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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615)

50화 대전사 전투 (5)

벤슨은 평소에 업보라는 단어를 신뢰하지 않았다.

온갖 망나니짓을 하고 다녀도 기사인 아버지 덕분에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고, 동북쪽 일대의 실세인 바르코의 기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기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평민들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권력을 누리고 살며, 그는 권력의 주체인 바르코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케빈에게 한 행동.

과한 충성심의 발로였다.

차오르는 자부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상대를 조롱한 것이, 설마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게 업보라는 건가.’

눈앞이 깜깜했다.

그는 안토니 바르코를 모시며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본 경험이 많다.

블러드 팽의 사건으로 이미지가 반전되었다는 하나, 벤슨은 소문을 믿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판단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는 얼간이 같은 녀석이었고, 그래서 선을 넘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호메로스를 베어 버렸다.

피가 난무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벤슨은 자신이 직접 싸운 것이 아닌데도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내가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만약.

로만의 진짜 모습을 알았더라면.

벤슨은 절대 케빈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고, 어떻게든 바르코가 아니라 드미트리에 붙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물은 엎질러졌다.

바르코의 기사로서 살아온 그의 인생이 발목을 붙잡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마지막 대전사로서 나서라는 바르코 자작의 명령.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는 사형수처럼 창백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씨발.’

사람들의 시선.

우러러보지 않았다.

바르코의 기사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벤슨을 마치 시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르코의 벤슨이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참아 냈다.

어떤 고수가 나올까.

로렌스에 2성의 검사가 있다던데, 그가 나오는 순간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이시여.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시옵소서.’

그때였다.

로렌스 진영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익숙한 얼굴.

왜소한 체격.

벤슨은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 내지 못했다.

‘설마 저 녀석이 내 상대였어?’

분명했다.

자신에게 뺨을 얻어맞았던 소년병.

그 녀석이 대전사랍시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에, 벤슨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살았다고.

그의 눈에 케빈은 마치, 면죄부(免罪符)처럼 보였다.

* * *

펄럭.

마지막 대결이 시작되었다.

벤슨은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깃발이 대결의 시작을 알렸는데도, 곧바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어. 아무리 승패가 결정된 싸움이라지만, 설마 너 따위 녀석을 마지막 대전사로 내보낼 줄은 몰랐거든.”

히죽.

웃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기쁜 마음을 좀처럼 숨기질 못했다.

“뭐, 나름 복수를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자의든, 혹은 타의든 간에. 너는 지금 네가 모시는 주군에게 버림을 받은 거야. 생각해 보라고.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되는 비리비리한 너를, 네가 명령권자라면 마지막 대전사로서 내보내겠어?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이건 네가 그만큼 쓸모가 없다는 의미이고, 명령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네 미래는 결정되었어.”

슥.

검을 들었다.

그때까지도 케빈은 가만히 벤슨의 모습을 주시했다.

다리를 적당한 거리로 벌리고는, 검 끝으로 정확히 벤슨을 겨누면서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건방진 새끼.”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뒤늦게 자존심이 상했다.

저따위 녀석이 자신을 이겨 보겠다고 눈을 부라리는 모습에, 벤슨이 사나운 얼굴로 땅을 박찼다.

“죽어라!”

타닥.

벤슨의 움직임은 느렸다.

앞선 두 번의 대결이 워낙 차원이 달랐기에, 사람들의 눈에는 그리 빨라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벤슨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벤슨의 상대인 케빈은 한눈에 보아도 소년병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로 왜소했고, 그에 반해 벤슨의 체격은 상대를 완전히 압도했다.

명백한 전력 차이.

벤슨이 육중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두르자, 케빈은 살짝 고개를 틀면서 오히려 상대의 품을 파고들었다.

팟.

피가 튀었다.

케빈의 뺨에 혈선이 생겼지만, 케빈은 그에 개의치 않고 벤슨의 턱밑을 노리고 검을 아래에서 위로 찔러 넣었다.

턱밑은 갑옷으로 보호할 수 없는 부위.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벤슨은 팔을 들어 검을 막아 내더니, 동시에 다른 쪽 팔로 케빈의 복부를 그대로 후려쳐 버렸다.

캉!

