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철광산의 광부들 (5)
루카스는 단언컨대, 최근 몇 주 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인생의 대격변(大激變)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내가 대체 뭘 경험하고 있는 거지?’
전쟁이 끝나고.
크리스가 병사들을 불러모았다.
처음에는 루카스와 같은 베테랑들은 크리스에게 훈련을 받는 것에 의문이 있었지만, 3성 검사인 얀손을 쓰러트리는 모습에 맹목적인 신뢰를 얻었다.
로만과 크리스. 둘 다 예사 인물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분명히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런데.
그날, 크리스의 발언은 직접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마나 심법과 그것을 활용한 검법을 가르칠 생각이다. 주군이 너희들에게 주는 선물이니, 열과 성을 다해 수련해야 할 것이다.”
정말.
말이 되지 않는 발언이었다.
마나 심법이란 무엇인가?
마나를 다루는 특유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시중에 떠도는 어쭙잖게 흉내 낸 쓰레기가 아니라면 그 값어치를 책정할 수 없는 보물이다.
하급으로 분류되는 마나 심법만 하더라도 금화를 지급해야 할 정도로, 일반인들로서는 감히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 보물을 알려 주겠다니.
황당한 소리였다.
루카스로서는, 당연히 상식적으로 말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어디 시장바닥에서 나뒹구는 쓰레기 같은 것을 알려 주겠지. 마나 심법은 아버지가 아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는다는 보물. 지식이 무분별하게 퍼지게 되면 마나 심법의 희소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면 우리에게 알려 줄 이유가 없어.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병사라지만, 우리가 아직 로만을 따른 시간은 보물을 내줄 만큼의 신뢰가 형성되지는 않았어.’
한때.
루카스는 마나 심법에 매달렸었다.
특별한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A등급 용병에 도전할 수 없었기에, 그간 벌었던 돈을 모두 투자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오라를 구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는 전 재산을 전부 날리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시장바닥에서 파는 마나 심법들이 쓰레기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투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여러 마나 심법을 경험했지만, 단 한 번도 마나라는 것을 느껴 보질 못했다.
좌절했다.
노력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었고, 그때부터 용병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회의감이 생겨났다.
지난 경험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나름 선심을 쓴다고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를 알려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것의 이름은 수라 심법이라고 한다.”
수라(修羅).
전장의 귀신.
루카스는 크리스의 설명에 따라 심법을 운용하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런 미친.’
이건 보물이었다.
심법이 말하는 대로 행했을 뿐인데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고,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은 자신의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마저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간 경험했던 쓰레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루카스는 계속되는 실패에 오라 검사로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했었는데, 수라 심법은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라 검법.
적과 싸우는 108번의 방식을 정리한 그 기술은, 수라 심법의 힘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절기(絕技)였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로만 드미트리의 정체가 뭐지? 얼마 전만 하더라도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4성 검사 호메로스를 쓰러트리고, 이번에는 사병이라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심법과 검법을 알려 주었어.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은 걸까. 아니, 그렇다 할지라도 그의 행보는 범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 만약 내가 수라 심법과 수라 검법을 독점하는 상황이었다면, 병사들에게 알려 주기는커녕 혈족에게도 절대 비밀로 했을 거야.’
얼떨떨했다.
예상치도 못한 기연.
루카스를 비롯한 로만의 사병들은 모두 열의에 들끓었다.
그들도 마나 심법의 값어치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때부터는 밤을 새워 가며 훈련을 할 정도로 다들 열의를 보였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만약 심법을 통해 오라 검사로서 각성하기라도 한다면,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난 며칠.
행복했다.
인생의 대격변이었고, 루카스는 자신의 변화를 온전히 즐기면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훈련에 임했다.
그렇기에.
로만의 제안을 들은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주군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밖으로 떠나라는 명령.
그건,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 *
정보 길드를 구상하며.
로만은 적임자를 물색했다.
크리스.
그는 전력의 핵심이었다.
정보 길드로 빼돌릴 만한 인재가 아니기에, 크리스는 애초에 논외로 생각했다.
케빈.
사실 밑바닥에서의 경험과 특유의 독기를 생각하면, 앞으로 만들 ‘하오문’ 형태의 정보 길드에 케빈은 제법 어울리는 인재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케빈은 귀혼마공을 배우면서 완벽하게 전투를 위한 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데다, 정보 길드의 수장은 다양한 사건에 대응하는 연륜이 필요하다.
아직은 소년에 불과한 케빈은 경험이 부족했고, 그도 적합한 인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민 끝에.
로만은 루카스를 택했다.
