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대전사 전투 (3)
랭킹의 유례는 발할라 제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대륙 최남단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열대 밀림에 둘러싸인 척박하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었다.
전사들의 성지라 불리는 발할라. 명예롭게 싸우다가 죽은 이들에게 축복을 내린다는 사후세계(死後世界)로 가기 위해, 발할라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다.
특히 발할라 제국의 아이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몬스터를 상대하는 성인식을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불구가 될지라도 승리했다는 사실에 부모가 기뻐할 정도로 상당히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발할라.
그들은 항상 본인들의 무력을 증명받길 바랐다.
단순히 승리했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명확하게 기록하며 누가 제일 강한지를 문서로 남겼다.
그것이 바로 랭킹의 시초였다. 처음에만 해도 발할라만의 문화였으나, 발할라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부터 랭킹은 하나의 문화로서 대륙 전역에 퍼졌다.
랭킹은 발할라가 주관했다.
명확한 증거를 참고해서 랭킹을 정리했고, 카이로 왕국 또한 100위까지의 강자를 명단에 올렸다.
49위의 호메로스.
그의 등장은 당연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르코가 방랑 검사를 대전사로 내보내다니.’
로렌스 자작이 절망 어린 표정을 보였다.
방랑 검사.
카이로에서 그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호메로스는 베르게와 마찬가지로 A급 용병 출신이었는데, 하나의 집단으로서 명성을 쌓은 베르게와는 다르게 개인의 무력으로 인정을 받은 케이스였다.
그가 방랑 검사라고 불린 이유는 왕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강자와의 대결을 즐겼기 때문이었다.
3성의 검사였던 호메로스는 수많은 결투를 치르며 명성을 쌓아 갔고, 그 과정에서 랭킹 49위에 오르는 업적을 이루었다.
만약 그의 이야기가 여기까지였다면.
로렌스 자작은 이토록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메로스는 최근에 30위의 수문장이라고 불리는 4성 검사와 대결을 펼쳤다.
그 대결에서 패배하며 3성의 한계를 보여 주었지만, 결투 끝에 깨달음을 얻은 그는 한 단계 발전했다.
4성의 영역.
호메로스의 소식이 왕국을 강타했다.
모두가 4성 검사를 영입하기 위해서 탐을 냈고, 호메로스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천정부지로 상승했다.
그런 존재가.
지금 대전사 전투에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과거의 호메로스였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이름에 패배를 직감했을 텐데, 현재의 호메로스는 동북쪽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는 무적의 검사였다.
승리를 확신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람들은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닌데도, 자신들도 모르게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호메로스의 상대로 나설 로렌스의 대전사는 사실상 죽은 목숨이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로만 드미트리가 이번 대결에서는 백기를 들고 기권을 선언하리라고 생각했다.
로만은 호메로스가 누군지 몰랐다.
다만.
사람들의 반응을 떠나, 호메로스의 기세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강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재밌네.’
씰룩.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삶은 예상할 수가 없다.
로만은 정보 길드를 통해 바르코의 행보를 조사했고, 그들이 골든 뱅크에서 돈을 빌려 베르게 용병단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기까지가 외부에 드러난 정보였다.
현재 로만의 능력으로는 바르코가 숨긴 3할의 힘을 확인할 수 없었고, 그렇게 결전의 날이 밝아 버렸다.
그리고 지금.
바르코는 3할 이상의 힘을 보여 주었다.
거액을 들여 플레어를 동원한 것으로도 모자라, 4성 검사를 고용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만약 이따위 정보전(情報戰)으로 마교의 능구렁이들을 상대했다면, 아마도 나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이 날아 버리고 말았겠지. 하지만 바르코를 상대로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상대가 힘을 숨긴 것처럼, 그들 또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전쟁을 앞두고.
로만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책에서 설명되는 강자들을 만날지라도 문제가 없도록.
화덕의 불길 속에서 강철을 수도 없이 두드리며, 부족한 정보 능력을 대신해 자기 자신을 단련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재밌었다.
