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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615)

4화 드미트리의 얼간이 (4)

문밖으로 들리는 고성.

로메로 남작의 분노야 예상했던 일이지만, 문제는 로만에게 내려진 형벌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래서 로만이 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상대가 먼저 파혼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면 본인이 편했을 텐데, 로만은 끝끝내 플로라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당신 진짜 미쳤어요?”

“글쎄요. 난 멀쩡한데.”

로만의 반응은 덤덤했다.

플로라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에도,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벅벅 닦아 낼 뿐이었다.

머리의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로메로 남작도 로만에게 큰 상처를 입힐 의도는 없었고, 살갗이 벗겨 나간 부위에서 핏방울이 맺히는 정도였다.

“당신이 지금 어떤 일을 맡았는지 알기나 해요? 블러드 팽이에요, 블러드 팽. 근방에서 극악무도하기로 소문난 집단인데, 그걸 대체 가문의 도움도 없이 당신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그래요?”

블러드 팽.

그들의 악명(惡名)은 드미트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로렌스에서도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 특히 귀족을 테러한 사건은 그들의 악명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블러드 팽이 무서운 이유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귀족들이 그들의 밥그릇을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 귀족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지만, 만약 본인들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무조건 보복한다고요. 그들은 정상이 아니에요. 몸에 마법 폭탄을 두르고 자살 테러도 하는 녀석들인데, 그런 녀석들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사실대로 말해도 좋으니까, 당장 남작님께 가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왜라뇨! 이유는 충분히 설명…….”

“이거 웃기는 사람이네.”

로만이 피식, 웃었다.

웬만한 남정네들의 마음을 단번에 녹여 버릴 듯한 눈망울을 바라보면서도, 로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파혼을 제안할 때는 내 사정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모든 책임을 떠안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니 막상 걱정되는 거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나를 처음 만나는 날에 ‘파혼’을 언급한 그 순간부터, 그쪽은 내 사정을 걱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게 당신과 나의 사이인 겁니다.”

플로라.

그녀를 만나면서 로만은 약혼자로서 예를 다했다.

몸에서 풍기는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 표정이 일그러질 만큼 고약한 향수를 몸에 듬뿍 뿌렸고,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예복도 군말 없이 입었다.

그건 상대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로만도 플로라와 마찬가지로 파혼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여인의 기분을 초면부터 상하게 하면서까지 일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플로라는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날.

처음으로 섞는 말.

그것이 파혼이었다.

플로라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로만은 그녀에게 배려해 줄 필요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파혼을 받아들였다.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은, 더 이상 플로라와 엮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

플로라는 당황했다.

이건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보통의 남자들은 본인의 호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로만은 과할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말을 잃은 플로라.

그녀를 내려다보며, 로만은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남남입니다. 그러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선을 그었다.

많은 남정네가 흠모하는 꽃이라 한들, 그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법.

로만은 플로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시선을 돌리더니, 그녀를 두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한바탕 소란이 정리되고.

홀로 집무실에 남은 로메로 남작은, 해가 저물도록 술을 들이켰다.

“술이 과하십니다.”

리한나 드미트리.

로만의 어머니이자 로메로 남작의 아내인 그녀가, 주변의 상황을 확인하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은 엉망이었다.

로메로 남작이 던진 물건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비어 있는 술병들이 가득했다.

술병에서 풍기는 알코올 냄새만으로도 표정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취기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로메로 남작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리한나를 바라보았다.

“리한나. 나는 오늘 로만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말았소. 그게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만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더군. 참으로 못난 아비이지 않소? 자식이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폭력으로 일을 바로잡으려 하다니.”

고통에 머리를 헝클였다.

로메로 남작은 태생이 고귀하지 못하다.

평민으로 태어난 그는, 대장장이였던 아버지에게 매일 죽을 듯이 맞으면서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였을까.

로메로 남작은 귀족의 작위를 얻는 순간, 본인의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경험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세 명의 아들은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

문제는 맹목적인 사랑도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하필이면 평민이었던 시절을 같이 경험한 로만이 엇나가고 말았다.

아픈 손가락.

그게 로만이었다.

로만이 엇나가더라도 폭력 한 번 행사하지 않았던 로메로 남작이,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리한나는 로메로 남작에게 다가가더니, 그를 안아 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폭력이 올바른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엇나갔을 때,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무너지지 마십시오. 제가 아는 로메로 드미트리는 강인한 남자라서, 아들이 엇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방관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오. 로렌스의 영애가 방문하고 난 직후에 로만이 파혼을 말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받은 것이겠지. 그런데도 나는 로만에게 분노를 분출했소.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렌스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손쉬운 상대를 고르고 말았소.”

“압니다, 당신의 마음을. 하지만 일을 바로잡을 기회는 지금도 있습니다.”

리한나.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로메로 남작이 평민이었던 시절부터, 리한나는 항상 로메로 남작에게 현명한 방법을 제시했다.

“……블러드 팽을 말하는 것이오?”

“예. 로만은 자존심이 강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 또한 홧김에 블러드 팽을 혼자 처리하겠다고 말한 것이겠죠.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이 로만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 맞는 말이오.”

