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615)

6화 블러드 팽 (2)

[새벽의 이슬]

마을 중심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블러드 팽은 당당하게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딸랑딸랑.

“어서 오십시오.”

로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울이 요란하게 울렸다.

건물 내부의 풍경은 다른 펍들과 다르지 않았다.

원형 테이블과 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분주하게 맥주를 날랐다.

근방에서는 나름대로 장사가 잘되는 편인지, 눈대중으로 보아도 십수 명의 사람들이 안에 있었다.

“어?”

“헉, 로만 도련님이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로만을 향했다.

드미트리 영지를 다스리는 로열패밀리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기에, 방금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를 죽였다.

로만 드미트리.

아무리 사람들에게 얼간이라고 불리는 사내지만, 일반 평민들에게 로만은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엄청난 권력자였다.

사람들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정적이 내려앉은 상황에, 로만은 담담하게 걸음을 옮겨 바에 앉았다.

“새벽의 눈물, 27년산으로.”

“죄송합니다만, 저희 가게에 새벽의 눈물이라는 술은 없습니다. 혹시 다른 술을 추천해 드릴까요?”

“그것도 좋지. 되도록 독한 거로 부탁해. 새벽에 할 일이 많아, 조금 취해야 할 것 같거든.”

흠칫.

주인의 표정이 굳었다.

새벽의 눈물.

독한 술.

새벽에 할 일.

연속되는 단어는 블러드 팽이 정한 암구호였다.

문제는 상대가 모두가 아는 얼굴인 로만 드미트리라는 것이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주인과 로만을 번갈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순수한 호기심을 보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찰나의 순간.

로만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자, 주인이 벼락같이 탁자 밑에 숨겨 놓은 단검을 휘둘렀다.

“공격…… 컥!”

퍽!

쨍그랑!

로만이 맥주잔으로 주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동시에 몸을 뒤로 날리자, 방금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 몇 명이 로만을 공격했다.

푹푹!

바 테이블에 박히는 단검들.

어두운 조명 아래에, 블러드 팽들이 매서운 눈빛을 드러냈다.

로만이 알아낸 정보는 사실이었고, 손님으로 위장한 수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로만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도망쳐!”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펍을 뛰쳐나갔다.

덕분에 죽여야 할 적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8명.’

로만과 사내들의 몸이 뒤엉켰다.

바로 근거리에서 휘두르는 단검은 위협적으로 로만의 급소를 노렸지만, 로만은 바짝 붙은 상태에서도 그 공격들을 모두 피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곧바로 반격해서 상대의 목에 구멍을 뚫었다.

간결한 동작으로 단검을 휘두르면, 상대는 어김없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픽픽 쓰러졌다.

“이 새끼가!”

“죽여!”

평화로운 펍은 이제 없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맥주로 피곤함을 달래는 노동자가 아니라, 피의 괴물들이 본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상대는 그들을 모두 집어삼킬 포식자였다.

사방에서 달려들어도, 오히려 쓰러지는 것은 블러드 팽 일당이었다.

퍽!

콰당!

마지막 남은 사내의 얼굴을 테이블에 처박았다. 단단한 테이블이 부서지며 사내가 그대로 기절해 버렸고, 로만은 바닥에 내팽개쳐 버린 그의 얼굴을 망설임 없어 걷어찼다. 피를 뿜으며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내. 바닥에 축 늘어진 그의 몸은, 더 이상 혼이 깃들어 있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끝인가.”

순식간이었다.

로만에게 달려들었던 모든 사내가 죽었다.

단 한 명.

처음에 맥주잔에 얻어맞았던 주인만이, 피로 물들 얼굴로 로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 대체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다니.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이곳을 방문했고, 너희들을 무슨 이유로 공격했는지. 그걸 몰랐다면 날 공격하진 않았을 텐데.”

로만이 히죽 웃었다.

의자를 하나 가져와 바로 앞에 앉는 로만의 모습에, 공포에 질려 있던 주인의 얼굴이 돌연 돌변했다.

사나운 악귀의 표정.

주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우리는 블러드 팽이다. 네 녀석에게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의 동료들이 언제고 너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귀족의 신분? 그따위 것이 너를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귀족도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귀족의 몸뚱이도, 칼이 들어가면 숭숭 구멍이 뚫리고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는 것이 현실이지.”

“그렇다고 널 살려 주진 않아.”

“그래, 죽여라! 블러드 팽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로만의 웃음이 짙어졌다.

상대가 발악하면 할수록, 로만은 이곳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장소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 나는 너 같은 녀석을 만나고 싶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문을 할지라도 입을 딱 닫고 어떻게든 정보를 함구할 사람. 그런 녀석이야말로, 값진 정보를 알고 있을 테니까.”

로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확인해 보지. 네가 어떤 협박에도 입을 열지 않는, 그런 강인한 사람인지를 말이야.”

주인의 의지는 강했다.

어린애처럼 비명을 지르며 정보를 내뱉던 녀석들과는 다르게, 손가락을 잘라 내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만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아들의 사진인가.”

주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서랍에 고이 모셔 놓은 한 장의 사진에는, 주인을 꼭 닮은 아들과 행복해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 아니다.”

“아니긴. 너를 꼭 빼닮았는데.”

“이 개새끼야! 설마 귀족이라는 새끼가, 가족을 가지고 협박을 할 생각이냐!”

몸을 들썩이며 발악하는 주인.

