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로렌스의 꽃 (2)
저벅저벅.
성벽 아래로.
한 사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성벽에서 내려보고 있는데도 걸음걸이에는 두려움이 없었고, 손에 쥐고 있는 깃발은 바람에 펄럭이며 문양을 드러냈다.
흰 사슴이 홀로 서 있는 모습. 바르코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에, 로렌스의 병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벽 위를 둘러보더니, 로렌스 자작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멈추었다.
“나는 바르코 자작님의 대리인으로서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세 가지 선택지를 줄 것이다. 첫 번째는 성문을 열고 나와서 투항하라. 바르코 자작님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아량을 지니신 분이고, 투항만이 너희들의 목숨을 구제할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첫 번째를 선택하지 않겠지. 그럴 생각이었다면, 지금 나와 마주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사내의 태도는 건방졌다.
기껏해야 의사를 전달하는 전령(傳令)인 주제에, 마치 본인이 바르코 자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두 번째는 우리와 전면전을 하는 것이다. 중앙 정부의 심판관이 보는 앞에서, 평야로 나와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가리자. 승부의 방식은 어떤 것이든 좋다. 백병전이든, 아니면 대전사 전투든. 우리는 너희들이 요구하는 방식을 따를 생각이다.”
백병전.
혹은, 대전사 전투.
귀족 가문들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귀족 간의 분쟁에서 공성전을 치르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상대 가문을 상대할 자신이 없으니 성벽 뒤로 몸을 숨긴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문제는 앞선 두 개의 방식에서 해결했다.
심판관은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방식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는데도 결과를 승복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귀족 신분의 심판관이 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로렌스 자작.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우리는 전쟁을 선포한 너희들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조의 빚이라고 언급한 문서는 위조되었으며, 우리는 너희와 전쟁을 할 명분도, 그렇다고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성문을 열고 나가서 로렌스의 백성들을 희생시킬 마음도 없다. 그러니 당장 돌아가서 바르코 자작에게 전해라. 어떤 경우에도 로렌스는…….”
“세 번째!”
말을 툭 끊었다.
사실.
이미 선택지는 정해졌다.
바르코가 예고한 당일에도 로렌스가 성문을 걸어 잠근 순간부터, 두 가문은 세 번째 선택지를 택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전령을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로렌스를 압박하기 위함이었고, 전령은 사나운 악귀가 되어서 겁에 떨고 있는 로렌스의 병사들에게 통보했다.
“귀족 가문으로서의 자부심을 버리고 성벽 안에서 결사의 항전을 하는 것. 지금부터 바르코 가문은 너희들의 의지를 받아들여, 공성전 과정에서 흘린 피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낼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령은 발걸음을 돌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도, 로렌스의 병사들은 차마 화살을 날리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첫 전투.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당장에라도 엄벌을 내릴 것 같았던 바르코 가문은, 전투 시작 30분 만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쾅!
“건방진 새끼들!”
바르코 자작이 쓰고 있던 투구를 땅바닥에 내던졌다.
조금 전.
전투의 양상은 예상과 달랐다.
바르코 가문의 병력은 로렌스보다 3배 이상 많았고, 단번에 성벽을 무너트릴 생각으로 사다리차를 이끌고 병력을 전진시켰다.
로렌스의 성벽은 높지 않다.
드미트리의 철옹성(鐵甕城)은 10배의 병력으로도 함락시키기 힘들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와 비교해 로렌스의 성벽은 충분히 공략할 만했다.
막말로.
1시간 안에는 승부를 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로렌스의 반격은 생각 이상으로 격렬했다.
“자작님. 아무래도 로렌스가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해자(垓子)를 깊게 파서 병력의 접근을 차단하고, 끓는 기름에 불까지 질렀습니다. 그리고 시작부터 다량의 화살을 주저 없이 발사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충분한 양의 전쟁 물자까지 확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관의 말이었다.
순간 짜증이 일었다.
일주일.
그 시간은 상대의 준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로렌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항복을 받아 낼 생각이었는데, 로렌스는 예상과 다르게 결사 항전을 택했다.
‘우리의 계산대로라면 로렌스는 조금이라도 땅을 지킬 마음으로 투항했어야 했다. 혹시 모를 동맹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병력에서도 명백한 우위를 보였건만, 로렌스가 멸문을 각오하고 성문을 걸어 잠그다니.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히 우리가 열어 준 생로(生路)에 목숨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텐데.’
바르코의 계획.
처음부터 그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골든 뱅크와 심판관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고, 숨통을 압박하면서 상대를 투항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계획은 완벽하게 틀어졌다.
단 30분이었지만 로렌스의 대응은 체계적이었고, 본인들이 소유한 들판에 불을 지른 행동으로 보아 아무래도 장기전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는 순간이었다.
플로라가 예상한 것처럼 바르코 가문은 골든 뱅크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렸고,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것만이 손실을 줄이고 바르코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작님. 어떻게 할까요?”
부관이 눈치를 살폈다.
방금의 전투로 수십 명의 병사를 잃었다.
로렌스의 전력을 파악할 생각이었는데, 격렬한 반격에 어찌해 볼 새도 없이 병사들이 죽고 말았다.
‘로렌스 자작은 그리 강인한 사람이 아니다. 바르코의 압박에 로렌스의 금지옥엽을 드미트리 가문에 팔았던 것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겁쟁이처럼 움츠러드는 그런 녀석이지. 그런데도 결사의 항전을 택했다는 것은 내부에서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승산이 없었다면 결코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았을 테고, 그들은 장기적으로 승부를 이끌어 갔을 때의 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이번 전쟁.
