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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615)

19화 맹목적인 신뢰 (1)

로만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한스. 평소에 내가 약을 하는 모습을 보았거나, 아니면 약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있었나?”

“예?!”

한스가 화들짝 놀랐다.

약이라니.

평소처럼 심부름이나 시키려는 줄 알았던 그로서는, 로만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로만은 확신했다.

자신이 빙의하기 전에도 로만의 일상을 세심하게 챙겨 주었던 한스라면, 분명히 자신이 바라는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로만이 말했다.

“너를 떠보는 것도, 그렇다고 책망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다만,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내 기억이 아니라 3자의 시선으로 확인할 생각이다.”

변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빙의로 인한 기억의 상실.

구구절절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로만은 자신의 위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담담하게 던진 물음.

고민은 한스의 몫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그는, 결심을 내렸는지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최근에 내가 경험한 로만 도련님은 말을 허투루 하실 분이 아니야. 정말로 3자의 시선에서 약을 사용한 정황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 테니,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약을 사용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도련님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던 적은 있습니다.”

“그게 언제였지?”

“지금으로부터 보름 전이었던가. 도련님이 오랜만에 사교 파티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것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사교 파티를 다녀오신 이후로 도련님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외출을 삼가고 방에 틀어박혀 지냈고, 생기를 잃은 얼굴로 매일 밤 과도한 양의 술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련님이 사교 파티에서 금지된 약물에 손을 댄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었습니다.”

로만이 자살한 날.

한스는 백중혁이 빙의한 로만을 바라보며 약을 의심했었다.

최근에 귀족들 사이에서 워낙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보니,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면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정황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인하신 도련님이 그따위 약에 손을 댈 리가 없습니다.”

단순히 의심으로 끝난 얘기였다.

한스는 로만을 믿었다.

블러드 팽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보여 주었던 로만의 총명함은, 결코 중독자가 보여 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교 파티라.’

로만이 생각에 잠겼다.

사교 파티.

익숙한 단어였다.

로만은 사교 파티에 참석하고서 변화가 생겼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플로라가 들은 음해의 소문도 사교 파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참석했던 사교 파티를 주체한 사람이 누구지?”

문제의 근원.

그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바르코 가문의 파티에 참석하셨습니다.”

바르코.

상황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설명은 간단했다.

“바르코 가문의 장자와는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로렌스와의 혼담이 오가면서부터 사이가 서먹서먹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족 자제분 중에 그분만큼 로만 도련님과 자주 어울렸던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르코 가문의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크게 이상하진 않았습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으나, 그렇다고 그 전의 관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바르코의 장자.

안토니 바르코는, 로만과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내였다.

그렇기에 둘은 통했다.

동북쪽 일대에서 힘이 있는 가문의 출신에, 쓰레기 같은 평판의 두 사내는 종종 어울려서 놀았다

‘둘은 절친한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을 거야. 비슷한 평판이니, 단순히 유흥의 동료로서 같이 어울리는 정도였겠지. 그런데 그 관계가 플로라를 중심으로 뒤얽혀 버렸어. 안토니 바르코는 플로라와의 혼인을 바랐고, 그건 로만도 다르지 않았지. 그리고 그 싸움의 승자는 로만이 되었어. 끝끝내 바르코를 거부한 로렌스 가문이, 바르코보다는 드미트리가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바르코의 초대.

그때부터 상태가 이상해진 로만이 죽음이라는 선택을 내렸다면, 원인은 바르코에 있음이 확실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은 바르코가 로만의 자살을 유도했다는 거야. 드미트리가 로렌스와 하나가 된다면, 바르코로서는 플로라는 물론이고 로렌스의 비옥한 토지도 차지할 수 없게 되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애초에 혼인이 성사되지 못하게 막는 것. 한스에게 듣기로는 예전에 바르코가 로렌스를 대신해서 나와의 혼인을 바랐다는 것을 보면, 이제 그들에게 남은 방법은 파혼을 유도하거나 아니면 결혼하지 못할 상황을 만드는 수밖에 없겠지.’

그림이 보였다.

로만의 죽음.

그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보는 세력은 바르코다.

자살을 어떻게 유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음해하는 소문을 퍼트려 파혼을 유도하고.

로만을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어딜 가나 쓰레기들은 존재하지.’

진실은 대단하지 않았다.

다만.

못마땅했다.

로만의 삶을 살아가기로 했기에, 바르코라는 이름이 로만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때였다.

한스가 말했다.

“……사실 며칠 전에 바르코로부터 파티에 초대하는 초대장이 날아왔습니다. 도련님이 폐관 수련에 돌입하셔서 전달해 드리지 못했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요?”

“바르코가 날 초대했다고?”

“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로만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어떤 해코지를 해 놓고도, 당당하게 다시 보자고 초대장을 날릴 정도로 매우 대담했다.

