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모병 (8)
단 한 번의 선례.
그것은 중요했다.
루카스의 차례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때부터 반칙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1분을 버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파바박.
72번째 차례.
거구의 남성이 괴성을 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큰 동작은 로만에게 먹힐 리가 없었고, 허공을 가르는 검에 남성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주워서 로만의 얼굴에 던졌다.
기습적이고 변칙적인 공격.
로만은 고개를 옆으로 틀어 돌멩이를 피해 버리더니, 다시 공격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내의 얼굴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퍽!
“커억.”
피가 튀었다.
사내의 동공이 풀렸고, 그대로 얼굴부터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다음.”
반칙.
탈락의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선을 넘은 순간, 로만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루카스는 영리했다.
만약 루카스가 대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로만의 검은 그의 신체 하나는 부러트렸을지도 모른다.
테스트는 계속되었다.
80번째도.
90번째도.
그리고 100번째도.
사람이 계속 바뀌는 데도 로만이 말한 1분을 버티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이차 테스트의 룰에 웃음을 보이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로만을 보았다.
이 상황.
말이 되지 않았다.
로만은 100번의 대결,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체력적으로 호흡이 가빠야 할 시간인데도, 로만은 아직도 처음 대련할 때의 순간인 것처럼 안정적인 호흡을 보였다.
체력적인 부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이 지원자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왔고, 어느새 끝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이제는 이길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들은 로만에 대해 몰랐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죽음의 경계선에서, 체력이 떨어졌다고 봐주는 적은 없다.
호흡을 관리하지 못하면 동작이 굼떠지고, 그때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렇기에.
백중혁은 끝까지 싸우는 법을 터득했다.
한번 호흡하고.
다시 호흡을 내뱉고.
일련의 과정에서 호흡으로 얻은 자연의 마나는, 내부를 순환하며 육체의 피로를 적절하게 회복해 주었다.
로만의 몸은 아직 나약하다.
100번의 대련은 육체적으로 부담이 생겨야 정상이건만, 환골탈태로 강인해진 육체에 적절한 관리까지 해 주자 로만은 처음과도 같은 상태로 대련을 진행했다.
이건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싸움이다.
무림을 정벌하던 시절에 삼일 밤낮으로 전투를 벌였던 백중혁으로서는, 이런 가벼운 전투로 체력이 고갈될 리가 없었다.
고로.
지원자들의 판단은 틀렸다.
차례를 미루면 유리하리라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마음을 짓누르는 공포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다음.”
마지막.
120번째 차례였다.
그는 패배를 체념한 얼굴로 무대에 올랐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1분은커녕 채 10초도 버티지 못했다.
일격.
지원자가 무릎을 꿇었다.
한 번의 경합에 목검이 부러지자, 자진해서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테스트는 끝났다.
120번의 대장정이 결론에 도달한 상황에, 사람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로만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직접 목격하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변화는, 상식의 영역을 벗어났다.
모든 테스트가 종료되었다.
패배는 탈락을 의미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절망에 빠진 지원자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이틀 뒤에 결과를 말해 주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다음 날.
로만은 크리스에게 합격자 명단을 넘겼다.
“합격자 명단이다. 앞으로 너는, 이들 30명을 맡아 훈련을 진행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탁.
명단을 받았다.
그리고는 첫 페이지를 넘기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이름이 볼칸이라고 했었지.’
테스트 첫 번째 도전자.
과감하게 도전했다가, 단번에 나가떨어진 사내였다.
대련 내용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합격자 30인에 들어갈 자격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주군은 볼칸의 용기를 높게 평가했을 거야. 120번째 차례가 유리한 것이 명백한 상황인데도, 볼칸은 망설임 없이 첫 번째 차례로 나섰어. 그리고 제대로 박살이 났지. 하지만 선공을 감행한 그의 용기와 피지컬적인 조건을 보았을 때, 그는 사병으로서는 과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야.’
사락.
페이지를 넘겼다.
대부분 이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로만을 상대로 이렇다 할 퍼포먼스를 보여 주지 못했어도, 의지와 조건을 갖춘 이들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헨더슨?’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헨더슨은 누가 보아도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일차 테스트에서도 가까스로 통과한 그는, 로만과의 대련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크리스는 그가 당연히 탈락하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합격자들과는 다르게 의지와 조건이 떨어지는 그가, 합격자 명단에 들어갈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주군의 결정이라는 생각에 반문을 삼켰다.
자신이 경험한 로만이라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합격자를 선정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서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도 합격인 겁니까?”
“그래.”
“루카스가 B급 용병이고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비겁하고 야비한 인간입니다. 테스트를 목적으로 하는 대련 도중에 단검을 던지고 모래를 뿌리는 반칙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패배했다고 판단되었을 때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이런 녀석은 전장에서 독(毒)으로 작용합니다. 언제 동료를 버릴지 모르는 비겁한 녀석인데, 다른 병사들이 루카스를 믿고 싸울 수 있겠습니까?”