강자와 싸워 볼 기회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창백해질 정도의 강자라면, 그것은 분명히 이 세상의 기준으로 삼기에 적합했다.
척.
“나는…….”
자신을 소개하려고 할 때였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로만의 손목을 잡았다.
“기권하세요.”
플로라였다.
로렌스 자작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호메로스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대는 랭킹 49위의 호메로스예요. 게다가 단순한 랭커가 아니라, 4성의 영역에 들어서면서 앞으로 30위 이상의 랭커로 올라갈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는 강자라고요. 그런 사람을 당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계획은 완전히 틀렸어요. 당신은 로렌스의 희생을 강요했었고, 지금은 우리가 변수의 대가를 치를 차례에요. 그러니까 뒤로 물러나요. 기권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다음 대결에서 로렌스의 기사가 2번째 승리를 따내길 간절하게 빌어요.”
플로라.
로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감정은 복잡했다.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득만을 바라는 로만이 혐오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떤 목적이었든 간에 유일하게 로렌스를 도와준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건 패배가 명백한 싸움이다.
호메로스가 로만을 살려 줄 이유는 없기에, 플로라는 현실적으로 기권을 택하길 바랐다.
그녀의 말이 옳다.
로만이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고 할지라도, 호메로스의 명성 때문에 로만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싫습니다.”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걸어가려는 모습에, 플로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다가 진짜 죽는다고요! 이건 엄연히 로렌스의 일이에요. 승산이 없는 싸움에, 당신이 목숨을 걸 이유는 없어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로만은 플로라를 돌아보지 않은 채, 호메로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절대자라도 되는 듯한 태도.
사람들을 굽어보는 호메로스의 모습에,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로만의 승리욕이 강하게 끓었다.
“제 마음입니다. 당신에게 일일이 설명하기 싫으니까, 지금부터는 제 앞에서 걸리적거리지 마십시오.”
툭, 내뱉는 말.
플로라가 어떤 표정일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관계는 여기까지기에.
로만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호메로스를 마주하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말했다.
“나는 로렌스의 로만 드미트리라고 한다.”
대전사 선언.
기어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 *
펄럭.
깃발이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대결과 같은 적극성은 없었다.
호메로스도, 그리고 로만도, 먼저 달려들지 않고 차분한 표정으로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내가 이따위 잔챙이나 상대해야 한다니.’
호메로스는 이번 대결에 흥미가 없었다.
상대의 소문은 들었다.
한때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조롱을 받았으나, 블러드 팽을 토벌하고 이번 전투에 개입하면서 완벽하게 달라졌다는 평가를 듣는 존재.
플레어를 파괴할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최소 2성의 오라 검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호메로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개인적인 사정만 아니었다면 당장 페르난도에게 도전하는 건데.’
페르난도는 4성의 검사.
30위의 수문장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호메로스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마음으로 아득바득 4성의 경지에 올랐다.
이제는.
페르난도를 상대할 힘을 얻었다.
곧바로 랭킹전을 준비하던 호메로스였으나, 그가 소속된 용병 길드의 부탁으로 일을 잠시 미루었다.
“호메로스. 대전사 전투에 한 번 나가는 대가로 거액을 받기로 했네. 자네가 페르난도와의 대결을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이번 한 번은 우리의 입장도 고려해 주게. 상대는 3성의 검사도 보유하지 못한 로렌스라는 변방의 가문이고, 자네로서는 가벼운 몸풀기도 되지 않을 정말 싱거운 싸움일 걸세.”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호메로스는 A급 용병패를 얻은 이후에 제대로 된 임무를 받지 않았다.
왕국을 떠돌며 강자와 대결하기 바빴고, 그 자금은 고스란히 용병 길드의 배려로 해결할 수 있었다.
기브 앤 테이크였다.
호메로스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용병 단체는 호메로스를 통해 명성을 쌓았다.
그렇게 4성의 경지에 오른 호메로스로서는, 길드장의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따분한 순간이었다.
