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615)

47화 대전사 전투 (2)

양측의 합의로.

대전사 전투가 결정되었다.

로렌스는 성문을 열고 나왔고, 넓은 평야에 바르코와 로렌스의 병력이 대치하는 형태가 되었다.

전령을 보내고 일주일 만에 이루어진 상황.

수도에서 내려온 심판관은,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에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에르테스 백작이라고 한다. 지금부터 바르코 가문과 로렌스 가문의 대전사 전투를 진행할 것이며, 양 가문은 30분 뒤에 가문을 대표할 세 명의 검사를 지정하고 대진표를 제출하도록. 대전사 전투는 발할라의 축복을 받은 신성한 자리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간에 양 가문은 결과에 승복해야 하며, 만약 그를 어기는 가문이 있다면 카이로 왕국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에르테스 백작.

평야의 흙먼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예복을 차려입은 그는, 이번 대결을 위해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인물이었다.

대전사 전투는 그 자리를 주관하는 인물의 권위(權威)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양측이 합의하자마자 중앙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고, 에르테스 백작이 직접 걸음을 옮겼다.

착.

에르테스 백작은 미리 준비한 상석에 앉았다.

하인들은 그를 위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와인을 홀짝이며 때를 기다렸다.

양측.

바르코와 로렌스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진표를 작성하기 위함이었는데, 바르코의 움직임을 빤히 살펴보던 로만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대진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로렌스 자작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일주일 전.

대전사 전투가 결정되고 로렌스는 미리 대진표를 정해 두었다.

로만이 선봉으로 나서서 1승을 확실하게 확보하고, 2번째로는 로렌스의 기사, 마지막에 크리스가 출전해서 전투를 마무리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르코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수도에서 로렌스까지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텔레포트 마법진과 같은 마법 문물이 발달한 시대에 에르테스 백작은 무려 일주일의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이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르코는 이자의 압박을 받을 텐데, 그들은 조금도 조급해 보이지가 않았다.

“바르코 가문이 고의로 시간을 지연시킨 것 같습니다. 그들로서는 외부의 고수를 초빙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중앙 정부의 인맥은 그걸 가능케 하는 힘이 있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대결이 성사된 것은 그들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들의 선봉으로 외부의 고수가 나설지도 모르겠군.”

“그렇진 않습니다.”

로만의 시선이 바르코 진영을 향했다.

부산스러운 로렌스와는 다르게, 그들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한 모습이었다.

“바르코는 선봉으로 외부의 고수를 내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우리가 선봉으로 가장 강한 검사를 내보내도록 유도하는 행동을 취했을 겁니다. 그것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적들의 최선을 대비해 대진을 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이 무엇인가?”

“크리스가 선봉에서 1승을 확보하고, 제가 2번째 차례로 바르코가 준비한 카드를 상대하겠습니다.”

“……!”

다들 놀란 눈빛을 보였다.

바르코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

분명히 만만한 상대가 아닐 텐데, 로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로렌스는 남이다.

로만은 남의 일에 목숨을 걸었다.

플로라와는 다르게 로만의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로만의 결단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로렌스 자작이 말했다.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만약 로렌스 가문이 대전사 전투에서 승리하고 멸문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로렌스의 은인으로서 평생 귀빈의 대우를 받을 것이다.”

플로라.

그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로만에게 존경심을 보였다.

* * *

시간이 되었다.

바르코는 시간을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선봉으로 나설 검사의 모습을 공개했다.

“나는 바르코의 얀손이다.”

얀손.

그 이름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얀손은 바르코가 자랑하는 3성의 검사였고, 동북쪽 일대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에 반해.

로렌스의 대표는 초라했다.

“나는 로렌스의 크리스다.”

크리스.

그가 덤덤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크리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얀손보다도 강하다고 알려진 조나단의 제자이며, 미남 검사로서 동북쪽 일대 최고의 천재이지 않은가.