‘거슬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르코라는 이름이.

앞으로 로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슬리는 부분들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갈 필요가 있었다.

고로.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전해.”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트리는 것.

그것이, 앞으로 로만이 살아갈 방식이었다.

* * *

파티는 2주 뒤였다.

시간적 여유가 생긴 로만은,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케빈을 찾아갔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케빈.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로만의 제안에 일단 따라오기는 했으나, 문제는 자신이 로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케빈은 10대 소년에 불과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평범한 재능을 타고난 그로서는, 지난 일주일간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자신의 역할을.

왜, 자신을 받아 주었는지를 말이다.

로만이 말했다.

“나는 너를 나의 검(劍)으로 쓰고자 한다. 하지만 사람의 쓰임새는 타인의 의지대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너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도록 세 가지의 길을 말해 주도록 하겠다.”

검.

의외였다.

평생 검 한 번 만져 본 적 없는 자신을 검으로 쓰겠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으나, 케빈은 로만의 말에 조금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검으로서의 쓰임새를 포기하는 것이다. 검을 잡는 것이 두렵고,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검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손과 발이 되어라. 한스를 따라다니며 한스가 하는 일을 배우고, 내가 지시하는 위험하지 않은 일들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넌 네 역할을 할 수 있다.”

안전한 선택지.

위험을 강요하지 않았다.

강제되는 위험은 변수를 낳고, 로만은 나약한 인간을 자신의 검이랍시고 곁에 두지 않았다.

“두 번째는 검으로서 나의 곁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10대 중반에, 평생을 검사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네가 단시간에 강해질 방법은 없다. 세상은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다. 뒤늦게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가 필요하고, 네가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한다면 나는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수로 너의 의지를 시험할 것이다. 분근착골은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을 선사하는 방법. 말뿐인 결단이 아니라, 결과로서 네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서늘했다.

분근착골.

단어에서 풍겨 오는 공포는, 케빈의 입을 바짝 마르게 했다.

그러나 마지막.

로만은 케빈을 받아들였을 때, 어쩌면 케빈이 마지막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툭.

“이 검으로 네 팔목을 직접 잘라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고통을 참아 내고 목표를 이루어 낸다면, 너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 떨어진 검.

방금까지만 해도 의지를 보이던 케빈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의 감정이 떠올랐다.

광마.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광마는 케빈과 마찬가지로 무공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사천왕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천부적인 재능 덕분에?

아니다.

그의 성장은 강력한 의지로부터 비롯되었다.

‘마교의 보고(寶庫)에는 고대의 무공들이 존재한다. 그중 귀혼마공(鬼魂魔功)은 강력한 마기로 강함을 추구하는 수많은 마인을 폐인으로 만들었지. 광마는 나에게 쓰임새가 있는 검이 되고자 귀혼마공을 익혔고, 귀혼마공의 시련을 이겨 냄으로써 내가 신뢰하는 검이 되었어.’

귀혼마공.

위험한 무공이다.

무공을 사용하는 순간 정신이 마기에 갉아 먹히고, 혈관을 난도질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고통이다.

로만이 말한 마지막 제안처럼,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 내는 고통 속에서도 무공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귀혼마공이다.

보통의 의지로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

그래서 귀혼마공을 택했다.

케빈이 정말 귀혼마공을 감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적어도 선택지는 주고 싶었다.

로만이 말했다.

“범인(凡人)이 재능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과 의지가 필요하다. 너는 이미 나의 사람이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나는 너를 가치 있게 쓸 것이나, 그 쓰임새는 네가 결정할 몫이다.”

결정권을 넘겼다.

케빈이 마른침을 삼켰다.

검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크게 흔들렸고, 입 안은 바짝 말라서 삼킬 침조차도 없었다.

스스로 팔을 잘라라.

가혹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후욱, 후욱.”

숨이 거칠어졌다.

이게 옳은 일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바라보는 로만에 대한 신뢰만큼은 있었다.

로만을 믿었다.

자신을 구해 주었던 것처럼.

로만이 이번에도 자신의 삶을 구해 주리라 믿었다.

“하겠습니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이빨이 바스러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탁!

검을 낚아채는 케빈.

그리고 그가 자신의 팔에 검을 박아 넣으려는 순간.

‘환마(幻魔)의 술.’

화악.

로만의 눈이 번뜩였다.

동시에 마나가 휘몰아쳤다.

마교의 무공.

수많은 사람의 혼을 현혹했다고 알려진 환마의 무공이 발휘되면서, 케빈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해 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픽 쓰러졌다.

로만의 세상에서는 죽은 듯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지만, 케빈의 세상에서는 검을 박아 넣으려는 그 순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환상의 세계였다.

이윽고.

콰득!

케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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