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비공식 랭커 (1)
날이 저물기 전에 윌라스는 드미트리에 도착했다.
검문소에서 방문 목적과 신분을 밝히자, 그들은 경비대장의 안내에 따라 곧바로 로메로 남작을 만날 수 있었다.
“로메로 드미트리라고 합니다. 발할라 신전에서 오셨다고요?”
“예. 발할라 신전 카이로 지부의 사제인 윌라스라고 합니다. 검문소에서 목적을 밝혔듯이, 로만 드미트리가 49위의 랭커인 호메로스를 쓰러트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비공식 랭킹전은 발할라 신전에서 사실을 확인할 의무가 없지만, 워낙 이례적인 일이라 사건의 당사자를 만나 보고 랭킹에 반영할지 그 여부를 확인할 생각입니다.”
“좋은 소식이군요.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로메로 남작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랭킹 검증.
드미트리 가문의 경사였다.
하위 랭커라 할지라도 랭커를 보유한 가문은, 그 하나만으로도 명가(名家)로서 인정을 받는다.
드미트리는 역사가 짧다.
로메로 남작이 초대 가주니만큼, 아직은 재력을 제외하고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명예로운 요소를 갖추질 못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랭커로 등극할 기회라니.
만약 그런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그때부터는 귀족 사회에서도 드미트리 가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문의 장자이지 않은가.
로메로 남작은 차를 내와서 손님을 대접했고, 하인을 보내 로만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하인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님. 로만 도련님을 전담하는 하인 한스가 말하길, 현재 도련님은 대장간에서 작업을 진행하느라고 외부와의 교류를 완벽하게 차단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만약 작업을 중단해서라도 처리해야 할 일이라면, 한스가 직접 로만 도련님을 불러오겠다고 했습니다.”
“아니다. 됐다.”
대장간에서의 작업.
로메로 남작의 얼굴에 흐뭇함이 떠올랐다.
헨드릭과의 대화 이후, 로만 드미트리가 대장간에 관심이 많고 실력 또한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가문의 장남이 가업(家業)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기에, 로메로 남작은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대장간의 일은 중간에서 끊고 싶지 않았다.
그게 설령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발할라 신전의 방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로메로 남작이 말했다.
“사제님.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하루 쉬고 내일 로만을 만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만의 작업이 끝나는 대로 사제님이 만나길 원한다는 사실을 전달해 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윌라스의 모습에, 로메로 남작은 웃음을 보였다.
“이렇게 된 김에 드미트리를 한번 구경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내할 사람을 붙여 드릴 테니, 드미트리 가문이 어떤 곳인지 한번 둘러보십시오.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때마침 할 일도 없기에.
윌라스는, 로메로 남작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안내는 한스가 맡았다.
시간이 되면 로만에게 안내하기 위함이었고, 한스가 먼저 걸어가며 드미트리에 관해 설명했다.
“드미트리 가문은 카이로 왕국 최대 규모의 철광산을 보유한, 그리고 가장 품질이 좋은 철제를 제작하는 곳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시면 알겠지만, 내성의 구조물들은 철제를 기반으로 해서 정말 튼튼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성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철을 강화해서 만들어 낸 성문과 높디높은 성벽으로 인해, 드미트리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땅이라고도 불립니다.”
설명은 차분했다.
드미트리의 역사와 특징.
거리를 거닐며 드미트리만의 특색을 말했고, 윌라스와 사도는 한스를 따라다니며 묵묵히 들었다.
사실.
윌라스는 한스의 설명을 듣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런 변방에서 호메로스를 쓰러트릴 정도의 검사가 탄생하다니. 만약 드미트리 가문이 역사가 깊은 기사 가문이라면 이해를 했겠지만, 광업이 발달한 이 땅에 그만한 검사가 탄생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가문의 장남이 그러한 업적을 이루어 낸 케이스라면. 아주 높은 확률로, 명성에 눈이 먼 귀족들이 소문을 조작했을 확률이 높겠지.’
뻔했다.
랭커는 영광스러운 자리다.
거짓으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고,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공식적으로 랭킹전을 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행되는 비공식 랭킹전.
발할라 신전이 ‘비공식적인 결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훈련장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하나!”
“둘.”
“둘!”
한 무리의 사람들.
그들이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윌라스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발할라 제국의 태생이니만큼, 고리타분한 가문의 역사보다는 지금과 같은 장면에 관심이 갔다.
‘일반 병사들인가?’
기사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유는 구성원들의 나이가 제각각이었으며, 그중에 소년병으로 보이는 사람도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어린 나이에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구성원들의 특색이 이리도 통일되지 않은 병력이라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병력이라기보다는 징집병(徵集兵)일 확률이 높았다.
윌라스가 말했다.
“훈련을 잠시 지켜봐도 되겠습니까?”
“한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윌라스의 부탁에.
한스가 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뛰어갔다.
대장은 윌라스의 모습을 힐끗 확인하더니, 크게 상관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괜찮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때만 해도.
