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615)

43화 참전 (1)

끼이이익.

쿵.

성문이 열렸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를 뚫고, 로렌스의 병사들이 득달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돌격!”

“크아아아악!”

수백의 병사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성벽 위로 플레어의 불길이 타올랐고, 바로 앞에는 성문을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병사라고 해 봤자 정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로렌스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이를 악물며 상대를 향해 그대로 들이받았다.

“죽어!”

푹!

“커억.”

양측의 군대가 격돌했다.

등 떠밀려 가장 최전방에 선 병사들이 서로 뒤엉켰고, 로렌스의 병사가 힘껏 찌른 공격에 바르코의 병사가 피거품을 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로렌스의 병사는 무기를 회수하고 다른 상대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로 옆에서 치고 들어온 공격에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서걱!

툭.

데구루루.

전투가 시작되었다.

본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병사의 얼굴처럼,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난전이 벌어졌다.

전투 초반.

시작은 로렌스의 우위였다.

성벽 위에서 발사되는 화살의 지원을 받아, 그들은 바르코의 병사들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퍽!

퍼퍼퍼퍽!

화살 사례에 바르코의 병사들이 무너졌다.

그들의 시체를 밟고 나아간 로렌스의 기사는,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갑옷을 자랑하며 눈앞의 적을 도륙해 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순식간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기사를 따라 로렌스의 병사들이 적진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무기에 쓰러지는 적군의 모습을 확인하며, 바르코의 전력이 크게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처음에야 의외의 반격에 바르코가 당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반전되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기는.”

“네 녀석 따위가 어딜!”

서걱!

푸확.

병사들 사이로.

학살극을 벌이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베르게 용병단이었다.

전투를 생업으로 삼은 그들은,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보였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난전 중에도 서로를 도우며 로렌스의 병사들을 도륙했고, 그들의 반격에 점점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상대가 기사라 할지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기사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오라를 완벽하게 다루는 시기부터였고, 가장 선두에서 싸우던 로렌스의 기사는 용병들의 협공에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다가 결국 사방에서 공격을 당했다.

푹푹!

“크아아악!”

살을 파고드는 고통.

기사는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그때부터였다.

분위기가 넘어갔다.

로렌스도 용병들을 고용하면서 병력을 보충했지만, 그들은 베르게 용병단처럼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성벽에서 겨우 50m밖에 되지 않은 거리를 전진했건만, 기세를 잃은 로렌스의 병사들은 당황한 얼굴로 살기 위해 발악할 뿐이었다.

하나둘.

사람들이 죽어 갔다.

공포가 전염되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자신의 친구였던 동료가 죽는 모습에 한 병사는 겁을 먹었다.

“우, 우린 끝났어.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 이상의 전력 차이.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사나운 맹수 무리를 마주한 오합지졸들은, 결사의 항전을 하겠다는 마음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다.

변수가 발생했다.

로렌스.

그들은, 미끼의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파악-!

화살을 발사했다.

벌써 수차례 반복하는 행동으로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플로라는 독기가 차오른 얼굴로 다음 화살을 먹였다.

그때였다.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할 그들은, 밀물에 밀려드는 모래처럼 속수무책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벌써 밀려서는 안 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로만의 계획.

그건 양동 작전이었다.

성문을 열고 로렌스의 병사들이 반격에 나서면, 바르코로서는 당연히 기회라는 생각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다.

그때가 로만이 말한 기회였다.

성문 앞에서의 전투로 바르코의 후방에는 병력이 많지 않을 테고, 로만은 그 타이밍을 노려 플레어를 박살 내 버릴 생각이었다.

플레어는 고가의 장비다.

다시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이 아니기에, 로렌스로서는 수성의 이점을 확보할 수 있다.

고로.

“물러나지 마라! 끝까지 버텨라!”

플로라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아직.

적들은 병력을 충분히 보내지 않았다.

바르코의 후방에는 많은 병력이 남아 있었고, 이대로라면 로만이 말한 계획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플로라의 외침에도 로렌스의 병사들은 버텨 내질 못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해 버렸고, 득달같이 밀려드는 바르코의 기세는 의지만으로 막아 낼 수준이 아니었다.

끝났다.

플로라는 밤을 새워 가며 병법을 공부했지만, 책에서는 말해 주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 버렸다.

‘우리의 수준을 알았어야만 했어. 약탈자인 바르코와는 다르게, 우리는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어.’

로렌스.

그들은 초식 동물이었다.

비옥한 토지에서부터 비롯되는 부로 평안한 삶을 살았을 뿐,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는 큰 힘을 들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발생했다.

바르코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약탈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던 세력이기에, 그들의 시선에서 로렌스는 너무나도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결과가 뻔한 싸움이었다.

바르코의 병사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로렌스의 병사 둘이 나서는 광경에, 플로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리에게 승산은 없어.’

로만 드미트리.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로렌스가 계획대로 미끼의 역할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들이 나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의미 없는 희생일 터.

그렇다면 로렌스의 선택은 자충수(自充手)가 되었다.

