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615)

5화 블러드 팽 (1)

외성.

그곳에는 일반 영주민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형성되어 있다.

성 밖과는 다르게 판잣집 위주의 빈민가가 아니라, 잘 만들어진 거리와 음식점, 그리고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광장도 있었다.

특히 광장 중심부에 위치한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동상은 드미트리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떠들썩하네.’

주변은 시끄러웠다.

많은 인파가 오갔고, 물건을 파는 사람과 그들에게 물건을 구매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로만은 거리를 걸었다.

당연히 로만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드미트리 가문의 사람들은 대부분 내성 안에서 생활하지만, 로만은 유흥과 같은 즐길 거리를 위해 외성으로의 외출이 잦았다.

그 과정에서 로만이 행패를 부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로만의 모습에 조용히 속닥거렸지만, 그렇다고 다가와서 알은 체는 하지 않았다.

영주 가문에 대한 예의?

적어도 로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로메로 남작을 진심으로 존경하나, 그렇다고 망나니 같은 아들마저 대우하진 않았다.

‘이제는 블러드 팽도 내 위치를 알고 있겠지. 복수의 대상인 나 로만 드미트리가, 단 한 명의 경비도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성을 나선 이유였다.

로만은 한스를 대동하고 일부러 거리를 배회했다.

그건 이전에도 종종 보여 주었던 모습이었고, 어느 정도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일부러 한스는 안전한 음식점에 두고 나왔다.

한스의 역할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스의 존재는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포인트일 뿐, 실제로 그를 위험에 빠트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블러드 팽이 소문처럼 복수의 대상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복수할 절호의 기회겠지.’

오늘.

로만의 외출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만은 아버지에게 블러드 팽의 일을 처리하라는 임무를 맡은 뒤에, 혼자 방에 틀어박혀 그들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았다. 사실 그들의 무력은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기사단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수준이지만, 문제는 점조직 형태의 세력은 한 번에 소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블러드 팽을 건드리지 않았다. 괜히 그들을 건드렸다가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일평생을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세력.

그래서 로만은 계획을 세웠다.

그들을 먼저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이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다.

“오늘 생선이 싱싱합니다!”

“남부의 실크가 단돈 1골드!”

“막스, 빨리빨리 움직여!”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로만은 그 사이를 걸으며, 차분하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오늘은 드미트리 기사단이 정기 훈련을 진행하는 날. 다른 때보다 경비의 인원이 대폭 감소했기 때문에, 외성에서 일이 터진다고 할지라도 빠르게 대응할 수 없겠지. 블러드 팽으로서는 이런 날을 놓치기 싫을 거야. 언제 외출할지 모르는 드미트리의 도련님이, 그것도 드미트리 기사단이 훈련하는 오늘과 같은 날에, 경비 한 명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

미끼.

로만은 스스로를 매력적인 미끼로 만들었다.

무림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을 자주 애용했었다.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대단한 암살자들도, 자연스럽게 허점을 노출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뒤에 세 명.’

슬슬 꼬리가 붙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눈치를 보던 몇몇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자신의 뒤를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유인한다.’

자연스럽게.

로만은 방향을 틀어 사람들이 한산한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로만이 즐겨 애용하던 유흥가가 있는 방향이라, 블러드 팽으로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을 터.

미끼를 살살 흔들었다.

그들이 미끼를 물도록.

로만은 본심을 숨기고, 차가운 표정으로 골목 깊숙이 사라졌다.

* * *

“조나단 기사단장님! 조나단 기사단장님!”

한참 기사단의 훈련을 지도하고 있던 조나단은, 헐레벌떡 뛰어오는 한스의 모습에 표정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도, 도련님이 후욱, 위험, 후욱.”

“침착하게 말해.”

한스는 헐떡이는 숨에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외성에서 이곳까지 단번에 달려오는 바람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한스에게는 로만의 위험을 알리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로, 로만 도련님이 위험합니다!”

“도련님이?”

“예! 도련님이 경비 한 명 없이 외성으로 외출하셨는데, 아무래도 블러드 팽 일당과 한바탕하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한시라도 빨리 도련님을 찾아야 합니다!”

한스의 목소리는 잔뜩 격양되었다.

로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목소리였으나, 조나단은 황당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내 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지금 너는 로만 도련님이, 오라는커녕 검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분이 블러드 팽과 싸우려고 홀로 외성으로 나갔다고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정말 황당한 소리군.”

조나단이 피식 웃었다.

로메로 남작이 드미트리 영지를 하사받을 때부터 드미트리의 기사였던 그는, 로만을 비롯한 드미트리의 도련님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다른 도련님들은 검사로서 훌륭한 자질을 보였다. 실제로 그들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수도로 진출했지만, 로만 도련님만큼은 예외였다.

약골 중의 약골.

무엇보다도 새가슴인 게 문제였다.

피만 보면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다 보니, 로만은 검사로서의 재능이 전무하다고 판단했다.

머리는 멍청하고, 몸은 쓸 줄을 모르고.

얼간이라는 평가는 처음에 기사단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그런 로만이 블러드 팽을 상대하러 나갔다고 하니, 조나단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도련님을 구해야 합니다!”

한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조나단은 탐탁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한스의 말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영주님의 특별 명령이 있기도 했고.’

며칠 전.

로메로 남작은 조나단을 불러 로만을 도와주라고 명령했다. 조나단을 비롯한 드미트리 기사단은 로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하늘처럼 따르는 영주님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만약 한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멍청한 얼간이 녀석이 제대로 실수를 저질렀다.