로메로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러드 팽.

극악무도하기로 소문난 집단을 로만이 처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괜히 벌집을 쑤셨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로만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대비책이 필요했다.

리한나가 말했다.

“조나단 기사단장을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로만도 혼자서는 일을 처리할 수 없을 테니, 분명 기사단장을 회유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럼 조나단 기사단장은 못 이기는 척, 적당히 로만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면 될 일입니다.”

“당신의 말이 맞소.”

조나단.

드미트리 기사단의 단장이자, 3성의 오라(aura)를 사용하는 실력자.

그라면 믿을 수 있다.

로메로 남작이 하인을 불렀다.

“지금 당장 조나단 기사단장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예전에 그들이 알던 아들이 아니었다.

자신이 뱉은 말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는, 그것이 그들이 앞으로 알게 될 새로운 로만의 모습이었다.

* * *

며칠 뒤.

로만은 내성(內城)을 나섰다.

경비 하나 없이 한스만을 대동한 걸음에, 한스는 로만의 뒤를 따라붙으면서도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도련님. 이대로 외출하시면 정말 위험합니다. 블러드 팽 일당은 귀족을 테러한 경험도 있는 극악무도한 집단입니다. 저번 사건으로 분명 도련님에게 보복할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대놓고 경비 없이 거리를 활보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제발, 제발 내성으로 돌아가시죠.”

한스의 말대로였다.

지난 며칠.

로만은 블러드 팽에 대해 알아보았고, 그들이 소문처럼 위험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만이 말했다.

“네 말대로 블러드 팽은 위험한 집단이다. 본거지와 세력의 규모를 알 수 없는 점조직에, 언제 어디서 테러를 시도할지 모르니 사람들로서는 그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말이다. 너는 이 블러드 팽이라는 집단이, 어느 순간부터 이 정도의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블러드 팽은 본인들과 대립하는 고리대금 세력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악명을 얻었지. 그게 시작이다. 악명은 공포를 낳았고, 그 공포를 활용하면 얼마나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를 그들은 깨닫고 말았지.”

이상한 말이었다.

한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로만을 보았다.

“어쨌든 위험한 것은 맞지 않습니까?”

“그렇지.”

로만이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다.

블러드 팽은 실제로 위험하다.

악명은 몸을 부풀렸고, 그 악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악명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만 했으니까.

무림에서도 잃을 것이 없는 녀석들은 조심할 필요성이 있지만, 문제는 로만이 천마라는 것이었다.

천마.

마교의 정점.

더러운 흙탕물에서 정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자살 테러?

그런 건 일상이었다.

로만을 노리고 달려드는 암살자들이 하루에도 수십에 달했고, 죽어서까지 자신을 저주하겠다는 독기 어린 눈빛은 너무 많이 목격해서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로만은 그런 역경을 이겨 내고 정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상대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 그 눈을 도려내 버렸고, 저주를 내뱉으면 혓바닥을 뽑아 버렸다.

그게 로만이다.

블러드 팽의 악명은 로만에게 조금의 공포도 선사하지 못했다.

“일단 저기로 들어가자.”

“예?”

걸음을 멈추는 로만.

돌연 식당으로 들어가는 로만의 모습에, 한스는 당황하면서도 헐레벌떡 로만의 뒤를 따라갔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식탁을 가득 메울 정도로 다양한 음식들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지만, 로만은 담담한 목소리로 한스에게 말했다.

“먹고 있는 동안 잠시 나갔다 오겠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군침을 흘리던 한스가 화들짝 놀랐다.

혼자 나가겠다니.

그건 블러드 팽의 먹잇감이 되겠다는 뜻이지 않은가.

“지금부터는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다. 굳이 너까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설령 제가 위험해진다고 할지라도, 도련님을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한스는 단호했다.

당장에라도, 고기를 써는 나이프라도 들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웃음이 나왔다.

한스.

괜찮은 사람이었다.

주인과 하인이라는 신분의 벽을 떠나, 적어도 그는 로만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너는 내 사람이다. 맞나?”

“당연히 저는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라. 나는 의미 없는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네 본인의 욕심을 위한 일이다. 그러니 너는 이곳에 앉아 내가 명한 대로 음식들을 즐기고 있으면 된다. 나와 같이 나와 준 것만으로도 네 역할은 충분히 했다.”

로만.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그는 울타리를 세웠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 처음으로 한스라는 사람을 넣었다.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로만은 한스를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였고, 앞으로 그의 목숨을 가벼이 생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금방 돌아오겠다.”

그렇게 로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한스.

그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로만의 말을 되뇌었다.

“내 사람이라니.”

로만 도련님.

그를 따르면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겨우 천민에 불과한 자신을 진심으로 받아 주는 그의 모습에, 한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울컥했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해.”

로만 도련님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밖에 홀로 돌아다녔다가는 분명히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스는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드미트리 기사단.

지금은 그들에게, 드미트리의 도련님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때였다.

한스마저 떠나간 자리.

주인을 잃은 음식들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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