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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615)

52화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 (2)

순간.

바르코 자작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적대적인 관계라 할지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완전히 넘어 버렸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냐!”

바르코 자작과 로만 드미트리.

신분의 격(格)이 다르다.

바르코 자작은 한 가문의 수장이라면, 로만은 남작 가문의 출신에 아직 작위도 물려받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공격하는 발언을 내뱉다니.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로만의 만행은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오냐.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해 주마. 귀족의 법도를 모르는 천박한 네놈은 아무런 명분이 없이도 타인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카이로 왕국에서 허락되지 않는 행동이다. 바르코가 왜 이제야 영지전을 선포했다고 생각하느냐? 너와 같은 논리대로라면 로렌스가 준비하기 전에 공격하면 그만이나, 우리는 귀족의 법도에 따라 명분을 내세우고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아 이번 일을 진행했다.”

로렌스와의 전쟁.

오랜 시간이 걸린 계획이었다.

위조한 문서를 근거로 분쟁을 공론화시키고, 아무도 전쟁에 개입할 수 없도록 명분을 강조했다.

완벽했다.

바르코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타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로만 드미트리가 전장에 나타났는지 바르코 자작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이로의 귀족들은 멍청이가 아니다. 명분이 없는 전쟁은 귀족 사회에서 매장 받아 마땅하고, 나는 너의 행동을 문제 삼아 드미트리 가문에게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드미트리 가문으로서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귀족의 법도를 어긴 가문은 주변 가문들이 연대해서 무너트리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다. 네가 조금만 귀족의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면, 실제로 그러한 예가 많았다는 것을 알았겠지.”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쏘아붙이는 말에도 담담한 로만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속이 더욱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귀족의 법도를 몰랐다는 말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제야 알겠느냐? 네가 얼마나 멍청한 행동을 저질렀는지를. 드미트리 남작은 너로 인해 큰 곤욕을 겪을 것이다. 아들을 하나 잘못 둔 죄로, 평안하게 살았을 드미트리 가문이 동북쪽 일대 귀족들의 질타를 받게 될 것이란 말이다!”

콰앙!

테이블을 내리쳤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거친 숨을 내뱉는 모습에, 로만은 가만히 시선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뭐라?!”

잔잔한 목소리.

폭풍과도 같은 분노를 마주하고도, 로만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변 귀족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제가 왜 전쟁에 개입했는지를, 그 명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할 것 같은 긴장감을 뚫고, 로만의 날카로운 음성이 귀족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로렌스와 드미트리는 본래 혼인을 약속한 사이입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파혼을 결심했고, 그렇게 저는 파혼을 당한 얼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파혼의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평판? 여성 편력? 아니면, 단순히 플로라 로렌스가 단순히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툭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신경을 예민하게 긁는 그 소리에,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르코의 장자, 안토니 바르코가 저에게 파혼하라고 협박했습니다.”

“……?!”

“때는 바르코의 사교 파티로 돌아가야 합니다. 안토니 바르코와 친분이 있었던 저는, 로렌스와의 혼인을 약속하고도 그의 초대로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술에 취한 저는 바르코의 방계인 에밀리 바르코와 한 방에서 눈을 떴고, 안토니 바르코가 로렌스와 드미트리를 떼어내기 위해서 함정을 팠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예상대로, 안토니 바르코는 그때의 일을 빌미로 로렌스와의 결혼을 취소하라는 협박을 했습니다.”

로만의 말에.

귀족들이 동요했다.

안토니 바르코의 협박에 로만이 파혼을 결심한 것이라면, 로만에게 책임을 묻는 명분이 애매해졌다.

‘치부(恥部)는 드러내는 순간 더 이상 치부가 아니게 된다.’

마교의 후계 구도로 인해 살얼음판을 걷던 시절.

백중혁은 온갖 음해에 시달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평판은 우스울 정도의 쓰레기로 전락해 버렸지만, 그때의 백중혁은 당당하게 소문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버렸다.

쓰레기면 뭐 어떤가.

자신의 사람들은 백중혁을 신뢰해 주었고, 적들을 하나씩 처리하면서 뒤에서 피어오르던 소문들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렇기에.

로만은 먼저 협박의 빌미를 차단했다.

어차피 자신은 더 떨어질 평판도 없었다.

바르코 자작으로서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헛소리! 그딴 말을 믿을 것 같으냐! 오냐, 당장 에밀리 바르코를 불러 진위 여부를 확인해 주마. 드미트리의 장자가 얼마나 쓰레기같이 살았는지를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것을 협박으로 치부하면서 진실을 덮으려는 네 녀석의 혓바닥이 참으로 역겹구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진실을 인정할 사람이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만날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분명하게 밝힐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바르코와 로렌스의 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협박으로 인한 복수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바르코 자작은 진창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하는 말, 그가 보여 주는 태도, 그 모든 것들은 로만의 예상 안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로만이 말했다.

