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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615)

3화 드미트리의 얼간이 (3)

로렌스와 드미트리 양 가문에서 혼인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플로라의 아버지.

로렌스 자작은, 플로라를 앞에 앉혀 놓고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

“딸아. 현재 영지의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는, 현명한 우리 딸에게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지금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재력(財力)이어도 좋고, 무력(武力)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확실한 건 난관을 해결할 만큼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로렌스 가문의 보물인 너를 정략결혼 대상자로 내놓을 수밖에 없단다. 정말 미안하다. 이 못난 아비로 인해,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들어서.”

그날.

플로라의 세상은 무너져 버렸다.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이 정략결혼으로 팔려 가듯 혼인을 맺는다지만, 그래도 플로라는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의 연을 맺는 것. 상대가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서로 간의 사랑이 있다면 조건적인 문제들은 이겨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드미트리라니!

이건 날벼락이었다.

‘드미트리 가문은 이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일반 평민 가문이었어. 아무리 내가 백마 탄 왕자님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광산(鑛山)의 인부들로 득실거리는 드미트리와 평생의 연을 맺어야 한다니.’

조건적인 문제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지만, 그건 상대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전제였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미트리는 아니다. 항상 본인만의 낭만으로 가지고 있었던 혼인의 꿈을, 이렇게 드미트리의 광부에게 바치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장래가 유망한 드미트리의 차남과의 혼인을 추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혼인의 대상이 드미트리의 장남으로 바뀌었다.

그에 관해서는 소문으로 들었다.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로렌스에서도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싫어.’

끔찍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문무(文武) 모두에 재능이 없어서 스물 중반이 되도록 수도 진출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변방의 영지에 틀어박혀 향락에 빠져 산다는 소문의 주인공.

얼마 전에 귀족 파티에서 들은 바로는 외형마저 볼품이 없다고 했다.

플로라의 낭만에는, 아주 조금도 부합하는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플로라는 그간 현명한 딸로서 착하게 살아왔지만, 그녀도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이건 진짜 아니야.’

영지의 사정?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드미트리의 얼간이에게 팔려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는 생각보다 현명하고 헌신적인 딸이 아니었고, 파혼 이후의 상황은 하늘에 맡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드미트리에 방문하는 목적은 대외적으로 혼인 전에 미리 정략결혼 대상자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만, 실제 목적은 일반적인 파혼 통보를 위한 것.

그렇게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다.

그리고 확신했다.

‘소문대로 볼품없는 사내야.’

170 중반의 키.

검은 머리칼에 인상은 날카롭고 남자다운 기색이 있지만, 피부가 좋지 않아 카리스마를 깎아 먹었다.

무엇보다도 로만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귀족들은 원래 향수를 즐겨 사용한다지만, 로만은 과할 정도로 사용한 상태.

그것이 피 냄새를 없애기 위한 로만의 배려라는 사실을 모르는 플로라로서는, 소문처럼 향락에 빠져 사는 로만이 여자의 냄새를 덕지덕지 묻혀 왔다고 생각했다.

만나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플로라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결혼을 없었던 것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아마 상대는 반발할 것이다.

자신의 미모에 반해 정략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상대이니만큼, 그를 설득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터.

플로라는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녀는 이 결혼을 반드시 무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 그럽시다.”

로만의 대답.

예상치도 못한 반응에, 플로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파혼을 정말 하겠다고요?”

플로라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나름 표정 관리를 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전체적으로 어색한 표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도 사람인지라, 이번 혼인을 두고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로렌스의 꽃이라 불리며 모든 남성이 바라는 결혼 상대지만,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는 저는 당신을 품기에는 한없이 모자란 사람이죠. 그래서 저도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 결혼이 옳은 것인지 매일 밤 고민했지만, 사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저 혼자만의 의견으로 결혼을 무를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당신의 생각을 알았으니, 저도 결단을 내려야겠지요.”

로만은 담담했다.

사실 파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로만은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이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플로라 로렌스.

소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로만에게 있어 여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단순히 외형 하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중혁으로 살았던 시절에, 그에게 몸과 마음을 전부 바치겠다는 여자들의 수는 대해(大海)를 이룰 정도로 많았다.

무림의 정점이라는 배경과 훤칠한 외모. 그리고 사람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백중혁의 태도에, 여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고 백중혁을 쟁취하려 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적대 세력의 음모도 있었다.

사람을 만남에 있어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던 백중혁은, 자연스레 외모의 가치를 뒷전에 두었다.

예쁘다.

그러나, 그뿐이다.

로만은 지금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상황이고, 플로라 로렌스라는 짐을 떠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플로라가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제가 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번 결혼은 그쪽의 주장으로 성사된 것이 아닌가요? 원래는 드미트리 가문의 차남과 혼담이 오가는 상황에서, 당신이 저를 강하게 원하는 바람에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아무런 조건 없이 파혼을 받아들이겠다고요? 저로서는 이해가 잘 되질 않네요.”

