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참전 (3)
플레어의 파괴.
그것은 퇴각 신호였다.
로만과 그의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물러났고, 바르코만 닭 쫓던 개가 되었다.
“후욱, 후욱.”
일련의 상황.
턱밑까지 차오른 숨에, 크리스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로만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오라로 타오르는 그의 검에 바르코의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래서인지 귀공자 같았던 금빛 머리칼이 피로 완전히 젖어 버렸다.
크리스는 땀인지 피인지 모를 물방울을 벅벅 닦아 내더니, 순간 피식 웃음을 보였다.
‘확실해. 주군의 방식이 옳았어.’
이번 전투.
크리스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라를 사용했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폭발적인 분출로 오라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로만을 상대하면서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오라의 크기를 줄였다.
대신 최대한 오라를 응축시키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격렬한 전투에도 마나의 소모는 크지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왜 로만을 따르냐는 주변의 무시를 받으면서도, 크리스는 성장의 가능성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호흡을 가라앉혔다.
뒤늦게 주변을 파악하자, 크리스는 자신의 상태는 양반이었음을 알았다.
“허억, 허억.”
“진짜 죽을 것 같아.”
“웩.”
로만의 병사들.
그들이 바닥에 쓰러져 시체처럼 있었다.
그나마 크리스 정도 되는 인물은 로만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고립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따라붙었다.
전투의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극도로 격렬했던 시간은 체력을 완전히 고갈시켰고, 바닥에 쓰러진 사람 중 일부는 고개를 처박고 토를 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그중 사망자는 보이지 않았다.
30명의 병사는 그 누구도 낙오되지 않았고, 크게 중상을 입은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진실을 알았다.
자신들이 어째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병사들은 다들 힘겨운 얼굴을 하면서도, 홀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 로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치지도 않나.’
‘진짜 괴물이었어!’
로만.
그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분명히 가장 선두에서 그 누구보다도 위험한 역할을 맡았으면서도, 로만은 조금도 힘들어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로만이 도륙한 병사만 십수 명이었고, 베르게 용병단의 단장으로 보이는 이가 달려들었는데도 로만은 마치 병사1을 상대하는 것처럼 손쉽게 처리해 버렸다.
괴물.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사병 시험에서 로만의 강함을 경험해 보았으나, 오늘의 전투는 상식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경외심(敬畏心).
병사들은 피로 흠뻑 물든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로만이 잔인해 보이기보다는, 자신의 주군이 이토록 강하다는 사실이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다들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로만이 말했다.
“우리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로렌스로 돌아가자.”
복귀.
승전고를 울린 영웅으로서, 지금은 금의환향(錦衣還鄕)할 차례였다.
* * *
쿵.
성문이 열렸다.
당당하게 입성하는 로만과 병사들의 모습에, 양쪽에서 도열하고 있던 로렌스의 사람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다.
“꺄아아아악!”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드미트리의 영웅!”
평판이 뒤바뀌었다.
한때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로만 드미트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마치 대단한 위인을 영접하는 것처럼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인식은 이번 사건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블러드 팽을 토벌한 사건으로 적어도 로렌스에서는 로만의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로렌스를 위기에서 구해 주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드미트리의 영웅.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백마를 탄 왕자처럼 나타나 플레어를 부숴 버리는 모습은, 로렌스의 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신 덕분에 우리가 살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 로렌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
여인들이 난리가 났다.
거리로 몰려들어 로만을 만져보고자 손길을 뻗어 보는 그녀들의 모습에, 로렌스 자작이 쓰게 웃었다.
‘정말 아깝구나.’
로만.
그는 걸출한 인재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로만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보았지만, 오늘 플레어를 파괴하는 장면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재능이었음을 증명했다.
멀리 있어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장 선두에서 바르코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플레어를 직접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오라를 사용하는 장면만큼은 똑똑히 보았다.
드미트리가 호랑이를 낳았다.
그리고 만약 일이 틀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호랑이는 자신의 사위였을 것이다.
군침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의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면 갈증이 일었지만, 로렌스 자작은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앞으로는 플로라의 인생을 존중해 주기로 약속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탐이 나고 매력적인 사내라 할지라도, 그와의 결혼은 플로라가 선택할 문제다. 그러니 내가 나설 이유는 없다.’
욕망을 억눌렀다.
그리고는.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로만의 모습에, 활짝 웃으며 환대해 주었다.
“드미트리의 영웅!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갑네!”
환영식은 짧았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로만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플로라였다.
격렬한 전투로 그녀의 행색은 엉망이었다.
치맛자락은 찢겨 나가고 얼굴 여기저기도 검게 그을렸지만, 플로라는 그에 개의치 않고 말했다.
“우리는 계획대로 미끼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어요. 만약 당신이 로렌스를 버렸어도 우리는 비난할 자격이 없었을 테지만, 끝까지 버리지 않고 로렌스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아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로만과의 첫 만남이 좋지만은 않았기에, 그의 앞에서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로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로렌스는 함락되었을지도 몰랐다.