“안토니 바르코가 플로라 로렌스를 따라다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안토니 바르코는 선을 넘었습니다. 플로라 로렌스를 추행하려다가 실패했고, 그때의 일로 충격을 받은 플로라 로렌스는 결국 파혼을 택했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웃는 얼굴로 결혼식에 얼굴을 비출 수가 없다는 것이 파혼의 이유였습니다.”

“그, 그게 무슨?!”

“이것도 진실이 아니라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에밀리 바르코와 플로라 로렌스, 둘 모두를 불러 진실을 확인해 보십시오.”

논점을 뒤엎었다.

안토니 바르코는 거짓으로 함정을 빠트렸다.

그렇다면.

자신도 똑같이 복수하면 될 일이다.

에밀리 바르코가 거짓으로 로만의 추행을 말한다면, 플로라 로렌스 또한 똑같은 발언을 할 수 있다.

진실의 여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의 비난을 무너트릴 수 있는 명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로만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안토니 바르코는 플로라에게 추행을 일삼았다고 했지. 그것의 수위가 나와 에밀리 바르코를 한방에 둔 것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혼인 전에 충분히 선을 넘었어. 그런 행동들이 주변에 알려져 있기에, 안토니 바르코의 아버지인 바르코 자작조차도 진실을 믿을 수 없겠지.’

진실에 거짓을 섞었다.

마지막으로.

로만은 상대를 완전히 찍어 눌렀다.

“안토니 바르코는 제가 로렌스와 혼인을 약속했던 시절에 제 여자를 건드렸습니다. 바르코 자작님,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정녕 제게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제 개인의 힘만으로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그것이 플로라의 진실을 모르고 파혼을 받아들였던 제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입니다.”

완벽했다.

논점을 흩트리고, 명분을 쟁취했다.

바르코 자작.

그가, 외통수에 빠져 버렸다.

바르코 자작은 말문이 막혔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복잡해진 머릿속에서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방법이 없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분은 완벽하다.’

안토니 바르코의 협박.

추행.

그리고 복수.

완벽한 명분이었다.

게다가 로만은 철두철미하게도, 드미트리 가문의 개입을 문제 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개인의 힘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이러면 할 말이 없었다.

플로라 로렌스를 위해 복수를 행했다는 로만의 명분을 표면 위로 올리는 순간, 바르코는 역풍을 맞아 비난을 받을 것이 뻔했다.

현기증이 일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괴물 같은 녀석. 나를 도와주려던 귀족들이, 로만의 말에 흔들리고 있다.’

바르코를 찾은 귀족들.

그들이 바르코 자작을 외면했다.

로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바르코는 썩은 동아줄이기에, 그와 같이 추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표정을 바꾸었다.

이제는.

진실 공방은 의미가 없었다.

에밀리 바르코를 물고 늘어진다고 할지라도, 바르코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르코가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다. 시간을 끄는 것. 상대에게 완벽하게 명분을 내주는 것보다는, 일단 이 상황을 피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애써 표정을 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바르코 자작은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네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평판을 들었던 네가 에밀리 바르코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처럼, 안토니 바르코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에 관해서는 진실 여부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다시 연락하도록 하겠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이런 일로 부른 것이 아닌데…….”

그의 말은 장황했다.

당황한 티가 났고, 그는 귀족들을 붙잡고 연결 고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로만은 웃었다.

지금으로부터 한나절 전.

로만은 크리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정말 바르코로 가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자살행위입니다. 바르코 자작이, 주군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없습니다!”

로만의 계획.

바르코로 향하겠다는 말은 들은 크리스는, 기겁하며 로만을 말렸다.

당연했다.

로만이 바르코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 버렸는데, 바르코로 가서 살아남길 바라는 것은 과한 기대였다.

로만이 말했다.

“크리스. 앞으로 바르코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느냐?”

“……바르코로서는 주군을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군이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로렌스를 무너트리고 탄탄대로를 걸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괜히 잃을 것이 없는 적을 건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싸움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마교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많은 적을 도륙하면서, 백중혁은 하나의 철칙(鐵則)을 세웠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르되,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 우리는 바르코가 내게 앙심을 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위태로운 이때야말로 복수의 뿌리를 뽑을 좋은 기회다.”

그리고 지금.

로만은 바르코 자작을 보았다.

“바르코 자작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황한 얼굴로 귀족들을 달래던 바르코 자작도, 주변의 귀족들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는 눈빛을 보였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지금부터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안토니 바르코와 저의 개인적인 문제로 안토니 바르코가 적합한 처벌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까, 아니면 가문의 문제로 이번 사건을 키우시겠습니까?”

양자택일.

로만이, 바르코 자작의 턱밑에 칼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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