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615)

64화 로메로 남작의 고민 (1)

시간이 흘렀다.

바르코와의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덧 한 달.

드미트리 가문의 정기 회의에, 가문의 가신들은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씩 보고했다.

“바르코 가문의 몰락으로 더는 드미트리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습니다. 대항마(對抗馬)의 부재로 친 바르코였던 세력들이 하루가 멀다고 드미트리와의 동맹을 바란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중에는 그만한 대가를 내겠다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영주님이 명령하셨던 것처럼, 그동안 바르코에 붙어 과도하게 적대적이었던 세력들은 대화 자체를 거절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금 당장은 드미트리가 동북쪽 일대의 실세로 자리를 잡겠지만, 벼랑 끝에 몰린 세력들은 분명히 제2의 바르코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르코의 몰락.

그야말로 어부지리(漁夫之利)였다.

가문의 힘이 크게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드미트리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

가신의 말처럼.

동북쪽 일대의 모든 가문이 드미트리에게 달라붙었다.

특히 바르코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나팔수들은 석고대죄의 마음으로 매일같이 드미트리를 찾았지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분명히 바르코와 같은 새로운 대항마가 나타난다면, 그들은 드미트리를 배신하고 그곳에 달라붙을 것이 뻔했다.

로메로 남작이 말했다.

“설령 새로운 적대 세력이 나타날지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포용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주었던 세력들과 손을 잡는 건 관용(寬容)이 아니라 오만이다. 절대 그들과의 협력을 허락하지 마라. 우리와 등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들을 통해 그 사례를 보여 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음 안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주제.

병력의 확충이었다.

드미트리는 동북쪽 일대 제일의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들은 경각심을 얻었다.

“바르코는 외부의 힘을 빌려서 전쟁에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만약에 드미트리가 바르코와 붙었다면. 플레어와 호메로스와 같은 변수들은 우리에게도 엄청난 위협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병력을 확충하고, 변수를 대비할 충분한 마법 병기들을 확보했으면 합니다. 드미트리는 더 이상 변방의 가문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동북쪽 일대의 확고한 실세가 되었기에, 우리의 자리를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필요합니다.”

군사력(軍事力).

그것만큼 확실한 안전장치는 없다.

로메로 남작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고, 이번 일을 계기로 군사력에 상당한 예산을 투자하기로 했다.

게다가.

때마침 드미트리에게 호재가 있었다.

“로만 도련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갱도 전체에 아티팩트를 설치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가 소모되었지만, 단기간에 철광산의 생산량이 30%나 상승했습니다. 아직 인부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지 않은 상태라, 이런 성장세라면 100% 이상의 생산량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티팩트로 인한 금전적인 소모는?”

“문제없습니다. 급상승한 생산량만으로도, 그 정도의 금전적인 소모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로만의 말은 옳았다.

투자의 선순환.

먼저 투자함으로써 안전의 문제를 해결했고, 인부들은 편하게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다.

대단한 결단이었다.

결과로만 보았을 때는 왜 진즉에 생각하지 못했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사실 아직 현실로 이루어지지도 않은 결과를 예상하고 거액을 투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을 로만은 현실로 이루어 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철광산에서의 일을 자처하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직접 경험했고, 현명한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돌출해 냈다.

과정부터 결과까지.

완벽했다.

내외부로 급변하던 로만의 평판이,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한 가신이 말했다.

“영주님. 혹시 앞으로 후계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후계 문제.

그건, 달라진 평판을 증명하는 발언이었다.

사람들은 아직 드미트리 가문이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내부 회의에서는 비밀리에 후계자를 이미 낙점한 상태였다.

가신이 말했다.

“이미 3년 전에 저희는 로드웰 도련님을 차기 가주로 낙점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로만 도련님의 행보는 가주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았고, 막내 도련님은 유약한 성격 탓에 중책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로만 도련님의 행보를 보십시오. 바르코와의 전쟁에서 랭커인 호메로스를 쓰러트렸고, 이번에는 철광산의 안전 문제를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했습니다. 분명히 가주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했던 로만 도련님이, 지금은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의 행보.

충격적일 정도로 대단했다.

아직도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던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오라 검사로 성장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강력한 무력과 더불어 드미트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까지. 가신들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로드웰 드미트리 또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지만, 로만의 행보는 천재의 영역마저도 넘어섰다.

그리고.

“후계자의 선정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된 사실이 아닙니다. 가문 내에서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사전에 로드웰 도련님을 낙점했지만, 로만 도련님이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이상 공정한 경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잔잔했던 드미트리에.