그래도 성벽을 끼고 버텼다면 하루 이틀은 더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성문을 열고 나서는 바람에 바르코의 병력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성은 수도 없이 포기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며칠 사이에 강인해진 플로라의 정신력은 끊임없이 답을 찾았다.

퍽!

바람을 가르는 화살 한 발.

발악했다.

설령 성이 무너지고 함락을 당할지라도, 플로라는 적에게 굴복하고 목숨을 구걸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안토니 바르코와 같은 쓰레기의 첩으로 전락하느니, 이대로 죽어 버리겠다는 게 플로라의 선택이었다.

그때였다.

“……?!”

저 멀리서.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플레어.

그들은, 공성 병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0분 전.

로만의 병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명령을 기다렸다.

“후우.”

이번 계획.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병을 지원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전투에 나설 줄은 몰랐고, 게다가 그게 바르코의 후방을 공격하는 미친 계획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목숨을 걸어야 할 시기가 너무 빨리 찾아왔다.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크리스와 케빈과는 다르게, 이제 막 로만을 따르기로 한 병사들은 초조한 티를 냈다.

그들의 마음.

이해했다.

그러나, 로만은 이해해 주는 것 이상으로 배려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는 본인들이 감당해야 할 현실이다. 나의 병사로서 살아남는다면 처음에 약속했던 포식자로서의 삶을 부여하겠지만, 생존의 여부는 결국 내가 아니라 본인의 힘이 필요한 문제다.’

지난 열흘.

로만의 병사들은 훈련에 돌입했다.

크리스의 채찍질로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했지만, 겨우 그 정도만으로는 로만의 눈에 차질 않았다.

병사들의 감정은 외면했다.

지금은 공감(共感)이 필요한 때가 아니다.

작전을 앞두고.

로만이 말했다.

“이번 작전은 처음에 설명했던 대로 바르코의 후방을 공격해, 그들의 공성 병기를 파괴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한다. 아마도 로렌스는 미끼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로렌스와 바르코의 전력 차이는 극심하고, 그로 인해 바르코의 후방에는 제법 많은 병력이 남아 있겠지.”

로렌스의 변수.

예상한 바였다.

로만은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고, 플로라가 생각한 최악이 로만이 생각한 현실이었다.

결국.

상식적으로는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로만과 마주치는 시선에, 병사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30명의 병사.

그들은 시험에 목숨을 걸었다.

기본적으로 강심장을 타고난 인물들이었고, 사지에 들어가는 상황에도 긴장할지언정 현실을 외면하진 않았다.

충분했다.

로만은, 계획을 위한 최소한의 인원을 갖추었다.

“나는 이번 작전에서 너희들에게 많은 역할을 바라지 않는다. 선두는 내가 맡을 것이다. 내가 앞에서 달려 나가 적들을 도륙하고 길을 열면, 너희들은 뒤에서 따라오며 잔당을 정리하면 된다. 명심해라.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공성 병기를 파괴하는 것이다. 피와 살육에 취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녀석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녀석을 사지에 버리고 갈 것이다.”

로만의 말.

병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언뜻 보면 잔인해 보이는 발언이었지만, 로만은 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본인이 선두에 서겠다고 말했다.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아직.

병사들을 믿지 못했다.

그렇기에, 로만은 본인 스스로를 믿고 적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역할을 맡겠다고 말했다.

이윽고.

“지금이다!”

때가 왔다.

로만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멀리서.

로만과 그 병력의 모습이 보였다.

바르코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지만, 그렇다고 전방의 병력을 곧바로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저게 뭐야?”

바르코 자작.

그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마도 상대가 회심의 일격을 준비한 것 같았으나, 그 조잡한 수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꼴에 저 정도 인원으로 우리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가. 하여간 전쟁을 잘 모르는 녀석들은 책상머리에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지. 여봐라. 지금 당장, 정신 나간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알겠습니다.”

척척.

병사들이 움직였다.

방패를 몸에 바짝 붙이고, 창을 내세워 적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전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기습을 감행하는 인원은 겨우 3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바르코의 후방에는 그에 3배나 되는 인원이 있었다.

게다가 그중에는 베르게 용병단의 단장과 기사들 같은 정예도 포함되었다.

바르코 자작으로서는 전혀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고, 적의 무모한 시도는 금방 정리되리라고 믿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도달했다.

상대가 로렌스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선두에 있는 사내가 홀로 땅을 박찼다.

확.

눈이 빙글 돌았다.

사내의 움직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조금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병사들 앞에 도달한 그는 병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건 자살행위였다.

병사들은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리며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고, 동시에 뒤에 있는 2선의 병사들이 방패 사이로 창을 찔러 넣으며 사내의 몸을 난도질하려 했다.

미래는 뻔히 보였다.

사내의 몸은 걸레짝이 되어 버릴 터.

상황을 관망하던 바르코 자작은, 뒤이어 벌어지는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서걱!

푸확!

피가 튀었다.

분명히 방패로 막았다고 생각했건만, 사내의 검에 병사들의 머리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곧바로 이어진 학살극(虐殺劇).

순식간에 방어 대형이 무너졌다.

그건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식을 벗어난 그런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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