퍼억!

케빈의 공격은 막혔다.

오라를 사용하지 않은 검은 강철을 뚫을 수 없었고, 복부를 강타한 공격에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케빈은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복부의 통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한번 상대의 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의 스피드는 생각보다 빨랐다.

농사와 허드렛일로 단련되었던 근육이 힘을 발휘하며, 갑옷의 팔뚝과 몸통 사이의 연결고리를 정확하게 베어 버렸다.

서걱!

“크윽.”

벤슨이 신음을 삼켰다.

예상치 못한 반격.

벤슨은 그대로 상대의 몸을 들이받아 버렸다.

케빈이 뒤로 튕겨 나갔고, 바닥을 뒹구는 모습에 그대로 달려들어 위에서 아래로 검을 찍어 내렸다.

“죽어!”

푹!

간발의 차이였다.

케빈이 재빠르게 피하는 바람에 검은 땅바닥에 박혔고, 케빈은 벌떡 일어나더니 벤슨과의 거리를 좁혔다.

집요할 정도로 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케빈과 벤슨. 소년과 성인의 신체적인 차이가 있는 만큼, 둘의 공격 거리는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케빈은 본능적으로 상대와 붙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얼굴이 베이고 땅바닥에 처박히면서도 절대 중심을 잃지 않았다.

캉!

카카캉!

검과 검이 정신없이 부딪쳤다.

분명히 벤슨이 신체적인 우위를 가지고 상대를 압도하고는 있으나, 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이 새끼가!”

벤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상했다.

상대는 소년병이다.

자신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기사의 작위를 얻은 케이스라면, 케빈은 근본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그런데 아직도 끝내질 못하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웬만해서는 적당히 놀아 주다 끝내려고 하는데, 독기가 가득한 케빈의 눈빛에 생각이 바뀌었다.

‘무조건 죽인다.’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조금 다칠지라도.

주제도 모르는 녀석을 처참하게 벌해 주고 싶었다.

“어딜!”

훙.

벤슨이 힘껏 휘두른 검에 케빈이 고개를 젖혔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

벤슨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방어를 어느 정도 포기한 자세로 폭풍같이 연계 공격을 몰아쳤고, 케빈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 냈다.

공격이 작렬할 때마다 케빈의 몸이 휘청거렸다.

검 너머로 전해지는 충격에 막아도 막은 게 아니었고, 벤슨의 공격에 어느새 케빈은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밀려 나갔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승부였다.

벤슨의 승리.

다른 결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피지컬의 차이가 압도적이었고, 겨우 한두 달만으로는 기사를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없었다.

카앙!

“……!”

케빈의 팔이 튕겨 나갔다.

상대의 힘을 버티질 못했다.

벤슨은 기회를 포착했고, 전력을 다해 후속 공격을 시도했다.

화악!

바람을 가르는 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케빈이 같이 공격을 시도하는 모습에, 벤슨은 가슴을 내주고 이대로 마무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저따위 검으로는 내 갑옷을 뚫지 못해.’

무성의 대결.

갑옷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다.

벤슨의 검이 케빈을 가르기 직전.

순간, 벤슨이 눈을 부릅떴다.

서걱!

팟!

빨갛게 일어나는 검.

케빈의 검이 벤슨의 갑옷을 가르며, 수십 방울의 핏방울이 벤슨의 눈앞으로 튀어 올랐다.

로만은 말했었다.

귀혼마공은 고통과 희생을 대가로 하는 대신, 그 어떤 방법보다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이라고.

그 말은 옳았다.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 버린 날부터.

케빈의 머릿속에는 귀혼마공이 자리를 잡았다.

-죽여, 죽여, 죽여!

-저 새끼가 지금 널 아프게 하고 있잖아!

-당장 복수해!

귀혼마공의 자아(自我)들이 떠들어 댔다.

그것은 환청이었다.

실존하지 않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귀혼마공의 대가.

케빈은 빨갛게 달아오른 눈빛으로 벤슨을 상대했다.

육체의 통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벤슨의 거대한 주먹이 복부를 강타할지라도, 그건 팔을 자를 때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참았다.

고통을 억누르고,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위!

-조심해!

본능이 말했다.

