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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615)

11화 변화 (4)

기사단의 훈련장.

한참 훈련에 열을 올리던 기사들은, 조나단을 필두로 도착한 영주 일행의 모습에 예를 갖추었다.

척.

“영주님을 뵙습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드미트리 가(家).

카이로 왕국 전체로 보자면 변두리에 있는 작은 영지에 불과하지만, 영지 내에서 드미트리 가문의 위상은 대단하다.

특히 드미트리 기사단이 받는 대우는 인근을 통틀어 최고 수준.

로메로 남작을 향한 존경심은,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형성하는 기사들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조나단 기사단장.

그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지금부터 로만 도련님의 검술 대련을 진행할 생각이다. 대련 희망자는 앞으로 나오도록.”

“…….”

희망자는 없었다.

조나단의 말이 워낙 갑작스러웠는지라, 기사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렸다.

당연했다.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다.

이겨도 본전이요, 패배할 경우는 기사단 퇴출을 걱정해야 할 상황.

로메로 남작을 향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그 아들의 재롱 잔치에서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희망자가 없다면 내가 상대를 정하도록 하겠다.”

조나단의 시선이 기사들을 훑었다.

드미트리 기사단은 단장을 제외하고 총 1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말이 기사단이지, 실제로 기사의 작위를 받은 사람은 조나단을 포함해서 딱 두 명.

나머지 14명의 인물은 서류상으로는 평민이었다. 물론 기사직을 희망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실력은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전에 알던 로만이라면 아무나 호명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달라진 로만은 그 한계를 알 수 없었다.

‘드미트리 기사단이 도련님에게 당하는 꼴을 볼 수는 없다. 고로, 도련님의 상대는 도련님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여야만 한다. 그래야 기사단의 위신을 살리고, 블러드 팽을 쓰러트렸다는 로만 도련님의 진짜 실력을 확인할 수 있겠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 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사단장은 함부로 검을 뽑는 위치가 아니었고, 그로서는 아쉬운 마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내렸다.

애초에 로메로 남작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로만의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크리스(Chris), 앞으로.”

“……예?”

호명된 남자.

금발의 미남이, 조나단의 부름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크리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른 일반 기사도 아니고, 드미트리 기사단의 부단장인 자신을 호명하다니.

“제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항명(抗命)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평소라면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겠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상대가 로만이라는 것.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크리스조차도, 드미트리의 얼간이인 로만은 치를 떨었다.

‘영주님의 자식만 아니었어도.’

예전에.

크리스는 로만과 관련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유흥가에서 폭력 사건이 발발했는데, 그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로만은 술이 얼큰하게 취한 모습으로 난동을 부리고 있었고, 드미트리의 장자라는 이름값은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그때. 경비병들과 같이 순찰을 나섰던 크리스가 현장을 발견했다. 그로서는 영지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고, 정중한 태도로 로만을 말리던 그는 갑자기 볼에서 화끈한 충격이 일었다.

짝!

뺨을 맞았다.

어디 자신의 몸을 만지냐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로만의 모습에, 그는 진심으로 살인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참았다.

로만 드미트리다.

개자식이라고는 하나, 드미트리의 성을 가진 남자.

크리스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사건을 무사히 넘겼지만, 그때부터 로만 드미트리만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었다.

그리고 그걸 조나단 기사단장도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은 대련 상대에서 제외되리라고 생각했는데, 부득불 자신을 고르니 항명의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조나단이 말했다.

“로만 도련님은 홀로 블러드 팽을 토벌했을 정도의 실력자시다. 동등한 대련을 위해서는 그만한 실력자가 나서야만 하고, 드미트리 기사단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크리스 너다.”

“이번 블러드 팽 사건은…….”

“크리스.”

조나단의 표정이 굳었다.

항명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

크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알겠습니다.”

이번 사건.

로만의 행보는 기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로만이 정말 블러드 팽을 처리했을 정도로 대단한 무력을 보유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크리스는 단호하게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직접 경험해 보아서 알지 않은가.

불과 2년 전에 로만에게 뺨을 맞았는데, 그건 검이라고는 조금도 훈련해 보지 않은 일반인의 근력이었다.

승패?

그런 걸 걱정하진 않았다.

다만, 이왕에 하는 대련이라면 제대로 하고 싶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라.”

“저는 대련을 실전처럼 하라고 배웠습니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검과 검을 맞대는 상황에서는 손속에 사정을 둘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이를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을 상대하는 영광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힐끗.

로메로 남작을 향하는 시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나단은 로만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런데.

피식.

‘웃어?’

로만은 웃었다.

무언의 승낙.

그것은, 크리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는 반응이었다.

크리스도 개념이 있다.

로만은 드미트리의 후계자.

자신이 모시는 영주님이 보는 앞에서, 그를 처참하게 무너트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웃음 한 방에, 이성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 새끼가.’

금발의 미남.

검이라고는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것 같은 외형과는 다르게, 그는 드미트리의 투견(鬪犬)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한번 붙으면 끝을 보는 사나이.

사람들은 너무도 강력한 상대에 로만의 안위를 걱정했다.

대련장 위.

