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615)

23화 사교 파티에서 생긴 일 (1)

한참 케빈의 훈련으로 열을 올릴 무렵.

로메로 남작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하나의 사실로 인해, 드미트리 주변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드미트리와 로렌스의 혼사가 엎어졌다.”

파혼.

사람들은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바르코와의 분쟁을 해결해 줄 드미트리의 비호가 사라졌다는 의미이며, 이로써 로렌스 가문은 홀로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로메로 남작은 로렌스 가문의 무책임한 태도가 파혼의 이유라 밝혔지만, 대중들의 해석은 그와 달랐다.

“파혼의 이유? 뻔하지. 로렌스 가문의 금지옥엽이 가문을 위해서 혼사를 결심했지만, 막상 드미트리의 얼간이를 직접 경험해 보니 참을 수가 없던 거지.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로렌스가 일방적으로 파혼을 요구할 이유가 있겠어? 바르코의 칼날이 목 앞까지 치고 들어왔는데도 이런 결단을 내릴 정도라면,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소문보다도 더 최악이라고 생각해야겠지.”

“설마. 그러다가 가문이 멸문당하면 어쩌려고. 그리고 드미트리의 장자가 블러드 팽을 토벌했다는 소문도 있던데?”

“넌 그런 소문을 믿어? 십수 년간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던 녀석이, 뜬금없이 블러드 팽을 토벌했을 리가 없잖아. 아마도 파혼을 대비해서 미리 로만의 평판을 관리한 거지. 로만 드미트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대단한 사내인데도 로렌스가 파혼을 요구했다고 말이야.”

일반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평판이 무섭다.

로만 드미트리는 평생을 얼간이로 살았고, 플로라 로렌스는 로렌스의 꽃이라 불리며 찬양을 받았다.

하나의 사건.

다른 평판.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책임을 로만 드미트리에게 물었고, 블러드 팽의 토벌로 이미지가 개선되었는데도 일방적인 인식을 완전히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드미트리 가문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한다고 바꿀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실제로 그간 로만 드미트리가 얼간이처럼 살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다만.

로만을 믿었다.

최근의 로만은 소문과는 완전히 달라졌기에,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을 웃으며 넘겨 버릴 수가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르코의 사교 파티 날이 밝았다.

* * *

“……이걸 정말 입으라는 말이냐?”

로만의 표정이 굳었다.

눈앞이 반짝거렸다.

금색 수실이 화려하게 장식된, 시선을 사로잡는 사치스러운 옷에 로만은 질린다는 눈빛을 보였다.

한스가 말했다.

“도련님. 파혼 이후에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드미트리 가문, 그리고 도련님의 위상이 있는데 절대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이 옷에 관해 설명해 드리자면, 동북쪽 일대에서 활동하는 장인 피에르(Pierre)의 작품이며, 앞에 수십 명의 대기를 뿌리치고 맞춤옷을 제작하기 위해서 정말 거액을 들였습니다. 그 양반이 돈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서, 돈을 보따리째 들고 갔는데도 회유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걸작을, 제 피와 땀이 들어간 결실을 설마 입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시죠?”

2주 전.

로만이 파티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직후, 한스는 매일같이 로만을 위한 옷을 찾아다녔다.

어울리는 컬러가 있는지 옷감을 대 보고.

유명 장인들에게 연락하는 한스의 모습에, 그가 얼마나 유별난 사람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단호한 태도에, 로만으로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입도록 하지.”

과거.

사람들은 천마라는 단어에 마귀를 떠올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신의 수하라고 할지라도 단번에 목을 베어 버리는 그런 괴물이라고 말이다.

실제로도 그랬던 적이 있다.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마음으로 수하들을 단죄한 일이 있었지만, 평상시의 로만은 수하들의 정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스는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드미트리 가문에서 그에게 일용할 양식과 급여를 부여한다지만, 그는 로만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장인을 찾아다니면서까지 옷을 구해다 바쳤다.

그 행동.

그에 대가는 무엇일까?

한스는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 로만이 기쁜 마음으로 이 옷을 받아들이길 바랄 뿐이다.

그렇기에.

웃어 주었다.

특별하게 힘이 들지 않는 행동이기에.

화려한 옷이 눈에 충분히 부담스러운데도, 굳어 있는 얼굴을 애써 피며 웃는 얼굴을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나, 이 세상의 예법이 이러하다면 그 룰을 따를 필요가 있겠지.’

제국으로 가면.

제국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적응기다.

어렸을 때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위에서 내리는 지시를 따르며 현실에 적응했던 것처럼, 로만은 자신이 주도할 때와 미리 만들어진 것을 따라야만 하는 때를 알았다.

화려한 옷을 입겠다는 결정. 그것은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며, 로만은 그렇게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환복에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나온 로만의 모습에, 한스의 눈이 하트로 변했다.

“……정말, 정말 멋있으십니다.”

검은색과 금빛의 조화.

진중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검은 바탕에 피어나는 황금빛에, 로만은 명망 높은 귀공자처럼 보였다.

이 순간.

한스는 확신했다.

이번 사교 파티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의 주군인 로만 드미트리일 것이라고.

* * *

사교 파티에 동행할 사람은 둘이었다.

