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모여드는 관심 (3)
그건 예고된 만남이 아니었다.
훈련을 끝내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로만은, 한스가 아닌 다른 하인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했다.
“발할라에서 보냈습니다.”
분명히.
상대는 드미트리의 하인이었다.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래 일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인은 드미트리에서 제공하는 복장을 착용했다.
의도적으로 정체를 숨겼다는 의미일 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호들갑을 떨며 당황했을 상황인데도, 로만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발할라에서 무슨 일이지? 며칠 전에도 발할라의 사람을 만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덴버 가문.
그들은 발할라 제국파다.
로만을 영입하겠다고 나름의 조건을 제시했던 기억이 있건만, 이런 방법으로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순간 로만의 반응에 하인은 흠칫 놀랐다.
로만이 생각보다 침착한 것도 있었지만, 속내를 완전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사람 눈빛이 무슨…….’
마른침을 삼켰다.
중대한 업무를 맡은 하인은,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이런 무례한 방법으로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로만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발할라는 며칠 전에 ‘덴버 가문’을 통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형식적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만남이, 발할라의 진심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현재.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덴버 가문을 통해 본론을 전달했다면 정보가 새어 나갈 확률이 있고, 그렇다고 대외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가는 적대 세력들의 의심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덴버 가문은 형식적인 만남을 청했다.
만약 그러한 조건만으로도 로만이 승낙했다면 그것은 정말 금상첨화겠지만, 그들은 로만의 가치를 알기에 단번에 수락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대전사 전투 직후.
발할라는 드미트리에 하인을 심어 놓았다.
바로 오늘의 만남을 위해.
탁 트인 훈련장이 아니라 밀폐된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자, 발할라의 사람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발할라 정보부 소속의 멕킨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로만 드미트리님을 발할라로 모셔 가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이번 제안이야말로 발할라의 진심입니다.”
예상 밖의 만남.
발할라.
그들이 가장 먼저 결단을 내렸다.
윌라스의 보고 이후.
로만은 A등급으로 상향되었다.
발할라는 로만을 영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랭커의 파급력이 대단했다.
급변하는 상황에.
윌라스는 다시 한번 본국에 연락했다.
“아무래도 계획보다 빨리 로만에게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카이로가 어떤 나라인지를 잠시 간과했습니다. 20대에 4성 검사라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면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이 나라에서는 그보다 못한 인재라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다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왕실파, 귀족파, 그리고 크로노스 제국파. 그들이 로만 드미트리와 접촉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만약 로만이 자신의 가치를 간과하고 그들의 제안을 먼저 승낙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로만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고도 놓치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번 일에 대한 전권(全權)을 일임해 주십시오. 로만을 반드시 영입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윌라스, 당신에게 로만 영입 건에 관한 전권을 일임하겠습니다.]
계획이 변경되었다.
카이로 최연소 랭킹.
25살의 나이에 3성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은, 로만의 전력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발할라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일단.
그들은 덴버 가문을 통해 간을 보고,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다시 한번 사람을 보냈다.
맥킨이 말했다.
“발할라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가능성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국적의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고, 어떤 제안을 하든 간에 이미 상당한 부를 이룬 드미트리를 버리고 발할라로 귀화(歸化)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문제부터 확실하게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발할라의 국민이 되겠다고 말하는 순간. 발할라는 드미트리 가문을 위한 자작의 작위와 비옥한 영토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철광산을 끼고 있는 땅으로서, 지금과 같이 대장장이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문의 존속.
그들의 제안은 시작부터 파격적이었다.
왕국도 아닌 제국의 작위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하나만으로도 이전의 제안들을 압살했다.
그리고.
“발할라는 사람을 바란다면 사람을, 제물을 바란다면 제물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검사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강해지는 것이겠지요. 발할라 또한 로만 드미트리 님이 검사로서 강해지는 것을 바라기에, 이례적으로 1급 보고(寶庫)의 출입을 허락하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발할라의 보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곳에 쌓여 있는 선대의 지식을 접한다면, 로만 드미트리 님은 재능에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르실 수 있습니다.”
1급 보고.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발할라는 심법과 검법, 선대의 일지와 같은 것들을 보고에 저장해 두었다.
보고는 내용물의 수준에 따라 등급을 나누었는데, 특급 보고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등급이 바로 1급이었다.
남들은 평생 접해 보지 못할 보물이 모여 있는 장소.
그런 곳에 이방인을 출입시키겠다고 말하는 것은, 발할라 제국이 그만큼 로만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발할라가 본심을 드러냈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그들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말했다.
