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모병 (6)
예상대로였다.
첫 번째 차례부터 부상자가 발생하자, 모리슨과 같은 겁쟁이들은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이런 야만적인 시험에는 응하지 않겠어!”
“몸에 화살이 박히더라도 참아 내라니. 만약 그로 인해 불구가 되어 버린다면 너희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험을 진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여기서 이만 포기할게.”
“나도 포기할래. 중앙 정부의 귀족도 아니고,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지는 않아.”
사람들이 일제히 포기 의사를 밝혔다.
괜한 헛걸음을 했다면서 신경질을 내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크리스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시험을 앞두고.
로만은 강제하지 말라고 말했다.
케빈이 받았던 보상에만 관심을 보이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진심으로 충성심을 보일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거르고 걸러도 배신하는 것이 인간이다.
일차적으로라도 기본적인 자질을 확인한다면, 적어도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들을 빠르게 구별할 수가 있다.
시험은 계속되었다.
백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시험장을 빠져나갔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전부 포기 의사를 밝힌 건 아니었다.
“헨더슨입니다.”
로렌스에서 왔다는 사내.
그가 비장한 얼굴로 나섰다.
일개 평민에 불과한 그는 살면서 목숨을 걸 일이 많지 않았지만, 공포에 벌벌 떠는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사실 당장에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영주민들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블러드 팽을 일벌백계한 로만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헨더슨은 자신이 어떤 각오로 이번 시험에 응했는지를 되새겼다.
한 번쯤은.
남자로서 로만과 같은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해 보고 싶었다.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로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뜨거운 피가 끓었다.
“한 발.”
궁수가 화살을 먹였다.
앞선 차례에서 유혈 사태를 보았는데도, 그는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덤덤하게 화살을 조준했다.
헨더슨이 눈을 부릅떴다.
벌벌 떠는 게 보였다.
궁수는 피식 웃더니, 그대로 화살을 발사했다.
퍽!
“……후읍.”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바로 옆.
얼굴에서 5cm 벗어난 위치에 화살이 박혔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고, 이제라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이 드는 순간 궁수가 다음 화살을 먹였다.
“두 발.”
늦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단한 용기를 가져서 시험을 속행하는 게 아니라, 어물쩍거리다 보니 어느새 다음 화살이 발사되었다.
퍽!
“세 발.”
퍽!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마지막 화살까지 무사히 판에 박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헨더슨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창백한 얼굴의 헨더슨이 앞을 올려다보자, 크리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헨더슨, 합격.”
정말이지.
다시는 도전하고 싶지 않은 시험이었다.
합격자는 생각보다 많았다.
400명 지원.
그중 일차 테스트 120명 합격.
헨더슨과 같이 벌벌 떠는 사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한자리에 모인 합격자들.
로만이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일차 테스트에 통과했다. 이번 테스트로 너희들은 전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했으나, 내가 합격시키고자 하는 인원은 30명이다. 고로 이차 테스트를 통해 한 번 더 너희를 시험하겠다.”
사실.
테스트를 보면서 누가 더 쓸 만한 인간인지는 판단이 끝났다.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었던 헨더슨보다는, 웃는 얼굴로 시험을 치렀던 루카스의 가치가 더 높았다.
실제로 둘은 무력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하지만 로만의 기준에서는 둘의 차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헨더슨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세 발의 화살이 발사되는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로만이 일차 테스트를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바는 공포를 스스로 억누를 줄 아는 용기였다.
사람은 누구나 공포를 느낀다.
전장에서 닳고 닳아 공포에 무감각해진 것보다는, 오히려 공포를 참아 내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자신의 오명(汚名)을 듣고도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들의 지원 목적은 다양하다.
헨더슨처럼 로렌스에서 로만의 모습을 목격하고 강한 충격을 받았거나, 루카스처럼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이끌려서 호기심이 동했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사병으로서의 조건이 마음에 들었거나.
다들 각자의 목적이 있었다.
로만은 그중 원석을 가리고자 했다.
사람들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무력의 수준과도 상관없이.
태생부터 야수의 심장을 타고났으며, 자신을 마주하고도 공포가 아니라 경외심(敬畏心)을 느낄 이들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무력은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아니다.
루카스는 B급 용병의 자격을 얻었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유했겠지만, 로만은 자신의 가르침으로 루카스와 같은 병사는 언제든지 육성할 자신이 있다.
고로 선택의 문제였다.
루카스를 받아들여 더 강한 병사로 만들지, 아니면 헨더슨을 받아들여 그를 차근히 성장시킬지.
로만이 지원자들을 둘러보았다.
루카스와 같은 실력자들은 합격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는 반면, 다른 이들은 자신감이 떨어졌다.
