 사실인가?”

일방적인 호의에는 목적이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커피를 마시는 베일 자작이었지만, 로만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열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의도로 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립을 추구하는 로만으로서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예. 따로 부탁드린 것은 아니지만, 베네딕트 후작님이 그리 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베일 자작의 표정이 환해졌다.

사실 그는 진실을 어느 정도 확인한 상태였다.

그래도 로만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고,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단 말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내 본론을 말하겠네. 나는 베네딕트 후작님에게 잘 보이고 싶다네. 남부 훈련소가 그리 나쁜 곳은 아니지만, 중앙 정부에서의 호화스러운 삶에 비할 바는 아니거든. 그렇기에 베네딕트 후작님이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자네를 남부 훈련소에서 지내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최대한 배려해 주겠네. 내가 많은 것을 요구할 생각은 아니라네. 딱 하나. 나중에 베네딕트 후작님을 만나거든, 남부 훈련소에 베일 프랑크 자작이라는 사람이 편의를 봐주었다더라. 그 말만 해 주면 된다네.”

상당히 노골적인 발언이었다.

베일 프랑크.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변방 출신인 그는, 언제고 중앙 정부에 입성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런데.

그동안은 아무리 발악해도 방법이 없었다.

남부 훈련소는 수많은 귀족 가문들로부터 청탁을 받는 위치지만, 베네딕트 후작은 그런 급으로 어떻게 비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중앙 정부의 핵심.

베일 자작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고, 쥐뿔도 없는 그가 중앙 정부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치트키가 필요했다.

바로.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치트키가 말이다.

‘베네딕트 후작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언제고 로만 드미트리가 베네딕트 후작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남부 훈련소에서 연을 맺었던 나를 중앙 정부로 이끌어 줄 수 있겠지. 이건 기회다. 흔히 찾아오지 않는, 중앙 정부로 입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목적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이건 거래였다.

남부 훈련소의 안락한 삶을 대가로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되는 거래.

남부 전선.

그곳은 지휘관마저 썩어 버린 곳이었다.

대놓고 부정 청탁을 의뢰하면서도, 베일 자작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감정이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재밌네.’

웃음을 머금었다.

베네딕트 후작과 베일 자작.

앞으로 평생을 같이할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은, 굳이 주겠다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자작님의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딱 그 정도.

로만은 선을 지키며,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 * *

지휘실을 나온 로만.

이만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가는 도중에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여기 있었구나!”

헨리 앨버트였다.

여관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인물.

황급히 도망쳤을 때와는 다르게, 헨리 앨버트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깐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에게 사과를 할 정도로 잘못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막말로 드미트리는 겨우 변방의 남작 가문이잖아. 앨버트 가문의 차남인 내가 여관을 사용하겠다는데, 그게 아니꼽다고 싸우자고 달려드는 게 말이 돼?”

어제저녁.

헨리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화가 났다.

가문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그인데, 겨우 남작 가문의 사람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로만이 최연소 랭커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드미트리 가문은 평민 출신에 태생이 천박한 집안이고, 자신과는 다르게 진정한 귀족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밤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일만 되기를 기다렸다.

남부 훈련소에 입소하면, 로만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무덤덤한 로만의 반응에.

헨리가 발끈하며 몰아붙였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내 어머니가 본래 어느 가문 출신인 줄 알아? 바로 프랑크 가문이야. 이제 슬슬 네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겠지. 그래, 남부 훈련소의 지휘관인 베일 프랑크 자작님이 바로 내 외삼촌이라 이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사과해. 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잘못했다고 말하면, 특별히 외삼촌에게는 이번 일을 말하지 않도록 하지.”

그가 믿는 배경.

그것의 정체는 베일 자작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제아무리 최연소 랭커라지만, 남부 훈련소에 입소한 이상 지휘관 백은 무시할 수 없을 터.

헨리 앨버트는 당당했다.

이번만큼은.

본인의 승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래서?”

“……응?”

“네 외삼촌이 남부 훈련소 지휘관이라서 뭐 어쩌라는 거지?”

“너, 너 사, 상황 파악이 안 돼? 입소식 때 외삼촌이 분명히 말했잖아. 입소식의 규율을 어긴 사람은 서부 전선으로 보내 버리겠다고. 그 규율은 단순히 군인의 의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외삼촌의 눈밖에 벗어난 녀석들. 예를 들면, 너 같은 녀석들도 그 범위에 포함되는 거라고!”

당황스러웠다.

외삼촌의 정체를 알고도 당당한 반응이라니.

식은땀이 살짝 흘러내렸다.

로만이 또다시 검을 뽑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서부 전선으로 가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잘 모르나 본데. 네가 3성의 오라 검사라 할지라도 죽는 건 한순간이야. 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내가 외삼촌을 불러올 테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당당한지 한번 보자.”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그때까지만 해도.

헨리 앨버트는, 자신의 외삼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 * *

“외삼촌!”

헨리의 등장에.

베일 자작은 활짝 웃었다.

“어이구, 조카 왔어?”

헨리 앨버트.

일반인들에게는 안하무인의 쓰레기일지 몰라도, 베일 자작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조카였다.

특히 헨리의 엄마, 베일 자작의 여동생을 꼭 빼닮았다.

갈색 머리칼에 익살스럽게 생긴 외모는, 헨리를 바라보는 베일 자작의 눈동자에서 꿀물이 뚝뚝 떨어지게 했다.

“그런데 우리 조카가 왜 이렇게 울상일까?”

뒤늦게.

헨리의 표정을 확인했다.

베일 자작의 물음에, 헨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러움을 토로했다.

“외삼촌. 외삼촌은 내가 남작 가문 출신 따위에게 목숨을 위협당했다면 어떻게 할 거야?”

“뭐?! 어떤 개자식이 널 위협했어?”

벌떡.

베일 자작이 자리를 박찼다.

어여쁜 조카를 위협한 자식이라니.

설명을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벽면에 걸려 있는 검집을 챙기더니 헨리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지금 당장 그 개자식에게 안내해. 감히 남부 훈련소에서 내 조카를 건드리다니. 이 외삼촌이, 확실하게 짓밟아 줄게.”

“정말?!”

헨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외삼촌이 직접 나선다면.

이건 끝난 문제였다.

남부 훈련소에 입소한 이상, 지휘관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은가.

걸음을 서둘렀다.

혹시라도 로만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헨리는 베일 자작보다 먼저 로만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저 녀석이야.”

손가락으로 상대를 가리켰다.

로만 드미트리.

상대는 멍청하게도 도망가지 않았다.

기다리라 했다고 정말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에, 헨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뒤늦게 도착한 베일 자작.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헨리와 로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개자식의 정체가 로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도착한 장소에는 로만 외에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혼내 달라는 듯한 헨리의 표정.

베일 자작은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내 앞길을 막으려고.’

판단은 빨랐다.

헨리가 말을 내뱉기 전에.

베일 자작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헨리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경쾌한 소리.

기세등등하던 헨리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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