문제는 대전사 전투가 앞으로의 가능성을 겨루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와 재능은 크리스가 우위일지 몰라도, 당장의 수준을 비교했을 때는 3성과 2성의 대결이었다.

오라의 차이.

검술 실력만으로는 좁힐 수 없는 영역이었다.

상식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크리스로는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왜 크리스를 내보냈지?”

“애꿎은 재능만 죽어 나가겠네.”

“드미트리가 탄식할 일이구나. 로렌스의 싸움에 드미트리의 재능이 죽어 버리다니.”

사람들의 반응.

크리스의 귀에도 들렸다.

그로서도 본인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결단을 내리는 데는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군이 내게 말했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로만의 말.

그것이 결단의 이유였다.

랭커들 중에는 오라의 차이를 무시하고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고수들이 있지만,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기에 예외라고 불렸다.

상식을 벗어난 일.

로만은 크리스가 상식을 벗어나서 3성의 검사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크리스는 고민하지 않고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케빈과 싸우던 날.

별것도 없는 애송이를 투견(鬪犬)으로 만들어 버린 로만의 가르침에, 크리스는 맹목적인 신뢰를 얻었다.

믿었다.

로만은 절대적이다.

설령 이 자리에서 죽을지라도, 크리스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게, 내가 우물을 벗어나 주군을 따르는 이유야.’

얀손을 마주했다.

소문으로 수도 없이 들었던 바르코의 고수.

강해 보였다.

그렇기에, 크리스는 웃음을 보였다.

얀손을 쓰러트린다면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의미기에.

이윽고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시작!”

타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얀손과 크리스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간의 평가는 허명이 아니었다.

얀손은 빨랐다.

그의 검에서 오라가 폭발적으로 살아나더니, 크리스를 단번에 죽일 기세로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확!

간발의 차이.

크리스가 공격을 피했다.

순간적으로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얀손의 허점을 공략하려 했지만, 얀손은 검을 회수하지 않고 공격하는 자세 그대로 연계 공격을 펼쳤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오라는 입을 바짝 마르게 했고, 한 번이라도 공격을 당하는 순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크리스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제대로 공방을 주고받기보다는,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에 집중했다.

“쥐새끼 같은 녀석! 언제까지 도망만 갈 것이냐!”

얀손이 으르렁거렸다.

상대의 심기를 긁으며 정면 대결을 유도하려 했으나, 크리스는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3성과 2성의 오라.

정면 대결은 자살행위였다.

자존심은 버렸다.

도망치는 모양새가 꼴이 사납더라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주군과 처음 대련을 했을 때. 그때의 주군은 오라를 사용하지 않고도 나를 쓰러트렸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했던 날, 나는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었지. 아무리 오라가 강력한 힘이라 할지라도 공격은 성공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아.’

피했다.

피하고, 또 피했다.

얀손의 말처럼 쥐새끼처럼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크리스는 틈이 보일 때마다 검을 찔러 넣었다.

훅!

한 번의 번뜩임.

얀손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살짝 긁힌 정도였지만, 먼저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에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콰르르르르릉.

오라의 폭발.

3성의 오라가 강하게 들끓었다.

그때부터는 피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라로 들끓는 검이 공간을 갈랐고, 검의 부피보다도 더 넓은 범위가 오라의 여파에 휩쓸렸다.

3성의 오라.

급이 달랐다.

공간을 휩쓸며 들어오는 공격에, 크리스는 숨을 들이켰다.

콰앙!

“쿨럭.”

피를 토했다.

살짝 빗겨서 방어했는데도, 내부가 완전히 뒤틀려 버린 느낌이었다.

상식적인 결과였다.

사람들이 성의 구분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99번을 잘해도 단 한 번에 패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살짝 비틀거리는 크리스.

얀손은 기세를 잡았다는 생각에 득달같이 밀어붙였다.

내부의 충격에 스텝은 재빠르지 못했고, 이대로라면 얀손의 검에 목이 날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빌어먹을.’

크리스.