‘내가 지금부터 이들에게 확인하고자 하는 바는 나를 대하는 태도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직접 확인하고도, 공포가 아니라 경외심을 느낄 자들만이 앞으로 나와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케빈을 만날 때도.
크리스를 만날 때도.
로만은 항상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약육강식의 세계.
그 치열한 세상에서, 누군가의 머리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달콤한 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힘이 필요했다.
완벽한 지배.
로만은, 언제나 그렇듯 맹목적인 충성심을 바랐다.
“지금부터 차례대로 이차 테스트를 진행하겠다. 진행 방식은 간단하다. 나와의 대련으로 너희들의 가치를 증명하거라. 승리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나를 상대로 1분이라도 버티는 자들이 있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자는 합격 처리하고 조건 또한 기존보다 상향해 줄 것이다.”
로만의 발언.
그것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다들 당황했다.
이차 테스트를 치를 사람은 무려 120명이다.
로만이 실력자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들을 1분씩만 상대해도 시험에는 총 120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1분만 버텨도 통과라니.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로만은 오만했다.
만약 방금의 발언이 말뿐인 허언이라면, 로만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한 사내.
용병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당당하게 나섰다.
2m에 육박하는 건장한 체격에, 상처로 뒤덮인 얼굴은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경험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일차 테스트를 당당하게 통과한 부류.
자신감이 있는 만큼, 로만의 발언에 발끈했다.
‘1분만 버텨도 통과를 시켜 주겠다니. 로만 드미트리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정말로 로만이 홀로 블러드 팽을 토벌했다면 그만한 무력이 있다는 의미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를 1분 만에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첫 번째 차례로 시험에 통과함으로써, 내 가치를 증명하겠다.’
탁.
로만의 앞에 섰다.
체격적으로 큰 차이가 나는 상황에, 사람들은 로만과 사내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검을 받아라.”
크리스가 검을 던져 주었다.
살상력이 떨어지는 목검이었고, 사내의 덩치와 비교했을 때는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작았다.
이윽고.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거대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신호를 기다리던 사내는, 크리스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찼다.
1분을 버텨서 시험을 통과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모실지도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이 자리를 빌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고로.
손속에 자비란 없었다.
로만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검에, 사람들은 당연히 로만이 힘에 밀려 당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훅.
바람이 불었다.
사내가 휘두른 검에 로만의 머리가 찰랑거렸고, 이질적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로만은 가벼운 움직임으로 사내의 검을 피해 버렸다.
순간 크리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로만을 직접 상대해 본 경험이 있기에, 일보(一步)로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움직임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알았다.
순간.
사내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그는 황급히 검을 회수하며 로만을 공격하려 했지만,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시야가 빙글 돌았다.
툭.
콰당!
“크윽.”
로만이 발을 걸었다.
사내의 균형은 무너졌고, 육중한 체구가 그대로 땅바닥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사내가 고개를 들어 로만을 확인하려는 순간, 로만은 어느새 그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다음.”
그제야.
사람들은, 이번 시험이 일차 테스트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로만이 강하다 할지라도.
한 60번째 차례가 진행될 즈음에는, 로만의 체력이 고갈돼서 합격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서를 미루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서, 합격자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달랐다.
“……말도 안 돼.”
60번째 도전자.
그도 단칼에 나가떨어졌다.
사람들은 도전자가 무력하게 쓰러지는 모습에, 양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이게 현실인지를 확인했다.
‘로만은 괴물인 건가?’
60번의 대결.
60번의 패배.
다들 1분은커녕 30초도 버티지 못했다.
나름 칼밥 좀 먹었다는 사람들이 악에 받쳐 덤볐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눈앞에 하늘이 보였다.
소름이 돋았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만의 힘으로 블러드 팽을 토벌했을 정도의 강자였고,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태도. 압도적인 무력.
그리고 목소리에서부터 사람의 심장을 옥죄는 카리스마는, 로만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 주었다.
처음 말했던 것처럼.
로만은 포식자(捕食者)였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포식자.
사람들의 가슴이 뛰었다.
로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가 했던 말이 정말 현실로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너희가 시험에 통과하고 나의 사람이 된다면. 너희들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포식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 로만 드미트리가, 그것 하나만큼은 약속하마.”
주체적으로 살게 해 준다는 것.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한 말이었다.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어떻게든 시험에 통과한다. 로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앞으로 없을 일생일대의 기회야.’
본능이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동아줄을 붙잡으라고.
아직 로만이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평가받는 지금.
지금이야말로, 잠룡(潛龍)의 등에 올라탈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였다.
“다음.”
“네네, 갑니다.”
61번째 차례.
루카스가, 무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