목검(木劍)을 쥔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툭.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뒷발을 씰룩이며 신호를 기다리던 크리스는, 조나단의 신호에 곧바로 땅을 박찼다.

타닥.

‘수준의 차이를 보여 주마.’

엄청난 스피드였다.

크리스는 순식간에 로만과의 거리를 좁혔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로만의 팔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나마 급소를 피한 공격이었다.

로만이 이런 기습적이고 빠른 공격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나름 이성적인 판단으로 다쳐도 문제없는 부위를 택했다.

그런데.

탁!

‘……탁?!’

손에서 전해지는 반발력.

로만과 크리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기습적인 공격에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 로만의 모습에, 크리스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확.

훅!

빠른 회수.

이어서 횡(橫)으로 베어 버리는 공격에, 로만은 이번에도 침착하게 공격을 막았다.

확실히 방금의 수비는 우연이 아니었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반발력도 그렇고, 수비의 자세가 상당히 안정되었다.

‘이것 봐라.’

예상 밖이었다.

설마 로만이 이런 기본기를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블러드 팽을 토벌한 장본인이 정말 로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로만은 조나단에 버금가는 실력자겠지만, 검을 맞닥트리는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대련은 시작되었다.

크리스는, 로만을 쓰러트려야 성질이 풀릴 것 같았다.

타닥.

팍팍팍!

공격적인 스텝을 밟으면서 위에서 내리찍는 공격을 연속적으로 휘둘렀다. 빠르고 강력한 연계 공격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터트렸고, 로만은 뒤로 물러나면서 다급하게 공격을 막았다. 충분히 좋은 수비였다. 그러나 로만이 다섯 번째 뒷걸음을 내딛는 순간, 크리스의 눈빛이 빛났다.

‘지금이다.’

훅!

일격(一擊).

벌어진 틈을 공략했다.

이번만큼은 공격이 먹히리라고 확신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목검이 로만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팔락.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그 밑으로 로만의 서늘한 눈빛이 보였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육안으로 로만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도,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서 앞을 막았다.

퍽!

‘어떻게?!’

바로 앞.

로만의 검이 어느새 크리스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막지 못했다면 그대로 승부가 끝나 버렸을 위력적인 공격. 로만은 수비에만 능하지 않았다. 공격적인 기본기도 훌륭하게 갖추었고,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크리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이드 스텝. 물 흐르듯이 시야를 벗어난 그는 아래에서 위로 목검을 휘둘렀다. 변칙적인 공격에 크리스는 숨을 들이켰다.

“흐읍.”

훅!

당황스러웠다.

이게 로만의 실력이라고?

직접 상대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거지 같네.’

이를 악물었다.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미트리의 얼간이에게 패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때를 기다리리라.

로만이 반격을 시도한 것처럼, 본인도 상대의 틈을 노렸다.

그때였다.

훅!

활짝 벌어진 가슴.

로만의 동작이 컸다.

지금이야말로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발을 내딛는 순간.

히죽.

‘……!’

로만이 웃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함정이라는 사실을.

위기였다.

자신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하고 곧바로 반격하는 로만의 모습에,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힘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콰앙!

쿠르르릉.

내부에서 일어나는 폭발.

바로 오라(aura)의 발현이었다.

기사.

그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1성(星)의 오라다.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어 주는 힘.

크리스가 오라를 발현하는 상황에, 지켜보던 조나단이 눈을 부릅떴다.

“안 돼!”

위험했다.

오라와 목검의 격돌.

결과는 뻔하다.

목검이 박살 나는 것은 물론이고, 힘의 여파로 로만이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진검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목검만으로도 사람을 썰어 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라의 힘.

가슴이 철렁였다.

실수였다.

로만이 크리스를 궁지에 몰아넣을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체면을 버리고 본인이 나섰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타닥.

로만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목숨을 노리는 일격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딱 한 걸음.

그것이 기적을 일으켰다.

로만의 얼굴이 살짝 베이며 피가 튀었고, 당황과 경악으로 얼룩진 크리스의 얼굴을 마주했다.

승부는 끝났다.

무방비의 크리스.

검을 거두었어도 크리스는 결과를 받아들였겠지만, 로만은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적의(敵意)를 드러낸 자는 확실하게 처리한다.’

천마의 규율이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목숨을 걸고 승리를 쟁취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확!

빠각!

“커헉?!”

목검이 얼굴에 작렬했다.

정통으로 맞은 크리스는 그대로 몸이 떠올랐고, 그의 얼굴에서 진득한 피와 함께 이빨 몇 개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사람들은 말한다. 3성의 기사인 조나단의 제자이며, 어린 나이에 2성의 오라를 발현시킨 크리스는 드미트리 최고의 천재라고.

그는 훗날 드미트리를 넘어서 카이로 왕국에서 명성을 떨칠 재능이라고 평가받았고, 드미트리에서는 조나단 외에 적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풀려 버린 동공은, 의식을 잃었음을 증명했다.

털썩!

나가떨어진 크리스.

그리고 그 뒤로.

“……이게 무슨.”

경악으로 얼룩진 조나단의 표정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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