“훗날. 발할라는 대륙을 정벌하고 유일한 제국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그때는 카이로 왕국과 같은 약소국의 소속이라는 것은 명을 재촉하는 지름길입니다. 발할라의 편에 서십시오. 발할라의 선봉에서 발할라의 명예를 드높인다면, 발할라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영광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확실한 보상과 적절한 협박.
맥킨은 먼 미래를 말했다.
그의 말처럼, 발할라가 전쟁이라도 선포하는 날에는 로만이 얼마나 강한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일개 개인.
왕국과 제국의 차이를 넘어설 수 없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승자의 편에 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발할라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만약에라도 제안을 거절한다면…….’
맥킨은 속내를 숨겼다.
20대에 4성에 오른 재능.
다른 세력으로 흡수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
만약 발할라의 것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 버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침묵이 맴도는 공간.
말을 끝낸 맥킨이 입을 다물고 대답을 기다리자, 로만이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순간.
인자했던 맥킨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진심입니까?”
맥킨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거절한다면, 로만은 사실상 발할라가 영입할 수 없는 부류였다.
그 말인즉.
암살의 대상.
발할라의 재능이 아니라면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제가 거절하는 이유는 조건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이 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최근에 저는 많은 선택을 제안받았습니다. 왕실의 로열 나이트, 베네딕트 후작, 그레고리 백작, 덴버 백작. 카이로 왕국의 정세를 생각한다면, 그건 단순히 하나의 세력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행보를 확실하게 정리하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 선 지금. 제게 중요한 것은 누가 제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지를, 말뿐인 제안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직접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로만의 말에.
맥킨의 표정이 풀어졌다.
의도한 그림이었다.
로만은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시간을 벌 수 있는지를 알았다.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 그건 충직한 충신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한번 무릎을 꿇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 낸다면 끝까지 충성을 맹세하는 존재. 그런 존재로 보이게 된다면 아무리 거절해도 나에 대한 집착을 포기할 수 없겠지.’
천마 백중혁은.
미련한 곰이 아니었다.
적대적인 관계라면 확실하게 끝맺음을 보지만.
네 개의 세력이 뒤얽혀 있는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는, 그 관계를 이용할 줄 아는 머리를 타고났다.
여우의 말에.
맥킨은 고민에 빠졌다.
로만과 같은 유형의 사람은 발할라가 정말 선호하는 인재였다.
‘인생의 아이러니지.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금방 마음을 바꾸고 발할라에 충성을 맹세했다면, 그의 실력과는 별개로 그는 항상 충성심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어. 좋은 조건과 상황에 따라 소속을 옮기는 녀석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조건과는 상관없이 진중하게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는 인물이라면,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기다릴 가치는 충분히 있겠지.’
마음이 동했다.
의도한 행동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로만은 발할라가 바라는 인재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행동을 보였고, 맥킨으로서는 경계심이 풀어졌다.
맥킨이 말했다.
“어떤 방법으로 발할라의 진심을 확인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리 오랜 시간을 기다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신중하되 늦지 않게. 발할라의 제안에 회신을 주길 바랍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발할라가 한발 물러났다.
그들은 앞으로 로만을 지켜볼 것이고, 언제고 자신들의 사람이 되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을 것이다.
떠나기 전.
맥킨이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의 인연을 위해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남부 전선을 조심하십시오. 크로노스 제국보다, 남부가 당장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습니다.”
남부 전선.
그건, 의외의 정보였다.
로만의 대처는 적절했다.
거절도, 승낙도 아닌.
모든 세력에 여지를 남겨 주는 대답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직접적인 공격을 받을 일은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예고되었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국방의 의무를 앞둔 아들의 모습에, 로메로 남작은 걱정되는 얼굴로 말했다.
“결국, 떠나는구나.”
가슴이 아팠다.
수도의 실세들은 다들 편법을 사용해서 자식들의 차출을 어떻게든 막아 내는데, 드미트리 가문은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동북쪽 일대의 실세라는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다.
그동안 중앙 정부와의 연줄을 형성하지 못했기에, 지금에 와서 로만을 빼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로만도 바라지 않았다.
본인이 감당하기로 한 현실을 외면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이 전가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 몸 건강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대화는 짧았다.
로만은 걸음을 돌렸다.
밖에는, 로만과 같이 전장으로 떠날 30명의 병사가 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떠나는 로만.
감정이 복잡했다.
말썽을 부릴 때는 애증(愛憎)의 존재였건만, 막상 떠나려고 하자 쉬이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에.
옆에 있었던 리한나가 로메로 남작을 달래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로만이 강인한 아이라는 사실을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크로노스 제국의 위협을 받는 서부 전선도 아니고, 로만은 남부 전선으로 배정을 받았어요. 분명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남부 전선(南部戰線).
로만의 출정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