파문이 일었다.

확정적이었던 후계 구도가 엉망으로 변해 버리는 상황에, 로메로 남작은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로만과 로드웰이라.’

두 아들.

그들은 성향은 달랐다.

평민이었던 시절을 경험한 로만은 신분의 괴리감에 급격하게 무너졌다면, 로드웰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악착같이 노력했다.

로드웰의 욕심은 대단했다.

그는 장남을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후계자 자리에 강한 열망을 보였고, 경쟁을 유도하는 가문의 결정에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혹여라도.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로만이 적당히 뛰어났다면 이전의 결정을 따르겠는데, 지금은 눈앞의 결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로메로 남작이 말했다.

“……아직은 시간이 많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며, 어떤 결단을 내질지 고민해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날의 회의.

로메로 남작의 고민이 본격적으로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로메로 남작은 한스를 불렀다.

한스는 로만의 최측근이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로만을 모셨기에, 후계자 문제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한스가 고개를 숙였다.

로메로 남작은, 구구절절한 얘기는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한스. 너는 로만 드미트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가문의 후계자로서 어울리냐고 묻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한스는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로메로 남작을 올려다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만약 3개월 전에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답변을 했을 겁니다. 로만 도련님은 심성이 착하다고는 하나 후계자로서 걸맞지 않은 행보를 보여 주었고, 그건 제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 물어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로만 도련님이라면 다릅니다. 단순히 최근의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지켜본 도련님은 후계자에 걸맞은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자세히 말하거라.”

“블러드 팽의 사건 때. 로만 도련님은 드미트리의 영지민을 핍박하는 악의 무리를 직접 처단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일이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드미트리를 어지럽히는 악인들에게 드미트리의 법도를 물었고, 로렌스까지 찾아가서 그들을 완전히 괴멸시켜 버렸습니다. 그 사건은 드미트리의 시민들에게 있어 축복이었습니다. 고리대금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악의 고리를 끊었고, 드디어 삶에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최초의 사건.

명분은 단순했다.

로메로 남작이 블러드 팽을 처리하라고 명령했고, 로만은 마음이 동했기에 직접 손에 피를 묻혔다.

그런데.

한스의 시각에서는 달랐다.

그는, 로만의 행보를 제멋대로(?) 해석했다.

“이번 철광산에서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만 도련님은 드미트리 사람들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철광산에서 일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강제한 일이 아닙니다. 도련님 스스로가 영지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고, 인부들과 같이 몸을 부대끼면서 드미트리의 현실을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발생한 붕괴 사고에서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영지민이기에. 드미트리의 성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한스의 말은.

마치 영웅의 행보를 설명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만의 울타리 안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한스는 그 보호를 받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다.

“알겠다. 이만 물러가거라.”

“예.”

한스가 고개를 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로메로 남작은 더욱 큰 고민에 빠졌다.

한스의 경험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발언에 혼란만 가중되었다.

‘로드웰은 이미 본인이 드미트리의 후계자라고 확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둘의 경쟁 체제를 형성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로만은 단시간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지만, 로드웰은 어린 나이에서부터 드미트리의 후계자가 감당해야만 하는 모든 의무를 짊어졌다. 검술과 전술, 정치 공부에 전념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대장간에서 철을 다루는 방법도 배웠다.’

아직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로만은 대장간에 관심이 없었다.

로드웰 드미트리와는 다른 부분이었고, 그것 때문에라도 로메로 남작은 섣불리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후계자 문제는 핵심 인물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가신들.

철광산의 마스터.

마지막으로 마스터 블랙스미스 헨드릭까지.

적어도 세 개의 세력이 동의해야만, 로메로 남작은 혼란을 각오하고라도 경쟁을 붙일 수 있다.

로메로 남작이 하인을 불렀다.

“지금 당장 철광산의 마스터에게, 이번 철광산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다고 전하거라.”

두 번째 관문.

이번에는 제이콥의 의견을 들어 볼 차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하인의 음성이 들렸다.

“영주님. 철광산의 마스터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거라.”

끼익.

문이 열렸다.

그런데.

손님은 한 명이 아니었다.

제이콥의 뒤에는 사내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이자 제이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인에게 철광산에서의 사건을 듣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로만 도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더 적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힐끗.

제이콥이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사내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철광산의 모르칸입니다.”

모르칸.

그가, 철광산을 대표하는 대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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