피식.

로만이 웃었다.

참으로 이상한 여인이었다.

방금까지는 어떻게든 설득할 기세로 파혼을 묻더니, 흔쾌히 받아들이자 오히려 말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저와 결혼을 하길 원하십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럼 괜히 서로 피곤한 일은 만들지 맙시다. 저는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의 생각이 맞았기 때문에 파혼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파혼의 책임은 전적으로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어차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는 저는 파혼남이라는 타이틀을 추가로 달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앞으로 앞날이 창창한 로렌스의 꽃은 다르지 않습니까?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제 여성 편력이 파혼의 이유라고 칩시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플로라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파혼남.

그 타이틀은, 앞으로 자신에게 따라붙을 귀찮은 혼담을 잘라 낼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전적으로 로만 본인을 위한 일이었지만, 플로라로서는 진실을 모르기에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 대체 뭐지.’

플로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당황의 연속이었다.

소문대로라면 로만은 외형처럼 볼품없는 내면을 가져야 하는데, 로만의 언행은 보면 볼수록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만의 확실한 주관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행동력. 적어도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어딜 가서도 얼간이라 불릴 정도로 모자랄 리가 없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 버렸고, 파혼은 현실이 되었다.

“중대한 일일수록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 차라도 마시면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이 문제를 가지고, 아버지를 뵙고 오겠습니다.”

로만을 더 붙잡을 수는 없었다.

휑하니 걸음을 옮기는 로만의 모습에, 플로라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 * *

쾅!

“그게 무슨 소리야! 파혼이라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파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드미트리의 영주인 로메로 남작은 폭발하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이 결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미 로렌스의 영애와도 얘기를 끝낸 부분이니,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이익……!”

로메로 남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건 통보였다.

선택을 위해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로만은 이미 결론을 내놓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런 멍청한 자식! 사람들이 널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러도, 나는 아비의 도리로서 너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자 노력했다. 너는 다른 내 자식들과는 다르다. 그 녀석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귀족의 자제로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너는 나와 평민이었던 시절을 같이 경험했지. 그래서 네가 망나니처럼 굴어도 이해했다. 환경이 뒤바뀌었으니, 어린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테니까.”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로메로 남작의 말대로였다.

카이로 왕국에 무기를 보급하는 기회를 얻었을 때, 로메로 남작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인 로만이 있었다.

평민이었던 아이가 귀족의 자제로.

로만의 유년기는 그렇게 세월을 맞이했다.

자신을 얕보던 아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에, 로만의 인성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현재.

로만은 드미트리의 치부가 되었다.

드미트리가 평민이었음을 상징하는, 그래서 남들에게 보여 주기 싫은 그런 치부.

“로렌스 가문과의 결합은 우리 드미트리가 귀족으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내가 너에게 큰 역할을 바라더냐? 네가 그토록 원하던 어여쁜 귀족 영애와 결혼만 하면 되는 일이거늘, 그깟 것도 하지 못해서 일을 망치다니.”

“죄송합니다.”

“이건 죄송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팍!

로메로 남작이 손에 잡히는 물건을 로만에게 던졌다.

강한 충격이 로만의 머리를 때렸지만, 로만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에도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 책임의 문제다.

약속을 어겼으니, 그에 대한 대가는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이번 일만 잘 진행된다면 네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일을 이리 망쳤으니, 너는 앞으로 6개월 뒤에는 전쟁터로 떠나야 한다.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그리고 블러드 팽과 한바탕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다. 증인들에 의하면 네가 그들을 처벌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한다. 하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녀석이 어떻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겠나? 아마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겠지. 문제는 블러드 팽은 나조차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벌집이라는 거다. 아들아. 네가 자식으로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순간, 너는 본인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의무가 생겼다. 그러니 이번 문제는 네가 직접 해결하라. 나는, 그에 관해서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로메로 남작은 화가 나서, 로만을 벌할 수 있는 모든 발언을 내뱉었다.

국방의 의무.

블러드 팽.

평소의 로만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로메로 남작은 당연히, 로만이 언제나처럼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면서 용서를 구하리라 생각했다.

‘대외적으로 파혼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번 문제는 아직 해결할 여지가 있다.’

그의 판단이었다.

로만의 기를 완전히 꺾어 버리고, 의도대로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뭐?”

“저로 인해 벌어진 일입니다. 아버님의 말씀처럼, 제가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로메로 남작이 당황했다.

예상치도 못한 전개.

로만은 고개를 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자리를 떠났다.

로메로 남작은 황당한 나머지, 로만을 붙잡지도 못했다.

밖으로 나온 로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닦는데, 바로 앞에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플로라 로렌스.

밖에서 모든 대화를 들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하고 말았다.

“당신 진짜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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