로만이 말했다.
“약속했던 대로 제 역할을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로렌스는 제가 예상한 만큼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
로만의 말.
순간, 플로라는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냥 감사 인사를 받으면 그만인데, 로만은 굳이 약속의 이행을 말하면서 차갑게 선을 그었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로만이 어떻게 말해도.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만은 로렌스의 은인이었고, 플로라는 어떤 이유였든 간에 도움을 주었던 결단에 감사한 마음이 있었다.
“로렌스가 예상한 만큼의 역할을 해냈다니 다행이네요. 당신은 내게 감사 인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로렌스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당신에게 꼭 은혜를 갚고 싶어요.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회의 자리에서 무엇이든 말해도 좋아요. 만약 아버지가 곤란한 기색을 보일지라도, 저는 무조건 당신의 편을 들어 보상을 받게 해 줄게요.”
진심이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을 발사하며, 플로라는 전장에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로만에게 감사했다.
로렌스를 위기에서 구해줘서.
힘든 선택이었을 텐데도, 끝까지 약속을 지켜 줘서.
로만이 플로라를 내려다보았다.
둘의 키 차이는 제법 컸고,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플로라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을 보였다.
“일단 회의실로 가시죠.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그때는 굳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로렌스의 회의실.
그곳에 수뇌부들이 모였다.
상석에 앉은 로렌스 자작을 필두로, 양쪽에 앉은 가문의 가신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의견을 말했다.
“지금 당장 바르코에 전령을 보내야 합니다. 그들은 공성전에서의 패배로 기세가 죽어 있을 테고, 플레어마저 잃었으니 더 이상의 공성전은 불가능할 겁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바르코에게 적절한 당근과 채찍을 제안해서, 이번 영지전을 이대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아직 바르코에는 많은 병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과 괜히 분란을 일으켜 위기를 자초하는 것보다는, 지나간 일은 묻어 두고 평화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로렌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신들의 의견은 통일되었다.
평화.
그들은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성벽이 무너질 뻔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바르코의 전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어떻게든 다음 전투를 피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로렌스 자작이 말했다.
“자네들의 의견이 옳소. 우리가 비록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아 첫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었으나, 로렌스의 힘으로는 언제까지고 바르코의 공격을 막을 수 없소. 그러니 지금 당장 전령을 준비해서…….”
“제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로만.
그가 말을 끊었다.
평소라면 가신들이 화를 내야 할 상황이었지만, 로만의 업적에 그들은 놀란 눈빛만 보였다.
로렌스의 회의.
사실 로만은 예의상 참석했을 뿐이지, 로렌스가 할 일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되지 않았다.
“발언하거라.”
“감사합니다.”
로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천천히 테이블 주변을 걸으며 입을 열었다.
“바르코를 상대로 공성전을 택한 것을 보면, 로렌스 자작님은 장기전의 이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르코는 아마도 금전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거액의 빚을 갚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로렌스를 함락시켜야만 하고, 그건 플레어가 파괴된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평화를 위해 전령을 보낸다면. 제가 감히 예상하는데,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은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라 피로 물든 전령의 머리일 겁니다.”
“크흠.”
다들 헛기침을 했다.
현실적인 공포에 애써 외면했지만, 로만의 말처럼 바르코가 평화를 받아들일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로만의 목소리가 변했다.
착 내려앉는, 숨통을 조이는 목소리가 로렌스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바르코는 문서를 위조해서 로렌스를 공격했습니다. 로렌스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갈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밖에서는 병사들이 성벽 밖의 시체를 나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르코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로렌스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로렌스를 건드린 극악무도한 인물들에게 어떤 복수를 하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로만의 발언.
가신들을 책망했다.
돌려서 말했지만, 그건 분명히 평화를 말하던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의 시체.
그것을 보고도 왜 분노하지 않느냐고.
강한 감정으로 들끓는 로만의 발언에, 로렌스의 가신들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단 한 사람.
로렌스를 대표하는 가주는 달랐다.
“우리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우리도 복수하고 싶고, 우리도 바르코에게 로렌스를 건드린 대가를 받아내고 싶단 말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것을 어찌한단 말이냐? 바르코는 아직도 수백의 병사와 베르게 용병단을 거느리고 있고, 그들과 계속해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차가운 현실이었다.
힘이 약하기에.
로렌스는 약탈을 당했고, 승리하고도 복수할 수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딱 하나. 방법이 있습니다.”
그때.
플로라와 시선을 마주쳤다.
잔잔했던 물 위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것처럼, 그녀의 동공에서는 큰 파문이 일었다.
“대전사(代戰士) 전투를 제안하십시오. 그것이, 병력의 차이를 넘어서 바르코에게 복수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대전사 전투.
가문을 대표해 승패를 가르는 싸움.
로만의 제안에, 회의실이 충격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