멀리 변방에까지 와서 얼굴도 모를 녀석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표정에서부터 지루함이 보였다.
‘빨리 끝내자.’
전력을 다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딱 돈을 받을 만큼만.
호메로스가, 가볍게 땅을 박차며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확!
빨랐다.
분명히 호메로스의 기준에서는 ‘가벼운’ 정도의 수준이었으나,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크리스와 얀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랭커는 천외(天外)의 세계.
사람들은, 로만이 호메로스의 공격을 받아 내지 못하고 일격에 목이 달아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앙!
공격을 막았다.
호메로스가 곧바로 전진 스텝을 밟으며 연계 공격을 펼치자, 로만은 물러나지 않고 대응했다.
캉!
카카캉!
순식간에 공방을 주고받았다.
호메로스는 3성의 오라면 충분히 상대를 제압하리라 생각했는데, 오라를 두른 검이 부닥치는데도 로만은 밀려나는 기색이 없었다.
황당한 장면이었다.
로만의 검에는 이게 오라인지도 의심될 정도로 미약한 오라가 전부인데, 그따위 오라로도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이것 봐라.’
이상했다.
상식 밖의 상황.
흥미가 돌았다.
로만이 어떤 방식으로 오라를 발현하는지 궁금했고, 시험의 목적으로 3성의 오라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전력은 다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콰릉.
콰르르르릉.
내부가 들끓었다.
마나의 힘이 휘몰아치며 검에서 오라가 폭발했고, 숙련된 3성의 오라는 이대로 로만을 끝장내는 것처럼 보였다.
얀손의 오라와는 차원이 달랐다.
얀손은 가까스로 3성의 경지에 오른 검사였다면, 호메로스는 3성의 경지에서 닳고 닳아 4성에 오른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일격.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호메로스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이번만큼은 로만이 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야.”
사나운 목소리였다.
호메로스가 시선을 주자, 로만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번 막아 봐.”
번뜩.
시야가 멀었다.
그게, 호메로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4성 검사와의 대결.
흥분되었다.
피가 끓었고, 로만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대결을 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호메로스는 이번 대결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지 못했으면서도 얕보는 태도를 보였다.
‘내가 만만하다 이건가.’
크리스 때는.
이해했다.
평판이 그러했기에.
하지만 최근에 계속 과거와는 달라진 행보를 보여 주는데도, 자신을 무시하고 섣부른 태도를 보여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로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목숨을 걸고 대결을 펼치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상대를 알지도 못하는데 자신을 맹신하는 자신감을 보여 주는 걸까.
김이 식었다.
자신은 이번 대결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염화신공으로 천마신공의 기반을 닦았고, 이제는 천마검법의 초반부 삼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모자랐다.
본래의 힘을 10퍼센트도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 로만은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발전하려고 했다.
그런 자신을.
호메로스는 얕보았다.
자신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이 자리에 나선 것이 아니다.
검사로서 호메로스와 대결해 보고 싶었고, 궁극적인 목적은 타인의 관심이 아니라 바르코에 대한 복수다.
고로.
생각을 바꾸었다.
상대가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다면.
굳이 대련을 길게 끌 이유가 없었다.
“야.”
화악.
마나를 끌어올렸다.
상대의 방식과는 달랐다.
잔잔한 물결처럼 내부에서 일어나는 마나는, 검을 휘감으며 주변의 마나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천마검법 삼초식.’
천마검법은 형(形)이 없다.
검을 휘두르는 사람 마음대로.
상대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변칙적인 공격에다, 그 위력은 초식에 따라 배수로 상승하게 된다.
무림을 정벌한 무공.
전력을 다했다.
만약 이번 공격을 버틴다면, 호메로스의 자신감을 인정하고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이었다.
“한번 막아 봐.”
번뜩.
검을 휘둘렀다.
그게 끝이었다.
호메로스는 반응조차도 못했다.
자신이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는 인식에 머무른 채로, 그의 검과 몸뚱이가 동시에 갈라지며 피가 뿜어졌다.
푸확!
단 일격.
베르게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승부는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