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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615)

14화 기(氣)와 마나 (3)

참 이상했다.

케빈이라는 소년을 보면서 광마가 떠올랐던 것처럼, 크리스는 기억 속의 인물을 떠올리게 했다.

‘혈마(血魔)와 닮았어.’

혈마와 광마.

로만을 가장 잘 따르던 수하들이다.

광마는 로만의 말이라면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 정도로 미친 녀석이라 광마라 불렸다면, 혈마는 수하로 들이기 전부터 무림을 주름잡던 고수였다.

혈마교(血魔敎)의 우두머리. 마도의 권력을 두고 그들과 부딪치는 것은 필연적이었고, 넓은 평야에서 천마와 혈마가 한바탕 붙었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발을 한번 구르면 땅이 뒤집혔고, 검을 휘두르는 순간 하늘이 갈라졌다.

그날.

혈마는 패배했다.

그는 혈마교를 통일한 역사적인 인물이었지만, 그가 상대하는 천마 백중혁의 무력은 차원이 달랐다.

마신(魔神).

혈마가 무릎을 꿇었다.

피를 쿨럭쿨럭 내뱉던 그는, 황당하게도 천마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면서 너처럼 강한 녀석은 처음 보는구나. 내 패배를 인정한다. 혈마교는 앞으로, 천마 백중혁의 마교를 따를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너처럼 강해질 수 있는 것이냐? 어차피 앞으로 너를 따를 몸인데, 내가 강해지면 서로 좋은 일이지 않은가.”

건방지면서도 독특한 인간이었다.

당장 죽을 얼굴을 하면서도, 혈마는 자존심을 버리고 강해지는 방법을 물었다.

처음에는 그런 혈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혈마는 일구이언(一口二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천마를 맹목적으로 따랐고, 본인이 혈마교의 정점이라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마교의 무림 정벌은 한결 수월했다.

정파의 삼대고수라고 불리던 남궁세가의 가주가, 천마 백중혁도 아닌 혈마의 검에 목이 날아갔으니 말이다.

크리스와 혈마.

비슷한 인간이었다.

달아오른 얼굴은 상처 입은 자존심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강해지고 싶은 욕망에 그걸 억눌렀다.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지.’

마음에 들었다.

로만은 예전부터 솔직한 사람들이 좋았다.

앞에서는 바라는 것이 없다면서 뒤로는 흑막을 주도하는 사람들보다는, 당당하게 바라는 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었다.

욕망의 목적은 무엇이든 좋다.

재물을 바라면 재물을 부여할 것이고, 강해지고 싶은 녀석들은 강해지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배신하는 일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고?

배신의 최후를 아니까.

욕망이 강한 사람들은 현실 직시에 빨랐고, 로만은 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산이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흥미가 돌았다.

크리스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아마도 과거에 무슨 악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악연보다는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재능이 나쁘지 않아.’

크리스의 골격은 탄탄했다.

만약 로만의 방식으로 무공을 착실하게 수련했다면, 지금쯤 일류(一流) 이상의 경지를 넘보았을 정도로 괜찮은 재능을 타고났다.

다만, 쓰레기 같은 방식에 재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

크리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던 로만은, 얼굴의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툭 내뱉었다.

“해답을 말해 줄 수는 없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내가 말했지. 누군가로부터 내려오는 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라고. 내가 너에게 해답을 말해 줄 수 있다 한들, 그것은 네가 살아온 인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 해답을 얻고 싶거든 지금부터 어떻게든 내 곁에 남아라. 6개월 뒤. 나는 전장으로 떠난다.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떻게 강해지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적을 무너트리는지를 똑똑히 보아라. 만약 10년 뒤에도 네가 내 곁에 남아 있다면…….”

흔들리는 크리스의 눈동자.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확실하게 말했다.

“너는 분명히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 *

훈련은 끝났다.

로만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크리스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전쟁.

언젠가 경험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기사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드미트리의 얼간이를 따라 전장(戰場)에 나가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차라리 차남이라면 괜찮았다.

수도에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라면 자부심을 느끼고 따르겠는데, 지금의 상황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만의 방식이라.’

로만의 조언.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것을 잘 배워도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그에게, 로만의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자신이 노력했던 세월이 부정당하는 기분에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로만의 말을 들을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지식은 결국 같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검사로서 강해지는 것은 한 갈래 길이 아닐 텐데, 나는 이제껏 왜 그들의 방식을 고수하려고 노력했을까.

조금은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었다면, 자신에게 더 맞는 길이 있지 않았을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만약.

로만이 말뿐인 사람이었다면.

크리스는 이토록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잠깐이지만 직접 경험해 본 로만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도련님의 재능은 진짜였어. 어떻게 단시간에 그렇게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2년 전에는 일반인보다 못한 근력을 보유했던 도련님이 완전히 달라졌어. 탄탄한 검술과 오라를 분출하는 재능. 어렸을 때부터 힘을 숨겨 왔던 것이 아니라면, 도련님은 본인만의 방식을 찾은 것이 분명해.’

전자의 가능성.

말이 되지 않는다.

힘을 숨길 이유도, 그걸 이제 와서 드러낼 이유도 없다.

로만은 짧은 시간에 강해졌다.

자신의 눈을 마주 보면서 확실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크리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뢰를 얻었다.