바로 크리스와 케빈.

호위로 따라가는 자리기에, 그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장을 갖추었다.

철그럭, 철그럭.

갑옷의 쇳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크리스는 기사 작위를 하사받으면서 맞춤 제작한 갑옷을 입었고, 몸에 딱 들어맞는 은빛의 갑옷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리고 바람에 찰랑거리는 금빛의 머리칼.

그 모습은 크리스가 왜 미남 검사라고 불리는지를 증명해 주었고, 의젓한 자세는 화려한 외관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슥.

허리춤의 검을 살폈다.

땅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길이의 검은, 드미트리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늦어.”

아직 케빈이 나오질 않았다.

호위는 주군보다 먼저 준비를 끝마치는 것이 원칙이기에, 크리스는 살짝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였다.

멀리서, 왜소한 체구의 실루엣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철컥, 철컥.

“……죄송합니다!”

케빈이었다.

그의 모습.

크리스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민에 불과했던 그에게는 맞춤 갑옷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10대 중반의 나이는 완벽하게 맞는 사이즈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장간에서 얼추 사이즈에 부합하는 갑옷을 걸쳐 입었다.

문제는 그것조차도 케빈에게는 크다는 것이었고, 땀을 뻘뻘 흘리는 이마를 대부분 덮을 정도로 큰 투구에 크리스는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을 보였다.

‘이런 놈과 같이 호위를 해야 한다니.’

케빈.

그는 딱 소년병 같았다.

군법의 체계조차 모르는, 엉성한 외관만큼이나 케빈은 갑옷을 입고 중심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둘이 대련했던 날.

크리스는 케빈의 독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빈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주제를 모르는 그 태도가 크리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흘러내리는 투구를 부여잡는 케빈의 모습에, 크리스가 날이 선 어투로 말했다.

“우리는 주군의 호위이자, 드미트리의 얼굴이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섣불리 행동하지 마라. 우리의 행동에 도련님의 평판이 달려 있으니, 언행에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지난 대련.

그 일로 크리스는 로만을 진심으로 따르기로 했다.

예전이었다면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지금은 로만이 어디서 무시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주군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평판은 곧 자신의 평판일 테니, 앞으로는 주군을 위해서라도 언행에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로.

케빈이 걱정되었다.

예법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녀석이기에, 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교 파티에서 실수할 수도 있다.

크리스의 말에.

케빈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기사님.”

“좋아.”

기사님이라는 칭호.

크리스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케빈과 그는 같은 위치에 있으나, 케빈은 크리스가 어려운 모양인지 아직 ‘기사님’이라고 불렀다.

마음이 조금 풀렸기 때문일까.

크리스는 케빈에게 다가가, 삐뚤어진 투구를 다잡아 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시간이 되었다.

로만이 나오자, 크리스와 케빈은 짐을 챙겼다.

이제는 바르코로 떠날 차례였다.

* * *

바르코의 사교 파티.

이번 파티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주제는, 바로 로렌스와 파혼한 드미트리의 장자가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파티는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술을 홀짝이던 귀족이 옆에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로만, 그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바르코의 장남이 뻔히 플로라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정략결혼을 강행하더니, 돌연 파혼하고서 바르코의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잖아.”

“그래서 얼간이라고 불리는 거지. 생각이 있는 녀석이라면, 둘 중 하나를 확실하게 밀어붙였겠지.”

“하긴. 정략결혼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바르코에 대항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바르코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로렌스를 외면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지.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서 드미트리 가문의 입장이 참으로 애매해졌어. 그들이 동북쪽 일대의 실세인 것은 사실이나, 로렌스를 한번 건드려 놓고 앞으로 바르코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솔직히 욕심이지.”

“그래도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로만 드미트리가 파티에 참석한다잖아. 참으로 웃긴 녀석이야, 하하하.”

귀족들이 웃었다.

로만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가문 간의 관계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다가, 플로라에게 파혼을 당하고서 버림을 받은 녀석.

이번 파티에 참석한 이유도 뻔히 보였다.

양쪽에 버림받은 그가, 바르코와의 관계라도 회복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파티 곳곳에서.

로만을 주제로 한 대화가 꽃을 피웠다.

대부분 로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기에, 로만을 깎아내리는 발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귀족 무리.

그곳에서도 로만의 평판은 바닥이었다.

드미트리의 배경이 면전에서 무시당하는 것은 막아 주었으나, 뒤에서 나오는 험담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

로만을 모르는 한 귀족 여식이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직접 보면 알 겁니다. 인상도 더럽고, 체격도 작아서 볼품이 없는 녀석입니다. 그런데 꼴에 드미트리의 장자라고 얼마나 허세를 부리던지. 귀족들 사이에서는 처음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막말로, 제가 플로라 로렌스였다고 하더라도 그 녀석과의 혼인은 혀를 깨물어서라도 반대했을 겁니다.”

“그 정도로 최악이에요?”

“괜히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아니 땐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고, 사교 파티에서의 평판은 항상 정확합니다. 술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하거든요.”

그때였다.

파티가 무르익어 갈 즈음.

바르코의 하인이, 중후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 로만 드미트리 님이 입장하십니다.”

로만.

그 이름에, 방금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람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로만이 파티장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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