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사교 파티에서 생긴 일 (4)
말문이 턱 막혔다.
안토니 바르코는 로만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런 상황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로만은 파혼을 했다.
자신의 협박이 통했다는 의미고, 칼자루는 본인이 쥐고 있었다.
“로만. 지금부터는 단어 하나하나 잘 생각해서 말을 내뱉는 게 좋을 거야. 너는 단순히 정략결혼을 앞두고 다른 여성들과 문란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바르코의 여인을 건드렸어. 너에게 바르코의 사람이 되라는 것은 네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의미야. 그나마 방계의 여인이 아니라 바르코의 직계인 내 동생과의 혼인을 제안한 것은, 너와의 관계를 생각한 내 마지막 배려였다고. 그런데 지금,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같잖은 이유’라고 말했어?”
목소리가 분노로 들끓었다.
좀처럼 분노가 가라앉질 않는 모양인지, 그는 술을 병째로 들이키더니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난 너와 달라. 너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드미트리의 치부지만, 나는 앞으로 바르코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야. 그런 내가 원하던 로렌스의 꽃을 빼앗아 간 것으로도 모자라, 바르코의 여인을 건드려 놓고도 네가 무사하리라고 생각해? 너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거야.”
태도가 변했다.
친근했던 친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안토니 바르코는 쥐고 있는 칼자루를 턱밑에 들이밀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로만이라면, 이 정도 말했을 때 눈을 깔고 숙이고 들어올 것이 뻔하다고.
하지만.
로만은 오히려 싸늘하게 웃었다.
“마음대로 해.”
상대의 무기.
그건 진짜 ‘칼’이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그 말에, 로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어차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야. 이미 쓰레기 취급을 받는 평판에, 정략결혼을 해 놓고도 여러 여자를 건드리고 다녔다는 소문이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아아, 네 말처럼 드미트리의 명예가 실추되기는 하겠지. 그런데, 난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잖아?”
“이 새끼가……!”
“안토니. 지금 너야말로 처신 똑바로 해.”
바르코.
그들은 착각하는 게 있다.
바르코 가문이 동북쪽 일대의 실세이기는 하나, 그들의 힘은 이곳이 아니라 중앙 정부로부터 비롯되었다.
연줄에 의한 힘.
단순히 동북쪽 일대에서의 영향력은, 드미트리를 넘어설 수 없다.
로만이 말했다.
“내가 파혼을 택한 이유는 네 협박에 의해서가 아니야. 진심으로 이 결혼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주변의 비난을 감수하고도 결단을 내린 거지. 결과적으로 너는 네가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어. 드미트리가 로렌스에게서 등을 돌렸으니, 바르코로서는 앞으로의 계획을 한결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 그런데 지금, 바르코의 장자인 네가 나에게 이빨을 드러내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로렌스를 도와 바르코를 방해하게 되지 않을까?”
순간.
안토니 바르코는 심장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협박에, 로만은 오히려 상대의 목에 칼을 같이 들이밀었다.
‘……로만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아니다.
로만은 나약한 녀석이었다.
드미트리의 장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문득.
안토니 바르코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떠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블러드 팽을 토벌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는 사실, 힘을 숨긴 잠룡(潛龍)이었다.”
그 소문.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로만이 어떤 녀석인지를 잘 알기에, 그 녀석이 블러드 팽을 토벌할 힘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입을 바짝 마르게 하는 이 압박감에, 로만에 대한 평가를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해. 로만이 달라졌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그런 녀석은 이제 없었다.
침묵은 길었다.
고민에 빠진 안토니 바르코의 모습에, 로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차피 너에게 선택지는 없어.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나에게 술을 먹이고 함정을 파는 번거로운 과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겠지.’
이번 사건.
간단한 문제다.
드미트리가 대놓고 바르코가 바라던 목표를 빼앗았는데도, 바르코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왜일까?
드미트리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드미트리를 적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기에, 바르코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로만은 현실을 직시시켜 주었다.
안토니 바르코는 자존심이 상해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내 현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이번 일을 이렇게 끝내면, 적어도 앞으로 로렌스와의 일에는 참견하지 않을 거지?”
“그래.”
“그렇다면 이번 일은 이대로 마무리하도록 하지.”
타협을 보았다.
고개를 숙이는 안토니 바르코의 모습에, 로만은 속내를 숨겼다.
‘내가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위협했던 바르코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적.
바르코는 로만의 반대편에 섰다.
로만은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을 베풀지만,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 상대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안토니 바르코에게 일시적인 평화를 제시한 이유는, 평화를 바란 것이 아니라 드미트리가 피를 흘릴 이유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바르코를 단죄할 무대는 굳이 드미트리일 필요가 없겠지. 바르코와 로렌스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필사의 결전을 벌일 때. 나는 바르코가 안심한 틈을 노려서 그들의 숨통을 끊어 버릴 것이다.’
마교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백중혁은 암수(暗數)에 당하기도 하고, 역으로 암수로 상대를 무너트린 경험도 많다.
바르코를 적으로 인식했다고 해서.
지금 당장 얼굴을 붉히고 싸우겠다고 말하는 것은, 제 살을 깎아 먹을 줄만 아는 멍청이에 불과하다.
때로는 가면을 쓰고.
때로는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며.
로만은 안토니 바르코에게 아주 잠깐의 평화를 제시했다.