상대가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두를 것이라고.

케빈은 귀혼마공의 말을 믿었고, 간발의 차이로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벤슨의 검이 살벌하게 눈앞을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케빈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주군에게 쓸모 있는 검이 되고 싶어.’

크리스는 대전사로 선택을 받았다.

3성의 기사를 이길 수 있다고 신뢰 어린 발언을 하는 그 모습에, 케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먼저였다.

크리스보다도 먼저 로만을 따르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재능의 차이로 중용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자신의 가족은 로만에게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자신은 대체 로만을 위해 무엇을 하는 걸까.

크리스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로만의 신뢰를 받으며 그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고 싶건만,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로만을 모욕하는 벤슨을 보고도 가만히 얻어맞는 것뿐이었다.

열등감이라고 해도 좋다.

과한 충성심일 수도 있다.

케빈은 복수하고 싶었다.

로만을 모욕한 벤슨의 입을 찢어 버리고, 자신 또한 쓸모 있는 검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때였다.

화악!

벤슨의 공격.

상대는 승리를 확신했다.

가슴을 내주는 대가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건 케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저지른 실수였다.

‘귀혼마공.’

-캬캬캬캭!

-죽여!

일말의 마나.

빨간 기운이 검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찰나의 시간밖에 사용할 수 없는 힘이지만, 그건 분명히 강철을 갈라 버릴 힘이 있었다.

서걱!

갑옷을 베었다.

그 너머의 살갗 또한 베이며, 붉은 핏방울이 눈에 튀어 올랐다.

“……!”

벤슨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극심한 통증에 표정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살려고 황급히 케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하지 않았다.

어깻죽지의 살점이 찢겨 나갔다.

벤슨의 검은 나약한 육체를 단번에 걸레짝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그의 가슴팍이 완전히 열려 버렸다.

달려드는 케빈.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어깻죽지의 살점이 더욱 처참하게 찢어지는데도, 케빈의 시야에는 오로지 벤슨의 상처 부위만이 보였다.

한때는 손가락이 살짝 베이는 상처에도 호들갑을 떨었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 살아가던 아이는, 인생의 풍파에 완전히 다르게 커 버렸다.

케빈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순간 벤슨과 눈이 마주쳤다.

케빈을 무시하던 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드는 순간, 케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처 부위를 쑤셔 버렸다.

푹!

“크악!”

벤슨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마나를 사용할 힘이 없었다.

오로지 육체적인 힘만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고, 케빈은 벤슨이 무너지는 자세 그대로 그 위에 올라타서는 상체를 깔아뭉갰다.

그리고는 검날을 직접 움켜쥐고는 상대의 상처 부위를 쉴 새 없이 내리찍었다.

손이 베이고 통증이 일어났지만, 그는 오로지 상대를 죽이는 것에만 매달렸다.

푹! 푹!

푸확!

“끄르르륵.”

칼이 빠질 때마다 피가 튀었다.

피거품을 물며 고통을 호소하던 벤슨은, 피로 물든 손으로 케빈을 밀어내며 살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애처로운 손길은 아무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케빈은 상대가 눈을 찌르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어도, 끝까지 그의 상처 부위를 난도질하며 공격을 가했다.

벤슨의 몸이 들썩였다.

더 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그러고도 수차례나 상처 부위를 쑤시고 나서야, 케빈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악, 하악.”

벤슨의 상태.

인간의 육신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마지막 대결.

승자는 케빈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케빈의 모습.

악귀와도 같았다.

아무리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싸움이라지만, 그 잔인한 손속에 몇몇은 입을 틀어막을 정도였다.

케빈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얼굴은 피로 물들었다.

찢겨 나간 어깨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지만, 그는 상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힘겹게 내딛는 걸음 한 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케빈이 로만의 앞에 도착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만의 무덤덤한 눈빛에, 케빈은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다녀왔습니다.”

그 말에.

로만은 케빈에게 상을 내렸다.

“고생했다, 케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케빈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승부는 끝났다.

로렌스와 바르코의 대전사 전투.

사람들은 모두 바르코가 승리할 것이라 말했지만, 그 결과는 카이로 왕국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3전 3승.

로렌스의 압승.

그리고 그 중심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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