모두 바르코 자작의 계획이었다.
아들인 안토니 바르코를 움직였고, 거짓으로 만든 문서로 로렌스에 시비를 걸어 전쟁까지 이끌었다.
이제 거의 끝났다.
계획의 클라이맥스인데, 로렌스의 비옥한 토지를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하긴. 지금 당장 ‘그것’을 준비해 오거라.”
“……알겠습니다.”
그것.
바르코 자작이 쓴웃음을 보였다.
로렌스 가문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바르코 자작은 최소한의 지출로 승리하고 싶었을 뿐, 애초에 패배의 가능성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골든 뱅크.
그들은 생각보다 많은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 돈은 전쟁의 변수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성벽 위.
로렌스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첫 번째 전투의 승리로 얼굴에는 웃음이 보였으나,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바르코의 개자식들이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정신 바짝 차리고, 얼른 무기들을 날라.”
한 번의 승리.
그것으로 확신이 생겼다.
지레 겁을 먹었을 뿐, 바르코는 대적 불가의 상대가 아니었다.
로렌스 자작이 말했다.
“플로라, 네 생각이 맞았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수성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바르코의 공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것이냐? 너는 아카데미에서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배웠을 뿐, 병법과 같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플로라의 변화.
의외였다.
들판에 불을 지르는 것도, 수성을 준비하는 과정도 모두 플로라의 적극적인 의견 제시가 있었다.
플로라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복장은 병사와 같았다.
평소에는 귀족의 여식으로서 우아한 드레스를 입었다면, 지금은 혹시 모를 전투를 대비해서 상의에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다.
나름대로 전투에 도움이 되겠다고 지난 며칠간 활을 쏘는 연습까지 했다.
물론 겨우 며칠의 준비로는 표적을 맞힐 만한 실력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극적으로 나서는 플로라의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많이 올라갔다.
로렌스의 꽃.
플로라는 로렌스의 상징이었다.
그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로렌스의 병사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수성을 준비할 수 있었다.
플로라가 말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아카데미에서는 제게 병법을 알려 주지 않았어요. 귀족의 여식으로 살아가면서 전장에 나설 일은 없기에, 그런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죠. 하지만 바르코 가문의 행태를 보면서 제가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파악할 줄 알고 그걸 해결할 만한 능력 또한 기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혼자 공부를 했고, 그것이 앞으로 제가 살아가려고 하는 인생의 방향이에요.”
“……플로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바라서 하는 일이잖아요.”
플로라의 말.
가슴이 아팠다.
가문에 힘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을 경험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플로라는 짧은 사이에 불쑥 커 버렸다.
그래도 대견했다.
이런 딸이라는 사실에.
자신의 금지옥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멋지게 성장했다.
“바르코와의 문제만 해결되면, 앞으로 이 아비가 너의 인생에 왈가왈부할 일은 없을 것이다. 드미트리와의 혼인을 강요했던 것은 미안하다. 그때는 네가 가문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네가 어떤 상황에서든 옳은 선택을 하리라고 믿는다.”
그것을 끝으로.
대화는 잠시 미루었다.
정확히는, 대화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헉.”
“설마?!”
당황하는 병사들.
성벽 너머로.
바르코의 진영에서,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것의 정체.
전체적인 형태는 투석기(投石器)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것이 단순한 투석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미친!”
“바르코가 플레어(flare)를 준비했어!”
플레어.
공성 병기의 이름이었다.
투석기 형태의 플레어는 성벽에 무언가를 투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그 무언가가 바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 무기였다.
한 발당 수십 골드의 값어치를 하는 엄청난 금액의 마법 무기.
그야말로 하늘에 돈을 뿌리는 일이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하다고 알려진 게 바로 플레어였다.
예상외의 전개였다.
바르코가 아무리 돈을 빌렸다고는 하나, 플레어를 대여할 만큼의 인맥과 재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다들 위치로!”
“모두 공격에 대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황에.
플로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며칠간 병법을 공부했고, 그렇기에 플레어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플레어가 공격을 시작하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야. 강력한 불길은 성벽을 무너트리고, 그 위에 존재하는 병사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지. 플레이를 막을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어. 그에 걸맞은 마법 병기로 대항하거나, 아니면 성문을 열고 나가 플레어를 박살 내 버리거나.’
전자는 불가능하다.
로렌스는 그만한 여력이 없었고, 사실 플레이와 같은 마법 병기는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두 번째를 택한다?
자살행위다.
그때였다.
플레어가 불을 뿜더니, 거대한 화구(火球)를 발사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크악!”
“으아아아아악!”
단 한 방.
성벽 위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되었다.
다행히도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불에 타올라서 녹아내리는 피부에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나마 빗나간 게 그 정도였다.
만약 화구를 정통으로 맞아 버린다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십수 명의 병사들이 그대로 타 버릴 정도로 화력이 엄청났다.
사고가 정지되었다.
한계를 넘어서는 상대의 전력.
병법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뒤로는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이를 악물었다.
플로라가 활을 쥐었다.
뭐라도 해 보려고.
어떻게든 발악하려는 그때.
시녀가 황급히 다가와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가씨! 아가씨! 지금 로만 드미트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드미트리의 그 로만이?”
로만.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연락의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기에, 플로라는 고개를 돌리고는 성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로렌스의 위기. 자신이 도울 방법이 있으니 연락을 받으라고요.”
그 말에.
플로라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