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모병 (7)
앞선 60번의 대련.
수많은 지원자가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내가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로만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느꼈다.
괴물.
그 단어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는 것 같은 압박을 받았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한증이 없는데도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처음부터 로만의 위험성을 알아차렸던 루카스는, 로만이 120번의 대련을 언급했을 때 다른 지원자들처럼 유쾌한 웃음을 보이지 못했다.
최전방.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생사(生死)의 영역에서, 루카스의 예민한 감각은 항상 목숨을 구해 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본능은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임을 말해 주었고,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지금과 같은 상황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싸움.
이를 악물었다.
시험에 통과하면 겨우 8실버를 받으면서 일해야 하건만, 그는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살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그간 전장을 전전하며 랭커(Ranker)들을 목격한 경험이 있지만, 압도적인 무력을 떠나서 순수하게 분위기만으로 나를 이토록 압박한 사람은 없어. 로만 드미트리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졌어. 그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변방에서 썩어 갈 인물이 아니라, 언젠가는 날개를 활짝 펴고 대륙으로 뻗어 나갈 것이 분명해.’
루카스.
B급 용병.
사람들은 그가 대단한 위치에 올랐다고 말하지만, 루카스는 본인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B급은 노력의 한계다.
평범한 일반인이 목숨을 걸고 노력하면 B급의 자격은 얻을 수 있겠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한 A급의 영역은 허락되지 않는다.
A급부터는 단순히 전장의 경험만으로는 넘볼 수가 없다.
남들을 압도하는 강력한 무력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의 기본 조건은 바로 마나의 개화였다.
고로.
루카스는 한계에 도달했다.
이번에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그는 아무리 발악해도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음을 깨닫고 말았다.
드미트리행.
절망에 빠진 선택이었다.
루카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휴식을 갈망하던 찰나에 로만이 사병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았다.
‘로만은 말했어. 자신을 따르면 포식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해 주겠다고. 내가 왜 B급 용병으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로만을 따르는지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로만의 말을 믿어 보고 싶어. 딱 1년만. 1년만 로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자. 그러니까.’
꽈악.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대로 올라간 그는, 로만을 바라보며 따로 준비한 검을 잡았다.
‘일단은 시험을 통과하는 게 우선이야.’
“시작.”
탁.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동시에.
루카스가 땅을 박찼다.
그간의 대결.
첫 번째 차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선공(先攻)을 감행하지 못했다.
거구의 사내가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선공은 아주 위험한 선택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당연했다.
이번 대련.
승리가 아니라 1분을 버티는 싸움이다.
그런데 선공을 하겠답시고 먼저 달려드는 것은, 상대의 검에 목을 내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스의 생각은 달랐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끄는 순간 나는 로만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다. 내가 1분이라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무조건 공격의 주도권을 가져와야만 해. 그게, 이 승부에서 승리할 유일한 방법이야.’
본능에 따른 판단이었다.
결단을 내렸다면.
실행은 과감했다.
전장에서 망설임은 죽음으로 직결되었고, 루카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로만의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노렸다.
훅!
루카스의 무기는 독특했다.
오른손에는 길이가 조금 짧은 검을 사용했고, 나머지 왼손에는 단검을 쥐었다.
둘 다 목제(木製)임은 똑같았다.
로만은 지원자의 요청에 따라 다른 형태의 목제 무기를 제공했고, 루카스와 같은 케이스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공격의 스타일은 독보적이었다.
로만의 머리와 심장.
검으로는 머리를 베어 버리면서, 단검으로는 심장을 힘껏 찔렀다.
휙.
타악!
로만의 움직임은 간결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단검의 거리를 피하면서, 들고 있던 목검으로는 상대의 검을 쳐 내 버렸다.
그러자 루카스가 빠르게 달라붙었다.
검의 방향을 틀면서 목을 살짝 그어 버리겠다는 듯이 휘두르며, 나머지 한 손에 있었던 단검을 로만의 명치를 향해 던졌다.
변칙적이었다.
원거리 공격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상황이나, 로만은 이번에도 검을 휘두르며 공격을 모두 막았다.
‘역시.’
감탄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보통은 쉴 새 없이 몰아치면 틈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로만은 견고한 철옹성(鐵甕城)과도 같았다.
숨이 턱 막혔다.
상대의 공격에 대비해 뒤로 물러나고 싶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상대는 나를 죽일 생각이 없어. 내 살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가 주도적으로 공격할 기회를 헌납해서는 안 돼. 딱 40초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티고 이후에는 시간을 벌면 돼.’
타닥.
더 빠르게 달려들었다.
허리춤에 미리 매달아 놓았던 단검을 하나 더 빼 들며, 다시 한번 양방향 공격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순간.
피식.
로만이 웃었다.
‘제법이네.’
나름 괜찮았다.