루카스는 전형적인 용병이었다.
명예를 버리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부류.
크리스는 그게 싫었다.
그는 기사로서 명예를 알았고, 만약 도전자의 입장이었다면 죽더라도 항복은 외치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도맡을 병사라면.
루카스와 같은 인간은 배제하길 바랐다.
로만이 말했다.
“그래서 합격시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 말처럼 루카스는 동료를 버리는 비겁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반칙을 저지를 생각조차 못 하는 상황에서, 그는 현실적으로 나를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녀석이다. 전장에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오히려 빛을 발하지. 항상 살길을 찾아, 어떻게든 활로를 열어 줄 테니 말이야. 네게 묻겠다. 루카스가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나를 상대했다고 해서, 그것이 동료들을 버릴 비겁한 녀석이라고 확신할 만한 일인가? 반칙을 제한하지 않았기에 반칙을 했을 뿐이고, 그는 아직 신뢰를 저버릴 만한 행동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말문이 막혔다.
로만의 말은 옳았다.
루카스는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뿐, 아직 그의 인성을 평가할 근거는 없었다.
문득.
스승인 조나단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자는 너와 나처럼 오라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이 아니다.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죽음의 경계선에서, 항상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하고 판단할 줄 아는 이들이 끝까지 사람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항상 명심하거라. 네가 아무리 강한 검사가 될지라도, 네 발밑에서 숨을 죽이고 시체처럼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의 말처럼, 아직은 루카스를 판단하기에 일렀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었다.
“이번에 사병을 30명이나 모집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30명은 적지 않은 인원이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드미트리 가문에도 병사와 기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크리스의 질문.
그것은 상식의 영역이었다.
앞으로 5개월 뒤.
로만은 전장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건 미래의 일이고, 벌써 사병을 모집하면서까지 준비할 이유는 없었다.
중앙 정부는 귀족의 병사들을 징집했다고 해서, 무작정 사지로 몰아넣는 극악무도한 집단이 아니다.
징집 병력.
그들은 비상 병력의 의미가 강했다.
최전방 바로 아래에 있는 대기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위험한 일이 터졌을 때 그곳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운이 좋았을 때는 전투 한번 없이 병역 기간을 끝내는 경우도 많다.
로만 또한 아직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굳이 사병을 육성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변방이다.
전투가 흔하지 않은 지역이니만큼, 5개월 전부터 인당 8실버나 주면서 30명이나 되는 인원을 유지하는 것은 부담이 컸다.
크리스.
그는 부기사단장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사람을 관리하고 회계도 조금은 알다 보니, 30명의 의미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젠가는 했어야만 하는 질문.
로만이 말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변방에서 안주할 생각이 없다.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 보이는 것들부터 차례로 밟아 가면서 올라갈 생각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당장의 적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처음 목표.
그것을 묻는 물음에, 크리스는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설마.’
부정하고 싶었다.
로만이 호전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그래.”
로만의 죽음.
그 죽음의 원흉.
“우리는 지금부터 바르코와의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 * *
그 시각.
바르코 가문은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성명문(聲明文)을 발표했다.
“우리는 과거의 약속을 믿고 그동안 로렌스의 결단을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의 명예를 땅바닥에 버린 채 신뢰를 저버렸고, 우리는 기나긴 인내 끝에 검을 뽑아 드는 결단을 내렸다. 로렌스의 죄는 명백하다. 그들은 선조가 남긴 빚을 갚지 않았고, 그 담보로 걸어 두었던 토지 또한 주지 않겠다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고로, 이 성명문을 통해 카이로 왕국 사람들에게 알리겠다. 로렌스가 앞으로 일주일 안에 빚을 갚거나 담보로 걸었던 토지를 뱉어 내지 않는다면, 바르코 가문은 중앙 정부의 승인하에 로렌스와의 영지전을 선포할 것이다.”
영지전.
서로의 것을 걸고 싸우는 치열한 싸움.
바르코 가문은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합법적으로 영지전을 선포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귀족의 세계에서 명분은 중요하다.
명분이 있기에, 카이로 왕국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둘의 전쟁을 방관할 것이다.
만약.
로만과 플로라의 혼인이 엎어지지 않았다면, 바르코 가문은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양 가문이 결혼의 연을 맺는다는 건 혈연(血緣)의 관계를 의미했다.
귀족의 세계에서 혈연은 강한 명분을 부여하기에, 로렌스의 일이라 할지라도 직접 참견할 강한 명분이 있다.
그러나.
혼인은 엎어졌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한순간의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
“로렌스는 신중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만약 가문의 재산을 지키겠다고 이번 일을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머지않아 바르코의 깃발이 로렌스의 중심부에 꽂힐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 누구보다도 잔인해지는 것이 바르코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드디어.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