그날.

크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해가 저물었고, 다시 해가 떠올랐다.

밥도 먹지 않아서 초췌한 얼굴이 되어 버린 그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강해지고 싶어.’

인생의 목표.

그의 욕망은 무력에 있었다.

스승인 조나단 기사단장을 찾아갔고, 앞으로 로만을 따라 전장에 나가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조나단.

그가 침착한 얼굴로 크리스를 보았다.

시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전쟁터에서, 조나단은 어미의 몸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던 어린 소년을 처음 보았었다.

그게 바로 크리스였다.

그는 재능이 있는 아이였고,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도 강해서 쑥쑥 성장했다.

그리고 자신을 아비처럼 따랐다.

그런 크리스가 자신의 곁을 떠나서 로만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서로의 신뢰.

둘은 서로를 믿었다.

크리스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앞으로 너는 드미트리 기사단의 소속이 아니다. 로만 도련님의 호위로서, 무슨 일이 있든 도련님의 곁에서 원하는 목적을 꼭 이루어라.”

“……감사합니다.”

피식.

조나단이 웃었다.

어렸던 아이.

까무잡잡했던 소년이 어느새 성장해서,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사실에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네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은 알게 되었구나. 내가 이제껏 경험한 크리스라는 사람이 따르겠다고 말할 정도라면, 로만 도련님은 더 이상 사람들이 말하는 얼간이가 아니겠지. 내일부터는 틈틈이 시간을 내도록.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름 비밀의 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겠지.”

“……스승님!”

휘둥그레지는 크리스의 눈.

앞으로 어떤 나날이 기다릴지 모르겠으나, 조나단은 누가 뭐래도 크리스가 마음으로 따르는 스승이었다.

* * *

반년 뒤.

로만은 타의에 의해서라도 드미트리를 떠난다.

다른 귀족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날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로만은 벌써부터 심장이 뛰었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랄 수 없는 사람이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결국 군림하는 삶을 살아야만 만족하겠지. 그러니 6개월 뒤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부터 나를 준비시킬 필요가 있다.’

세상에 완벽한 준비란 없다.

변수는 예상할 수 없는 법.

다만, 자신을 준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헤쳐 나갈 기반을 마련한다면, 고난 끝에 목적을 이루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크리스와 헤어지고.

로만은 영지의 도서관을 찾았다.

그리고는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다.

<……6성의 경지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음을 의미한다. 검을 통해 분출하는 오라의 크기가 십수 미터에 달하고, 마나를 응축하여 폭발시키는 공격은 수십 명의 병사를 단번에 쓸어 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대륙에 6성의 기사라고 알려진 사람은 12명. 그들을 대륙 십이검(十二劍)이라 부르며, 어느 국가에서든 귀빈의 대우를 받는다.>

대륙 십이검.

글자로 전달되는 정보만 보더라도 강한 사람들이다.

비효율적인 기의 분출로도 십수 미터에 달하는 오라를 뽑아낼 정도라면, 확실히 이 세상만의 방식으로 무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것이 무림의 기준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현재 로만의 수준으로는 함부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7서클의 경지부터를 우리는 대마도사라고 부른다. 그들은 반인반신(半人半神), 걸어 다니는 재앙이다. 마법 한 방에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지며, 단순히 다수를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6성의 기사보다도 두려운 존재가 바로 대마도사다.>

마법.

무림에는 없는 힘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찬찬히 읽을수록, 로만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명확해졌다.

‘책에 나와 있는 이 인물들이 언제 내 적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드미트리의 촌놈에게 그런 시련이 닥칠 확률은 매우 희박하겠지만, 변수라는 것은 예상할 수 없기에 위험한 법. 지금의 나로서는 변수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없다. 고로,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탁.

책을 덮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로만은 한스를 호출했다.

언제 어디서나, 그는 로만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한스의 태도는 정중했다.

블러드 팽.

로만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인에 불과한 자신을 인정해 주는 발언에, 한스는 로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사람은 한스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

그것에 목숨을 거는 하찮은 인생이라고.

그러나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른 법이고, 한스에게 있어 로만은 특별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내가 수련할 공간이 필요하다. 크기는 크지 않아도 상관이 없으나,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특히 방음이 확실할수록 좋다. 수련 도중에 방해를 받는 것은 정말 최악이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되묻지 않았다.

어떤 수련을 하는지.

왜 그런 공간이 필요한지.

사람이라면 여러 질문을 던질 법도 한데, 한스는 언제나 로만의 명령을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그리고 전에 만났던 케빈이라는 소년의 소재를 알 수 있나?”

“예. 혹시 도련님이 찾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케빈에게 거주지를 따로 마련해 준 상태입니다.”

“좋군.”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주군의 마음을 읽고 미리 행동하는 것.

한스는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케빈의 소재를 말해 주거라. 그때, 그 소년에게 약속했었지. 그에게 닥친 문제를 올바른 과정을 통해 확실하게 처리해 주겠다고. 그가 원하는 대로 블러드 팽이라는 원흉을 없애 버렸으니, 이제는 직접 찾아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겸사겸사, 케빈이라는 소년에게 바라는 목적도 있고.”

케빈.

광마를 닮은 아이.

크리스로 인한 여파인지, 그를 한 번쯤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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