목숨을 도외시하는 공격은 전장에서는 좋은 선택이 아니지만, 루카스는 대련에 걸맞은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본능적인 감각을 가진 사내.
이런 부류들은 전장에서 매우 유용했다.
아마도 루카스는 높은 확률로 시험에 통과하겠지만, 그렇다고 1분을 버티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1분.
그것은 벽이었다.
앞으로 자신을 따를 주군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첫 만남에서 확실하게 각인시킴으로써, 로만은 지원자들의 맹목적인 신뢰를 받고자 했다.
‘이만 끝내자.’
훅!
타닥.
순식간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 버리더니, 로만의 연계 공격이 루카스의 방어를 허물어 버렸다.
양손의 무기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경악으로 물드는 루카스의 얼굴에, 사람들은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땅에 몸을 내던지면서까지 공격을 피한 루카스가, 어느새 준비한 모래를 로만의 얼굴에 뿌려 버렸다.
화악!
그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이 대결.
특별한 룰은 없었다.
로만은 그저 1분을 버티라고만 말했고, 루카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건 승패가 걸린 싸움이야. 나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해.’
로만의 공격.
그것을 피한 건 행운이 따른 판단이었다.
상대의 무기 길이를 생각해서 일단 땅바닥으로 몸을 날렸고, 다행히도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다음에는 곧바로 주머니에 챙겨 주었던 모래를 뿌려 버렸다.
똑같은 조건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일시적으로나마 로만의 시야를 방해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화악!
팍.
모래에 맞았다.
뿌옇게 올라오는 먼지에, 루카스는 바닥을 뒹굴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황소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반격.
지금부터는 기세를 휘어잡을 차례였다.
그런데.
로만의 코앞까지 도달해서 검을 휘두르려던 루카스는, 앞을 올려다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헉?!”
로만.
그가 루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로만이 모래를 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루카스는, 로만의 눈동자에 맺힌 모래를 확인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로만은 모래에 맞았다.
변칙적인 작전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었지만, 따갑게 눈을 때리는 충격에도 로만은 눈을 감지 않고 상대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
상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호소했어야 할 로만은, 루카스가 자신에게 달려들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탁.
“……항복입니다.”
루카스가 검을 버렸다.
양손을 들고,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빠른 포기.
그것 또한, 전장에서 얻은 그의 경험이었다
루카스의 작전.
로만은 알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이 가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로만은 상대가 할 수 있는 전력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모래를 맞았다.
따끔거리는 충격에도, 눈을 감지 않고 루카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 마교의 밑바닥에서부터 뼈에 사무칠 정도로 배웠던 가르침이지.’
과거를 떠올렸다.
마교.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무공을 가르치기 전에, 가장 처음으로 훈련하는 것이 눈을 감지 않는 방법이었다.
무인도 결국, 사람이다.
눈먼 검에 죽는 것은 똑같기에, 악마와도 같았던 교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눈을 감지 말라고 말했다.
공방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한 번의 깜빡임은 목숨을 앗아 간다.
마치 내공을 순환할 때 호흡을 내뱉는 순서가 있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 행했다.
마교의 방식은 잔인했다.
눈에 모래를 뿌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눈 바로 앞까지 단검을 찔러 넣는 방식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사고도 발생했다.
눈에 단검이 찔린 교육생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처박은 그의 얼굴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도 같이 교육을 받던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피와 비명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고, 교육생이 살짝 몸을 움츠린 대가가 사고로 직결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이를 악물고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텼다.
천마는 그렇게 만들어져갔다.
루카스가 경험한 산전수전?
그가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언컨대 백중혁이 목격한 피는 흘러넘치다 못해 대해(大海)를 이루었다.
탁.
“……항복입니다.”
루카스가 백기 투항을 했다.
검을 버렸고,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테스트는 끝났다.
하지만 루카스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다른 지원자들은 루카스에게 벌이 내려지리라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래까지는 쓰지 않는 건데.’
루카스의 계획은 이와 달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분을 버티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고자 했다.
그런데 항복했다.
이게 얼마나 추악한 결과인지를 알았다.
간혹 전사라고 부르는 부류들은, 목이 날아간다고 할지라도 항복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와 달리.
루카스는 현실주의자였다.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상대에게 압도되어 항복을 말하고 말았다.
‘내게 실망했을 거야. 아니,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겠지.’
침을 꼴깍 삼켰다.
처벌을 기다렸다.
자신에게 화를 낼 수도.
아니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탈락을 말할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자신의 욕심이 상황을 망쳤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피가 난무하는 최전방.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끄러움이란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루카스가 당황해서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로만은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왜 반칙을 썼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음이라는 말.
그건 묵인(默認)을 의미했다.
너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으며, 책망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해 주었다.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B급 용병.
그런 루카스조차도.
지금만큼은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