훈련을 바라보는 윌라스의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기초 훈련을 끝내고.
병사들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크리스가 말했다.
“오늘은 동기간의 대련을 진행할 것이다. 각자 짝을 맞추고, 신호에 따라 대련을 시작하도록.”
“예!”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루카스의 이탈로 기존 인원보다 한 명이 줄었지만, 케빈을 포함해 31명이었기에 오히려 지금이 짝이 맞았다.
30명의 병사. 동시에 15번의 대결.
병사들로서는 익숙한 훈련이었기에, 순서에 따라 배정된 동기와의 대련을 진행했다.
타닥.
훅!
가장 먼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조가 있었다.
키가 작은 사내가 선공을 감행했고, 빠르게 품을 파고들며 목검으로 급소를 찌르는 공격에 상대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공격을 맞받아쳤다.
순식간에 수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눈앞에서 목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리는데도, 둘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상대를 주시했다.
카앙!
카카카캉!
서로의 무기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들의 공격은 매 순간이 위협적이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신체 부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적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상대의 급소를 공략할 수 있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그리고 상대가 틈을 드러낸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분명히 목검을 사용하는 대련인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었다.
그건 다른 조들도 다르지 않았다.
차례로 대련을 시작하는 병사들.
그들은 검투사 대결에 나선 투사(鬪士)라도 되는 것처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승부를 보였다.
“다들 집중해! 상대를 똑바로 보라고!”
크리스가 호통을 내질렀다.
처음 병사들을 모집했을 때.
나름 일반 병사들보다는 수준이 높았지만, 그래도 크리스의 기준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수라 심법으로 인해 육체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무엇보다도 수라 검법의 투로를 익힌 병사들은 어느 순간부터 투사로 변하기 시작했다.
수라 검법은 모든 상황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기술이다.
머리 위를 공격당했을 때, 옆구리를, 다리를 공격당했을 때.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의 공격을 막거나 피해서 반격하는 법을 알려 주었고, 수라 심법은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지금의 상황.
피땀을 흘린 결과물이었다.
목검에 얻어맞아 피멍이 들었던 얼굴들은 모두 회복되었고, 그들은 수라 검법의 투로를 떠올리며 상대의 무기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반격.
승패(勝敗)가 중요한 싸움이 아닌데도, 병사 중 그 누구도 패배해도 괜찮다는 안일한 태도를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케빈이었다.
케빈.
그는 왜소했다.
그렇기에 윌라스가 소년병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싸우는 전투 스타일은 체격과는 완전히 달랐다.
훅!
간발의 차이로.
상대가 시도하는 공격을 피했다.
케빈은 상체를 뒤로 젖히는 대담한 움직임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곧바로 걸음을 내디디며 상대의 급소를 공략했다.
목검의 스피드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검을 짧게 잡아서 공격하는 시간을 줄였고, 상대의 입장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앙!
타타탁!
공격은 모두 막혔다.
케빈의 상대.
그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전쟁 용병 출신이었고,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린 그의 이름은 푸키였다.
“케빈, 그렇게 방어를 도외시해서 몸이 남아나겠어?”
푸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햇볕에 번들거리는 그의 머리.
정수리 부근부터 타고 내려오는 문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지만, 케빈은 그에 동요하지 않았다.
“일단 이기고 그딴 소리를 해.”
퍽!
“크윽.”
상대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푸키의 몸은 탄탄한 근육 갑옷을 때리는 것 같았지만, 케빈의 송곳 같은 주먹에 푸키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래서 모두 케빈과의 대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로만은 대련이라 할지라도 실전같이 최선을 다하라 말했지만, 케빈은 그중에서도 정도가 매우 심했다.
단 한 번도 패배를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실전처럼 싸우는 케빈의 모습에, 푸키도 악에 받쳐서 으르렁거렸다.
“그래, 어디 해보자고.”
그때부터.
정말 실전 같은 대결의 연속이었다.
푸키는 잘못 맞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급소를 과감하게 공격했고,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에서도 케빈은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상대에게 달려드는 자세로. 푸키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끝까지 유지하면서, 상대의 격렬한 반격은 간결한 움직임만으로 피해 버렸다.
훅훅!
눈이 빨갛게 번들거렸다.
귀혼마공.
케빈의 움직임은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착같이 따라붙는 공격에 어느새 푸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새끼가.’
처음 로만의 사병이 되고.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존재는 로만도, 크리스도 아닌 바로 케빈이었다.
외관으로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소년에 불과했는데, 대전사 전투에서도 그렇고 가장 호전적으로 거칠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
크리스부터는 넘을 수 없는 벽이기 때문일까.
푸키와 같은 병사들은 케빈만큼은 이기고 싶었고, 과열되는 경쟁의식에 서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카앙!
공방 직후.
둘 다 허점을 드러냈다.
순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목검에서 마나의 기운이 일어나며 서로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분명했다.
그건, 1성의 오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