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615)

38화 화덕의 불길 (3)

한발 물러난 이유.

단순히 항명의 대가가 무섭기 때문이 아니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끝까지 고수하는 헨드릭이건만, 지금은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헨드릭아, 헨드릭아.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순간.

옛날의 기억들이 살아났다.

마스터 블랙스미스라고 불리는 헨드릭에게도 수습생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대장장이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생계를 위해 택한 일이었고, 하루라도 빨리 정식 대장장이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 밤낮으로 허드렛일을 했다.

구타는 예사였다.

지금의 드미트리는 과거의 악습을 철폐했지만, 헨드릭이 일을 배우던 시절에는 몸에 멍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어느 날.

대장간에 한 용병이 찾아왔다.

이제 막 사내의 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용병은, 겨우 1실버를 가져와서는 검을 팔아 달라고 말했다.

“쓸 만한 검을 사기 위해서는 부족한 돈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제 전 재산이고, 만약 검을 팔아 주신다면 후일 수십 배로 갚겠습니다. 제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있는 거라고는 건장한 몸뚱이밖에 없는 저로서는, 돈을 벌기 위해 무기가 꼭 필요합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농사할 땅도,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도 없는 사람들은, 몸뚱이 하나만을 믿고 용병 일에 뛰어들었다.

그도 같은 경우였다.

대장간의 마스터는 처음 보는 사내에게 검을 내줄 만큼 인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용병에게 신랄한 욕을 내뱉고는 대장간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때 용병의 뒷모습은 참으로 처량했다.

 가족의 짐을 어깨에 짊어진, 축 내려간 어깨를 보고 있자니 헨드릭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마스터 몰래.

헨드릭은 용병을 따라갔다.

그리고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마스터 몰래 자신이 만들었던 첫 번째 검을 그에게 주었다.

행복했다.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인사를 표현하는 용병의 모습에, 헨드릭은 이것이야말로 대장장이로서의 행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순간이었고, 대장간으로 돌아온 헨드릭은 더 좋은 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1개월 뒤.

용병의 시체를 마주한 헨드릭은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열하는 가족들 뒤로, 사람들은 용병이 왜 죽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이번에 상단의 호위 임무를 맡았다가 죽었다지 뭐야. 쯧쯧, 불쌍한 녀석. 도적 떼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검만 부러지지 않았어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이래서 무기는 좋은 걸 써야 해.”

“그러게.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얘만 죽었다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발이 벌벌 떨렸다.

자신은 호의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한 용병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자괴감이 일었다.

그제야 마스터가 왜 아직은 이르다고 말했는지를 알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눈앞의 현실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헨드릭은 한동안 폐인으로 살았다. 만약 자신의 친우였던 로메로 남작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는 대장간으로 복귀하지 못했을 것이다.

헨드릭은 고통 속에서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렇게 아픈 과거를 이겨 내고 마스터 블랙스미스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때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로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설마 변방에서 이걸 가지고 전쟁이라도 하겠냐는 안일한 마음에, 헨드릭은 잠깐이지만 과거의 실수를 잊고 수도 없이 후회했던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정말 한심하구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로만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이 건네준 쓰레기들로 무고한 사람이 죽을 뻔했다.

말을 삼켰다.

변명하지 않았다.

로만이 처벌한다면.

그게 항명의 대가든, 아니면 다른 처벌이든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내 행동의 대가를 치르겠다.”

“마스터님!”

헨드릭의 말에, 대장장이들이 당황한 얼굴로 만류했다.

그들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헨드릭은 자신들의 하늘이건만, 로메로 남작도 아니고 로만 드미트리 따위에게 벌을 받을 수는 없었다.

칼자루는 로만이 쥐었다.

헨드릭은 처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로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로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정도로 본인의 잘못을 뉘우친다면 더는 따져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시죠. 저는 헨드릭 마스터님이 대단한 대장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고로, 30병의 병사를 무장시킬 무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만의 말.

이번에도 예상을 벗어나는 발언에, 헨드릭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황당한 녀석이었다.

방금까지는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어 놓고, 기세를 잡았을 때는 오히려 책임을 묻지 않았다.

로만은 알았다.

헨드릭.

그의 위치에서.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적어도 그 실수가 만회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잘못을 뉘우치는 행동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읍참마속(泣斬馬謖).

슬픔을 삼키며 수하의 목을 베어 버렸을 때는, 그 실수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때 내린 판단이었다.

지금과는 달랐다.

헨드릭은 로만과 악연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판단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지 못한 채 소심한 복수를 했을 뿐이다.

만약 뉘우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걸 악의라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헨드릭은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알았다.

‘상벌에는 감정이 담겨 있어서는 안 된다.’

백중혁의 철칙이었고, 늘 철칙에 따라 행동했다.