대체 왜 검을 쓸 줄도 모르는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설친단 말인가.

조나단이 바락 소리쳤다.

“지금 당장 전군은 무장(武裝)을 갖추어라.”

척척.

일렬로 정렬하는 기사단.

조나단이 사나운 얼굴로, 한스를 내려다보았다.

“도련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우리의 땅에서, 감히 드미트리의 도련님을 건드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 * *

저벅저벅.

골목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로만의 발걸음에 맞춰 조용히 따라붙던 사내들이, 외진 공간에 들어서자 본색을 드러냈다.

타다닥.

“블러드 팽의 복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사내가 득달같이 달려들더니, 품에 있던 단검으로 로만을 힘껏 찔렀다. 예고도 없이 벌어진 기습적인 공격. 평범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상황이지만, 로만의 반응은 재빨랐다.

확.

간발의 차이.

로만이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는, 겨드랑이로 상대의 팔을 붙잡더니 그대로 꺾어 버렸다.

투둑.

“크아아아아악!”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기괴하게 꺾인 팔에 그가 단검을 놓치자, 로만은 떨어지는 단검을 낚아채 사내의 목덜미를 수차례 쑤셔 버렸다.

순간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사내는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목에서 뿜어지는 피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피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썅!”

“이런 개새끼가!”

사내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더니 동시에 로만을 덮쳤다.

훅!

사방에서 로만의 목숨을 노리고 무기가 휘둘러졌다.

햇빛을 받은 예리한 칼날들은 반짝반짝 빛났지만, 그것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그러자 사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로만이라면, 이런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았다.

퍽!

“커억.”

로만의 발차기가 사내의 복부에 작렬했다.

사내는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반격을 시도하려 했으나, 로만은 날랜 움직임으로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황급히 상대의 위치를 찾았을 때는 로만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홱, 하고 고개가 돌아갔다.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고, 이빨이 옥수수처럼 바닥에 후두둑 쏟아졌다.

이어서.

“크악!”

다른 사내의 비명이 들렸다.

얻어맞은 사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다른 사내의 허벅지에는 로만이 던진 단검이 꽂혔다.

바닥에 주저앉은 사내들.

순식간에 세 명이 당해 버렸다.

아직 살아 있는 두 명의 사내는, 목에 구멍이 뚫린 채로 죽은 동료의 모습에 덜컥 겁을 먹었다.

‘이, 이게 로만이라니.’

정보가 잘못되었다.

아니, 상식이 잘못되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로만은, 절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 명이 끝인가?”

로만의 음성은 덤덤했다.

로만은 얼굴에 묻은 피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닦아 내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다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로만의 감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블러드 팽에는 내 감각을 피할 실력자가 없다.’

지난 며칠.

로만은 짧은 시간에 육체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평범한 무림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무림을 통일한 천마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무림 제일의 신공은 숨을 쉬는 행위만으로도 로만의 육체를 발전시켰다.

천마의 기억과 천마의 무공은 그런 기적 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로만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경지에 오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본래의 힘을 0.1%만 회복하더라도 블러드 팽은 문제가 없었다.

숨을 고르는 로만.

단전에서 일말의 마나가 반응했다.

마나와는 거리가 멀었던 로만의 육체는, 벌써부터 마나를 쌓으며 새로운 세계에 돌입한 상태였다.

“우, 우리를 죽였다간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블러드 팽이다!”

사내들이 발악했다.

겁에 질린 그들은, 말로써 로만의 의지를 무너트리려 했다.

“이미 암살을 시도해 놓고 협박을 하다니. 머리가 멍청한 걸까, 아니면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 걸까.”

로만이 그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단검으로 다시 한번 다리를 찍었다.

퍽!

“크악!”

“지금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내 말에 솔직하게 대답한다면, 너희에게 특별히 갱생의 기회를 주도록 하지.”

“그, 그게 무슨…… 악!”

퍽!

“묻는 말에만 대답해.”

로만이 그들의 눈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는, 로만의 눈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

점조직을 소탕하는 방법.

단순하지만 간단하다.

그들의 실체를 알 수 없을 때는, 밑에서부터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실체에 도달한다.

로만이 웃었다.

“너희들의 윗선이 누구냐.”

대화는 짧았다.

블러드 팽 일당은 어떻게든 정보를 함구하려고 했지만, 고문이 시작되자 그들은 곧바로 정보를 말했다.

손가락 마디를 잘라 내고.

뜬 눈을 도려내는 상황에, 그들이 버틸 방법은 없었다.

“새, 새벽의 이슬이라는 펍이 있습니다. 저, 저희는 그곳에서 임무를 받습니다. 특별한 암구호를 말하면 그들이 임무를 주는 방식이라, 우리로서는 그 이상의 정보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 그런 정보를 말했어야지.”

“그럼 저희를 살려 주시는 겁니까?”

“아니, 쓰레기들에게 갱생이란 죽음뿐이다.”

푹!

사내의 심장에 단검을 박았다.

죄책감은 없었다.

마교는 약육강식의 세계.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마교의 미덕이 아니다.

로만은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 내며, 다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씩, 하나씩.’

웃음이 나왔다.

로만은 안다.

자신이 좋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천하제일(天下第一)로 군림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 오랜만에 살아나며 감각을 자극했다.

드미트리 기사단이 난리가 난 시각.

로만은 홀로, 블러드 팽의 소굴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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