‘루카스는 용병으로서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베테랑이다. 사병 테스트에서 현실적인 임기응변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용병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인맥도 넓다. 무엇보다도 루카스는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보 길드는 결과에 충실한, 루카스와 같은 사람이 이끌 필요가 있다.’
적임자였다.
그래서 제안했다.
모르칸이 알아낸 정보를 정리하고, 나아가 대륙의 정보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맡아 달라고.
대답은 NO였다.
“정보 길드를 맡는다면 저는 분명히 주군의 곁을 떠나야만 합니다. 대륙의 모든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시스템을 갖추기 전까지는 한곳에 머물며 살아갈 수 없겠지요. 그래서 싫습니다. 저는 주군의 곁에 남고 싶습니다. 바르코와의 전쟁에서 적들을 도륙하던 주군의 뒷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감격했습니다. 저런 사람과 함께라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건만,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절박한 목소리였다.
마치 충신이라도 되는 듯한.
루카스는 간절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 모습에.
‘연기가 제법이구나.’
로만은 속으로 웃었다.
속내가 훤히 보였다.
충성심?
그딴 이유가 아니다.
루카스는 심법을 훈련하는 것에 완전히 취했고, 괜한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오라 검사의 꿈.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로만의 곁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로만이 말했다.
“하나만 묻겠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수라 심법과 수라 검법을 알려 주었다고 생각하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의문이었다.
굳이 보물의 희소성을 떨어트리는 선택을 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수혜자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충성의 대가로 너희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선물로 자신의 전부를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루카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병사들의 충성심을 치하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줄 것 같은가?”
“그 말은…….”
루카스는 바로 핵심을 알아챘다.
수라 심법과 수라 검법.
병사들은 대단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에게 이유 없는 충성심을 바라지 않는다. 내게 수라 심법과 수라 검법은 선물로 주어도 될 만큼의 가치만을 가지고 있기에, 나를 따라 전장에서 목숨을 건 너희들에게 충성심의 대가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병사 이상의 가치를 하는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줄 것 같은가?”
크리스에게 섬전을.
케빈에게 귀혼마공을.
병사들에게 수라 심법과 수라 검법을.
로만은 자신의 지식을 말해 주었다.
그로 인한 변수는 걱정하지 않았다.
대해(大海)의 일부를 경험한 사람들은.
한계를 알 수 없는 로만의 능력에 경외심을 가지든, 아니면 루카스처럼 명확한 보상을 바라든, 다양한 이유로 곁을 떠나질 못했다.
그건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이었다.
적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차고 넘칠 정도로 줄 만큼의 능력도 보유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천마 백중혁, 로만 드미트리였다.
일말의 지식으로 인생이 뒤바뀌었다고 생각한 루카스에게, 로만의 발언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순간.
루카스는 본능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주군의 명령을 받들어, 대륙 제일의 정보 길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계산은 끝났다.
더 대단한 것을 준다면.
루카스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건, 너무나도 합리적인 거래였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었다.
이제는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안전을 대비함으로써 일의 능률이 상승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로 인해 예산이 들어오면 로만의 사람들은 천천히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것이다.
하오문이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떠드는 말로 무림 제일의 정보망을 구축했던 것처럼.
처음에는 미약할지라도, 로만은 자신이 택한 방식이 의미 있게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다음 날.
로만은 철광산으로 향했다.
결과를 얻었다고 곧바로 발길을 끊진 않았다.
앞으로의 변화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더 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로만의 등장에, 철광산의 인부들이 열광했다.
“로만 도련님이시다!”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로만을 반겨 주었다.
그들도 소식을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인부를 구한 것으로도 모자라, 로메로 남작과의 대면을 통해 앞으로 안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기로 한 것을.
단 하루였지만 그 소식은 드미트리를 강타했다.
첫날만 하더라도 로만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사람들이, 지금은 로만을 영웅처럼 우러러보았다.
그중에는.
사고를 당했던 사내의 아비도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이 제 아들을 구해 주신 덕분에 하나뿐인 아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도련님이 저희의 힘을 필요로 하신다면, 저는 어떤 일이든 간에 목숨을 바쳐서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겠습니다.”
평범한 사내였다.
햇볕에 얼굴이 탔고, 눈 밑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드미트리에 사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
로만과는 단 한 번도 엮일 일이 없었던 사람이, 로만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로만은 사내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천마.
무림을 피로 물들인 악귀.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군림해야만 했고, 천마의 아들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여 무림을 정벌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백중혁의 영혼을 지탱해 준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실익을 따지는 계산을 배제한.
순수한 호의를 마주했을 때, 백중혁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고맙다.”
지금은 왠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날부터.
드미트리의 민심(民心)은 로만을 향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는 로메로 남작을 깊은 고민에 빠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