로만이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헨드릭 마스터님이 고의로 항명을 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에 대한 반감 때문일 테고, 저는 그러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둘의 실수는 이만 묻어 두었으면 합니다. 제가 바라는 건, 제 병사들의 목숨을 지켜 줄 검과 갑옷일 뿐입니다.”

채찍과 당근이었다.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채찍을 휘둘러 놓고는, 로만은 교묘한 언변으로 당근을 제시했다.

로만의 태도.

그에, 헨드릭은 새삼 감탄했다.

‘로만이 달라졌구나.’

소문으로는 들었다.

특히 이번 사병 모집으로 인해서, 정말로 달라졌다는 주변의 평판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애써 진실을 무시하고 있었던 헨드릭은, 지금에야 로만의 진면목을 보았다.

예전과는 달랐다.

비리비리하고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었던 로만이 건장한 사내가 되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부터 비롯되는 카리스마는 심장을 떨리게 했다.

단순히 외모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로만은 하나부터 열까지 과거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분명히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던 로만의 흔적은 있는데, 그때의 로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편견이 한 꺼풀 벗겨졌다.

인정했다.

로만은 달라졌고, 오늘의 일은 자신의 실수다.

과거의 일로 수도 없이 후회했던 자신이, 사사로운 감정에 쓰레기들을 건넸던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헨드릭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로 미안하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죄의 의미로, 네 병사에게 줄 무기와 방어구는 드미트리가 자랑하는 최상품의 철제로 준비해 주겠다.”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로만은 나중에 물건을 받기로 하고 대장간을 나섰다.

그 과정에서, 다른 대장장이를 통해 헨드릭의 사정을 들었다.

“그날 로만 도련님이 훔쳐 간 검은 헨드릭 마스터님의 역작(力作)이었습니다. 구상하는 데만 육 개월의 시간이 걸렸고, 무려 삼 개월 동안 대장간에 살면서 겨우 완성한 명품이었지요. 그런데 그걸 길거리 상인에게 헐값에 팔아 버렸으니 분노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헨드릭 마스터님이 진정으로 화가 난 부분은, 로만 도련님이 그걸 훔쳐서 팔았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역작이 제 주인을 찾지 못하고 헐값에 팔렸다는 겁니다.”

이해가 됐다.

헨드릭이 왜 화가 났는지.

장인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쓰레기들을 로만에게 던져 준 이유가 무엇인지.

전생의 로만이야말로 선을 넘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

그래서인지,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헨드릭은 로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일로 너를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했기에 너의 부탁을 들어주기는 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가 대장간 일에 소홀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명심하거라. 드미트리의 근본은 대장간에 있음을. 후일 네가 네 손으로 직접 쓰레기 같은 검 한 자루라도 만드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너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지.”

헨드릭은 고집이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편견을 한 꺼풀 벗겨 냈다고는 하나, 로만을 드미트리의 후계자로 인정하진 않았다.

그런데.

헨드릭으로서도 하나 오판한 것이 있었다.

‘헨드릭이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는 대장간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얼간이었겠지. 가문의 근본을 무시하고 향락만 즐기는 쓰레기.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돼. 하지만.’

백중혁.

그는 달랐다.

“지금부터는 출병을 위한 준비를 해 볼까.”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외출에는, 하나의 목적이 더 남아 있었다.

* * *

로만이 도착한 장소.

폐관 수련을 했었던 공방이었다.

그때는 낡고 허름했던 공방이, 지금은 당장 작업해도 괜찮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쟁을 결심한 직후.

로만은 한스에게, 이곳을 원래의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오랜만이네.”

슥.

내부를 걸으며 주변을 확인했다.

좋은 장소였다.

천장이 높아서 환기가 잘되고 있었고, 조명은 적절하게 밝혀야 할 부분과 어둡게 할 부분을 구분해 주었다.

대장간이라면 기본적으로 환기가 필수다.

석탄불의 연기와 먼지가 시야를 방해하다 보니, 작업에 적합한 대장간을 확인할 때 가장 먼저 환기를 우선으로 하는 편이었다.

그 뒤로.

익숙한 물건들이 보였다.

뜨겁게 들끓을 화덕.

차갑고 무거워 보이는 모루와 그걸 받쳐 주는 참나무 받침대.

그리고 망치와 집게 등등.

헨드릭의 작업 공간에서도 보았던 것들이지만, 로만으로서는 지금의 순간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첫날이 떠오르는구나.’

처음.

로만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날.

허름한 판잣집에서 드미트리의 역사를 들으며, 로만은 어쩌면 이게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천마 백중혁.

무림의 역사에서는 그를 단순하게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표현하지만,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백중혁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이 대장간에서의 모습이었다.

백중혁은 출병을 마음먹은 직후, 항상 대장간을 찾아와서 본인만의 의식을 행했다.

투쟁의 삶.

살아남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군림하기 위해서.

백중혁은 뜨거운 불길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발현했다.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화덕에 불을 붙였다.

지금부터는.

앞으로의 전쟁을 대비한, 자신만을 위한 검을 만들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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