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로렌스의 꽃 (1)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로렌스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마르텔 가문에서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바르트라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항상 요구하던 유통망을 구축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는데도, 이번 문제는 도와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주군. 아무래도 바르코 가문의 압박으로 인해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상 힘들 것 같습니다.”
쾅!
“빌어먹을 녀석들.”
가신(家臣)들의 보고에, 로렌스 자작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바르코와의 분쟁이 있기 전.
마르텔과 바르트라 가문은 로렌스에 연줄을 대기 위해서 아첨을 하던 곳이었다.
로렌스의 비옥한 토지는 동북쪽 일대에서 권력을 부여했고, 로렌스 자작은 그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때의 관계를 떠올리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건만, 항상 웃는 얼굴로 로렌스를 대접했던 두 가문의 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이해는 했다.
최근.
동북쪽 일대에 소문이 돌았다.
로렌스와 바르코의 분쟁에 개입해서 바르코의 의도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로렌스가 무너진 이후에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는 소문.
바르코에서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의도적이기에 다른 가문으로서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바르코는 동맹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앞으로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선고받은 지금, 로렌스 자작은 속이 콱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골든 뱅크에서는 연락이 왔느냐?”
“……예. 토지 담보 대출을 검토해 보겠다고는 했으나, 아무래도 일주일 안으로 검토가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골든 뱅크는 중립 세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르코 가문에 거액을 투자한 만큼, 우리보다는 바르코 가문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하아.”
현기증이 일었다.
골든 뱅크.
카이로 왕국에만 국한되는 세력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막대한 자본력을 자랑하는 세력.
그들의 본거지는 2 제국 중 하나인 발할라(Valhalla) 제국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그들은 중립의 입장을 제일의 가치로 내세우는 세력이지만, 지금과 같이 본인들의 이권이 걸린 문제에서는 노골적으로 제일 이득이 되는 쪽의 편을 드는 모습을 보였다.
바르코와 로렌스.
승산은 바르코가 높았고, 그렇기에 두 쪽 모두 투자하는 것보다는 바르코의 편을 드는 게 나았다.
“결국, 아무런 해답도 없다는 말인가.”
지난 몇 주.
로렌스 자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드미트리와의 파혼으로 로렌스는 궁지에 몰렸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과거의 인연을 들먹이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 골든 뱅크와의 접촉은 실패할 것을 알고도 시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혹시라도 돈을 빌릴 수 있다면 바르코 가문과 마찬가지로 용병을 고용할 생각이었지만, 골든 뱅크의 여우들은 본인들이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장사는 하지 않았다.
막다른 길에 몰렸다.
끝났다.
일주일이 지나면 바르코는 공격을 개시할 것이고, 로렌스는 그들의 공격을 버틸 힘이 없다.
‘……어떻게든 드미트리의 마음을 풀었어야 했어.’
드미트리.
그들의 존재는 독이 되었다.
드미트리와의 혼인을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었지만, 오히려 드미트리와 등을 돌리면서 친(親) 드미트리 세력들조차 도와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북쪽 일대의 실세는 바르코와 드미트리다.
두 가문과 모두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서, 로렌스는 외톨이로 전락해 버렸다.
막막했다.
가신들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 회의실 가장 끝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정체.
그녀는 바로, 로렌스의 금지옥엽인 플로라 로렌스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플로라의 세상을 구성하던 상식의 영역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내 판단이 틀렸어. 나는 로만 드미트리를 편견으로 바라보았고, 진짜 얼간이는 그가 아니라 나였어.’
로만의 행보.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로만이 어떤 일을 저질렀다는 정도만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세한 과정을 알게 되었다.
로만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블러드 팽의 리더인 벤 마일즈를 처단해 버렸다.
그것은 온전히 로만의 힘으로만 행한 일이었고, 더욱 충격적인 건 그렇게 행동한 로만의 명분이었다.
드미트리의 영지민들을 괴롭힌 블러드 팽을 처리하겠다는 목적.
그리고 로렌스의 대처가 미흡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처벌을 각오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대담함.
문득.
플로라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의 장자는 얼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문을 위한 일을 행했는데,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파혼을 언급함으로써 로렌스를 위기에 빠트려 버렸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적어도 드미트리의 심기를 건드리는, 파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조금 더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내가 어리석었어. 아무런 대책도 없이 파혼을 택한 건, 가문을 멸문(滅門)의 길로 이끄는 선택이었어.’
한때는.
본인이 명석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카데미 고급 과정을 좋은 성적으로 수료하면서, 자신을 향해 밝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가 좋은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애초에 가문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언가를 공부했다는 것 자체가, 온실 속의 화초라고 불릴 만큼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가문 밖.
바르코는 야생의 포식자였다.
군침을 흘리며 사나운 어금니를 보이는 그들은, 플로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배려해 주지 않았다.
파혼 사실이 알려지고.
플로라는 방에 틀어박혔다.
아직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낭만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참담한 현실에 감히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실수로 아버지는 매일같이 동분서주하면서 도움을 구걸하러 다녔다.