제대로 골랐다.

로만은 다시 주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사진을 흔들었다.

“블러드 팽에 대해 조사하면서 아주 재밌는 정보를 알아냈어. 사람들이 블러드 팽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보복을 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살 테러리스트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더군. 원래부터 블러드 팽의 일원이 아니라, 블러드 팽에게 큰 빚을 졌던 사람들. 분명히 자살 테러를 할 만큼 악독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악귀로 변해 버렸어. 왜 그렇게 변했을까. 그들에게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변해 버린 걸까.”

“…….”

주인은 입을 꾹 닫았다.

상관없었다.

그런 반응만으로도, 로만의 의도는 제대로 적중했다.

“블러드 팽은 빚을 받아 내기 위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지. 그 과정에서 채무자의 가족들을 노예로 데려가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야. 그리고 그게 바로 블러드 팽의 진실이지. 블러드 팽은 정말 목숨을 버릴 정도로 악마 같은 인간들의 집단이 아니라, 자신들이 궁지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인질로 협박해서 복수를 시키는 거야. 어때? 제법 그럴듯한 가설이지?”

“그래도 변한 건 없다. 블러드 팽은 반드시 복수한다.”

피식.

로만이 웃었다.

참으로 멍청한 인간들이다.

자신의 가설을 인정한 순간부터, 주인은 본인이 어떤 함정에 빠졌는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네가 어떠한 정보도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길로 내성으로 돌아가 가문의 기사들에게 명령할 거야. 이 사진에 있는 네 자식. 그 녀석을 찾아내서 반드시 죽여 버리라고. 그것도 편안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고문 끝에 죽여 달라고 발악하는 녀석을 아주 천천히 죽이는 게 좋겠지.”

“뭐, 뭐라고?”

“왜? 못할 것 같나?”

“너는 귀족이잖아! 귀족이 어떻게 그런……!”

“그건 편견이야. 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우리를 적대하는 거라면, 우리도 그 가족을 내버려 둘 이유는 없지.”

약육강식의 세계.

그곳에서의 패배는 죽음을 말한다.

정의?

그딴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고, 로만은 그런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곧 헤어질 약혼녀에게 예를 다했다고 해서.

하인에 불과한 한스를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로만의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고, 천마로서 살아온 로만에게는 악귀(惡鬼) 같은 모습도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똑똑히 기억해. 나는 내가 적으로 분류하는 녀석들의 안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 그 녀석들이 어떻게 죽든, 어떤 고통에서 죽어 가든, 나는 내 안위를 방해하는 녀석들의 목숨 따위는 파리보다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잘 생각해 보라고. 어차피 가족들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네 가족을 노예로 부린 블러드 팽에게 배팅할지, 아니면 내가 블러드 팽이 네 가족을 건드릴 틈도 없이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줄 것인지.”

단검을 빙빙 돌렸다.

그리고는, 사진에 있는 아들의 머리에 단검을 콱 박았다.

“자, 선택하라고.”

그 순간.

주인은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예전에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인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로만이 떠나고.

난장판이 되어 버린 현장에, 한스를 필두로 드미트리 기사단이 도착했다.

“이게 무슨…….”

조나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들었다.

로만이 주인과 대화를 주고받자, 돌연 주인과 손님들이 기습적으로 로만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 이후의 장면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로만 도련님이 혼자서 이들을 모두 처리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로만은 전투의 소질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약골이었다. 피를 보면 덜덜 떨고,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얼간이. 그런데 로만 혼자서 이 많은 사내를 처리했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괴리감이 일었다.

자신이 아는 로만과 목격자들이 말하는 로만이 달랐다.

그때였다.

“단장님!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펍의 주인.

그가 살아 있었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처참한 몰골의 주인이 보였다.

“웩!”

주인이 피를 한 움큼이나 뱉어 냈다.

고문을 당한 모양인지 오른손은 손가락이 전부 잘려 나간 상태였고, 그가 뱉어 낸 진득한 핏물에는 내장 조각 같은 것들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이 일어난 사람처럼, 선명한 목소리로 조나단에게 말했다.

“얼른 로만 도련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로만 도련님에게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블러드 팽의 본거지는 이곳 드미트리가 아니라, 로렌스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요. 그 말을 듣자마자 로만 도련님은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일을 처리하려는 것 같은데,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얼른 로만 도련님을 도와주십시오! 도련님을 도와, 반드시 블러드 팽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주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자신은 정보를 말한 대가로 이미 변절자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로만이 말한 것처럼, 로만이 그들을 확실히 처리해야만 자신의 가족이 무사할 수 있다.

주인이 땅바닥을 기었다.

피로 물든 손으로 조나단 기사단장의 발목을 잡으며, 처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제발 그들을 모두 처단해 주십시오.”

“…….”

조나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로만을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블러드 팽 일원의 모습도 당황스럽지만, 가장 큰 문제는 로만의 행보였다.

‘정말 홀로 그들을 처리하러 간 건가?’

로렌스.

그곳은 드미트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길을 떠났다는 말에 머리가 굳는 느낌이었다.

만약 한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조나단은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할 뻔했다.

“조나단 기사단장님! 얼른 출발하셔야 합니다! 도련님이 위험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차.”

조나단이 정신을 차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장자가 다른 영지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번 사건은 로렌스와 사전에 협조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양해를 구할 여유가 없었다.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드미트리 기사단.

그들의 목적지는 바로 로렌스였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