그는 로만과 달랐다.

로만은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서도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실력을 보유했지만, 크리스는 아직 상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었다.

속이 역했다.

어쩌면 자신이 황새를 따라가다 다리가 찢어져 버린 뱁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대로 죽긴 싫었다.

이를 악물었다.

아직.

자신은 로만에게 배운 게 없었다.

드미트리 기사단의 동료들은 로만을 따르겠다는 선택에 비웃음을 보였다.

그건 정말 멍청한 선택이라고 비난하는 동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로만을 따랐는데,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쪽팔리지 않는가.

이대로 죽는다면, 크리스는 죽어서도 동료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상식을 벗어나자.’

로만은 말했다.

왜 그딴 식으로 오라를 사용하느냐고.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에 그의 상식이 무너졌으나, 아직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스승인 조나단도.

나아가, 최초의 오라 검사라고 알려진 알렉산드로 황제조차도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훈련했다.

상식을 벗어나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크리스는, 얀손의 오라를 마주하며 로만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나의 무분별한 분출은 오라의 힘을 백 퍼센트 발휘하지 못해. 주군이 플레어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일말의 마나로 엄청난 위력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나도 일점에 오라의 힘을 집중시키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생사의 갈림길.

눈앞에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얀손의 모습이 보였다.

“죽어!”

그가 검을 휘둘렀다.

동작은 컸다.

자신의 힘을 맹신하는, 크리스가 정면에서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깔려 있었다.

크리스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다른 사람들처럼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로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배웠던 것처럼, 최대한 마나를 일점에 모아 오라를 응축시켰다.

화악.

오라의 발현.

오라의 크기는 작았다.

얀손은 비웃음을 보였고, 본인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카앙!

“……?!”

두 검의 격돌.

크리스의 오라는 부서지지 않았다.

위태롭게 타오르면서도 상대의 공격을 버텨냈고, 그건 얀손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 순간.

번쩍.

서걱!

마나가 폭발했다.

크리스의 주특기인 빠른 공격에, 검이 번뜩이며 그대로 얀손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푸확.

하늘에 흩뿌려지는 피.

둥실 떠오르는 얀손의 머리에,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충격에 물들었다.

첫 번째 대결.

승자는 바로 크리스였다.

툭.

데구루루.

얀손의 머리가 땅바닥을 굴렀다.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미친.’

‘3성의 검사가 2성의 검사에게 패배했다고?’

‘말도 안 돼!’

상식 밖.

충격적인 결과였다.

크리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고, 그제야 로렌스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미쳤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변이었다.

바르코가 당연히 승리하리라고 생각했던 선봉전에서, 크리스는 당당하게 1승을 쟁취했다.

이제.

딱 1번만 더 이기면 된다.

바르코를 궁지에 몰았다는 생각에, 로렌스의 병사들은 벌써부터 승리한 것처럼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다.

그러한 상황에.

바르코 자작은 당황했다.

‘……얀손이 패배하다니. 이것으로 내가 생각한 필승 전략은 엉망이 되어 버렸어. 얀손이 승리했다면 2번째 대결에서 승부를 끝내 버릴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3번째 대결이 중요해졌어.’

황당하게도.

그는 2번째 대결의 승패는 걱정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필승의 카드를 완벽하게 믿을 수 없었다면, 거금을 들여 그를 이 자리까지 불러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얀손의 패배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허리춤에 맨 검에 손을 올려놓으며 웃는 얼굴로 이름을 밝혔다.

“나는 바르코의 호메로스라고 한다.”

호메로스.

그 이름에.

방금까지 승리를 자축하던 로렌스의 병사들이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호, 호메로스라고?”

“헉.”

“호메로스가 왜 여기에 나타나?!”

개인의 무력을 순위로 나타내는 랭킹.

발할라의 신전이 확실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책정하는 그 순위는, 매년 갱신되어 전 대륙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4성 검사.

그는, 왕국에서 49번째로 강하다고 평가받는 랭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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