‘목이 타네.’
로만은 술잔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존심이 상해 얼굴을 들지 못하는 안토니 바르코를 바라보며, 천천히 술을 목으로 넘겼다.
꿀꺽.
목이 말랐다.
로만은 밀실을 나섰다.
베일에 싸여 있던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사교 파티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더 바빠지겠어.’
할 일이 많았다.
반년 뒤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그 전에 바르코와의 원한을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가문의 힘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번 문제는 로만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기회에 자력(自力)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로만은 아버지로부터 좋은 조건을 얻어 냈다.
‘아버지는 내 병력을 직접 차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어. 그걸 활용해, 나만의 세력을 만들어야 해.’
현생.
로만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아직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지만, 로만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 있었다.
바로 군림(君臨)해야 한다는 것.
천마의 삶이 그랬다.
평범하게 살 수 없기에, 로만은 지금부터 하나하나 준비해서 완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렌스와 바르코의 분쟁.
그것은 경험을 쌓기 좋은 무대였고, 나아가 국방의 의무 또한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길.
많은 귀족이 말을 걸었다.
로만은 어느새 파티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가 퇴장한다고 하자 아쉬워하는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였다.
파티장을 나서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로만의 귀에 들렸다.
‘케빈?’
소음의 주인공.
그 중심에는, 기사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는 케빈이 있었다.
호위(護衛).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말에, 로만을 따라나선 케빈은 좀처럼 흥분된 마음을 감추질 못했다.
‘내가 귀족의 호위가 되다니.’
그것도 평범한 귀족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호위가 되었다는 사실에, 케빈은 자신의 역할을 그 어느 때보다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한스에게 부탁해서 나름 자신이 입을 수 있는 멋들어진 갑옷을 걸치고 나왔고, 머리에 맞지도 않는 투구를 푹 눌러쓰고는 진중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의 호위 케빈.
언행을 조심하라는 크리스의 조언처럼, 자신의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은 달랐다.
케빈이 아무리 노력해도, 10대 중반의 소년병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쟤 뭐야?”
“로만 드미트리의 호위라던데?”
“푸흡, 진짜 가지가지 하네.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에서 버림받은 장자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검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은 애송이를 호위랍시고 데려오다니.”
“그게 드미트리의 수준이지, 뭐.”
파티장의 문 앞.
각 귀족의 호위들이 자리를 지키는 상황에서, 바르코의 문양을 새긴 기사들이 케빈에 대해 말했다.
마치 대놓고 들으라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조금도 줄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케빈은 화가 나는지 얼굴을 붉혔다.
“참아.”
크리스였다.
그 또한 기사들의 말을 들었지만, 바르코의 기사들과 언쟁을 벌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들은 바르코 가문의 기사야. 주군이 바르코 가문과 어떤 이해관계로 얽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대응했다간, 우리로 인해 주군이 곤란한 상황을 겪을지도 몰라. 내가 출발하기 전에도 말했었지. 우리는 드미트리의 얼굴이고, 우리의 언행에 주군의 평판이 달렸다고. 그러니까 저들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끝까지 평정심을 지키고 호위로서의 품위를 보여 줘.”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를 당하는 것.
사실,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빈민가에서 살았던 케빈에게는 일상이었고, 그래서 기사들의 험담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도가 지나쳤다.
그들은 케빈에게 다가오더니, 케빈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와. 진짜 어떻게 이런 애를 호위로 데려올 생각을 하지?”
“이것 봐. 투구가 머리에 맞지도 않잖아. 나름 호위랍시고 대장간에서 얼추 맞는 갑옷을 주워 온 모양인데, 진짜 수준 떨어지네. 이러니까 네 주군이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거야.”
케빈이 눈을 치켜떴다.
자신을 욕하는 건 참았다.
그런데 드미트리의 얼간이를 언급하는 순간, 케빈은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말조심해.”
“뭐?”
“로만 도련님은 그따위 말을 들으실 분이 아니야. 그러니까, 말조심하라고.”
“이 새끼가.”
기사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바르코와 드미트리.
로렌스의 사건으로, 두 가문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게다가 안토니 바르코가 평소에 로만 드미트리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의 기사들도 굳이 드미트리 가문의 사람들을 대우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배경은 곧 그들의 힘이다. 그렇지 않아도 드미트리 가문이 거슬렸던 한 기사가, 케빈의 얼굴을 향해 큼지막한 손을 휘둘렀다.
짜악!
“다시 말해 봐, 이 새끼야.”
고개가 돌아갔다.
케빈의 얼굴에서 피가 터졌고, 그 순간 크리스가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뽑지는 않았다.
케빈을 위해서는 나서는 것이 맞으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주군이 입을 피해를 걱정했다.
케빈도 마찬가지였다.
빈민가에서는 당한 것은 반드시 갚으라고 배웠지만, 크리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분노를 억눌렀다.
‘난 주군의 검이야.’
호위.
로만의 검이다.
로만에게 쓰임새가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기에, 케빈은 굳은 얼굴로 기사들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마치 더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 모습에, 바르코의 기사들은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
“오냐, 언제까지 자존심을 지키나 보자.”
한 번 더.
기사가 팔을 들었다.
그대로 케빈의 뺨을 날리려는 순간.
짜악-!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대는 케빈이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난 로만이, 싸늘한 표정으로 기사의 뺨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