가문의 회의실은 불이 꺼질 날이 없었으며, 회의가 끝나면 다 죽은 얼굴로 걸어 나오는 가신들의 모습에 다가가 힘을 내라고 말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플로라 로렌스.
로렌스의 꽃이라 불리며, 항상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만 경험했던 그녀에게는 참 가혹한 시간이었다.
끙끙 앓았다.
밤중에 열이 나기도 했고, 악몽에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며 잠에서 깨나는 일도 일상이 되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플로라의 머릿속에는 로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대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혼자만의 힘으로.
누구도 로만에게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로만은 가문을 위한 선택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대단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떠나.
그런 일을 마음먹었다는 것만으로도 다르게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플로라의 꿈에는 로만이 나오기 시작했고, 로만의 모습을 꿈꾸면서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플로라는 결단을 내렸다.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 플로라.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블러드 팽을 직접 토벌한 것처럼, 우리 또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해.”
컴컴한 방 안.
플로라가 동굴에서 나왔다.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로렌스의 도서관을 찾아가 책 몇 권을 챙겼다.
책의 종류는 바로.
전쟁을 대비한 병법서(兵法書)였다.
플로라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궁지에 몰렸습니다. 바르코는 주변의 도움을 차단했고, 전력의 차이는 명백하지요. 그렇기에 항복을 통해 조금이라도 가문의 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저는 절대 그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무고한 병사들이 죽는 것보다는, 항복이 모두를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로렌스 자작이 반문했다.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보이는 모습에, 플로라는 차분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바르코는 중앙 정부의 인맥을 이용해서 골든 뱅크에서 돈을 빌렸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대출의 과정은 무담보로 진행되었고, 그렇기에 담보물이 없는 대출은 이자율이 셀 수밖에 없겠지요. 이번 전쟁. 바르코만 이득을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돈을 빌린 바르코와 돈을 빌려준 골든 뱅크가 모두 만족할 만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로렌스를 점령한 이후에 이 땅을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입니다. 절반은 바르코가, 다른 절반은 골든 뱅크가. 그러고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 금고의 바닥까지 긁어 가야 그들은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이겠죠.”
“크흠.”
가신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잔인할 정도의 발언이었지만, 그게 현실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냐?”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결사 항전(決死抗戰). 그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항전이라니. 그게 정녕 네가 말하는 최선이더냐?”
로렌스 자작이 허탈한 반응을 보였다.
순간.
플로라의 발언에 기대감이 생겼다.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판단력이 비상한 방법을 말해 주리라 생각했건만, 결국 상식 안의 영역이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는 것.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플로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접근법이 달랐다.
“그냥 버티라는 게 아닙니다. 올해 한 해 농사는 포기하고 들판에 불을 지르십시오. 그리고 최대한 식량을 비축한 뒤에 버티는 겁니다. 우리는 겨울이 올 때까지만 무너지지 않으면 됩니다.”
“겨울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예. 바르코는 이번 전쟁을 위해 거액의 돈을 빌렸습니다. 중앙 정부의 연줄을 활용해 무담보로 대출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사실 골든 뱅크는 겨우 중앙 정부의 연줄만으로 어떻게 압박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거대한 세력입니다. 만약 전쟁이 빠르게 끝나지 않고 시간이 계속 흐른다면, 바르코 가문으로서는 이자로 인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출액이 큰 만큼 이자 또한 상당하겠지요. 그것이 우리가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약점입니다. 용병은 돈으로 움직이고, 그 돈은 골든 뱅크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공성전(攻城戰)에 불리한 겨울이 찾아온다면, 그들은 스스로 말라비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허어!”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플로라의 말에.
가문의 가신들이 감탄했다.
처음에는 의아한 기색을 보이던 그들은, 플로라가 말할수록 그녀의 주장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일리가 있었다.
이건 시간 싸움이다.
바르코의 힘은 실체가 없기에, 그 실체가 드러나는 시간을 버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내 딸이 언제 이리 컸단 말인가.’
로렌스 자작.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딸.
손으로 쥐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키웠고, 온실 속의 화초는 로렌스의 꽃으로 자라나서 활짝 피었다.
그리고 드미트리의 사건이 터졌을 때.
로렌스 자작은 자신이 딸을 너무 철없이 키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막상 진흙탕을 뒹구는 상황을 마주하자, 플로라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무능력한 아비로 인해 네가 마음고생을 했구나.’
뒤늦게 보였다.
플로라의 핼쑥한 얼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얼굴에는 그림자가 보였다.
금지옥엽의 딸.
이토록 사랑스러운 딸이, 바르코 가문에 의해 무너지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로렌스 자작이 말했다.
“플로라의 말이 옳다. 바르코 가문은 가문 자체의 힘으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세력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결사 항전을 준비하거라. 우리는 버티고 버텨, 로렌스 가문의 대를 이어 갈 것이다.”
결단을 내렸다.
투항하지 않을 것이다.
백기를 내걸지 않을 것이다.
성벽이 무너져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우고 견뎌 내겠다는 것이 로렌스 가문의 판단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마침내 바르코가 예고한, 결전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